<서경석 목사의 장편실화>
나의 스토리 (54~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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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경석 목사의 장편실화>
나의 스토리 (54~56)
  • 동북아신문 기자
  • 승인 2007.08.2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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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4. ‘경실련 때문에 전세값이 올랐어요’

경실련 초기에 전세값과 월세가 너무 올라 40대 가장이 전세값을 마련못해 자살한 사실이 신문에 보도된 적이 있다. 누구나 이 소식에 가슴아파했지만 부동산 투기 바람에 덩달아 천정부지로 뛰는 전세값을 잠재울 묘안이 사실상 없었던 때이다.
부동산투기 근절을 중요한 운동목표로 삼고 있었던 경실련으로서도 서민들을 고통스럽게 하는 ‘전세값 폭등’ 문제를 해결할 대안을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의 대안은 두 가지였다.

하나는 전세기간을 2년으로 연장하자는 것이었고, 또 하나는 임대료를 매년 5%이상 인상되지 않도록 규제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 두 가지를 대안으로 제시하면서 우리는 외국에서 임대료 인상을 규제하고 있는 사례도 발표했다. 그런데 실제로는 우리가 제시한 두 안 가운데 임대료 인상규제는 실현되지 않고 임대기간 연장안 만이 실현되고 말았다.
이렇게 되니까 거꾸로 부작용이 생겨서 전세금 상승분만 오히려 증폭시키는 결과를 낳고 말았다. 당연히 비난이 쏟아 졌고, 집 없는 서민들의 짐을 덜어주려고 했던 우리로서도 무척 곤혹스러움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하지만 그 뒤 몇 해가 흐르면서 전세기간을 2년 연장한 조치가 꽤 정착되어 세입자의 대항력을 높이는데 상당한 역할을 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는데, 그나마 그때의 곤혹스러운 마음을 약간은 달랠 수 있었다.

여하튼 이일은 대안모색작업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극명하게 보여준 사건이다. 아무리 좋은 대안도 종합대책이 아니면 얼마든지 부작용을 낳을 수 있는 것이다.

대안모색 작업의 어려움은 이 뿐만이 아니다. 어떤 경우에는 대안제시 자체가 어려웠다. 예를 들면 종합토지세율을 높여야겠다고 생각했지만 구체적인 통계수치를 알 수 없어 정교한 대안은 만들지 못하고 커다란 방향만 제시할 수밖에 없었다.  

또 구체적인 대안이 없어 침묵을 지켜야 하는 때도 있다.
예를 들면 영종도에 신공항을 세우는 문제를 두고 많은 환경단체들이 공해를 일으키고 생태계를 파괴하고 철새에 지장을 준다는 이유로 반대운동을 폈다. 하지만 경실련은 영종도 신공항건설 반대운동에 참여하지 않았다.
갈수록 늘어나는 항공수요를 감당하기 위해서는 새로운 공항 건설은 피할 수 없는 일인데, 영종도가 아니면 어디에 신공항을 세울 수 있는가에 대한 대안이 없었기 때문이다.
영종도 신공항 건설을 반대하던 사람들은 오산비행장의 미군 기지를 인수받아 그 곳에 공항을 세우면 된다는 대안을 내놓았다. 그런데 우리가 실제로 오산비행장에 가서 조사해본 결과로는 그곳은 공항 활주로를 늘이는 일이 어려울 뿐만 아니라 소음공해로 주변 민가에 엄청난 폐를 끼칠 우려가 있었다. 우리의 판단으로는 오산비행장을 확대한다는 것은 대안이 되지 못했다. 때문에 우리는 환경단체의 입장에 무조건 동조할 수 없었다.

핵발전소 문제에 대해서도 경실련은 침묵을 지켜 왔다. 대부분의 환경단체들이 원자력발전소 건설과 핵폐기물 저장시설 건설을 반대했지만 우리는 핵폐기물 저장소 건설은 불가피하다는 입장을 견지하고 있었다. 저장소를 만들지 않으면 핵폐기물을 그냥 쌓아두는 셈인데, 만약 이게 넘쳐서 더 이상 쌓아둘 수 없는 지경에 이르면 더 큰 문제가 발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어차피 저장소는 만들어야 하므로 지역주민에게 피해가 적고 최대한의 보상이 이뤄지며 안정성이 확보되는 방식이 찾아지지 않으면 안 된다. 다만 경실련이 굴업도의 핵폐기물 저장시설을 반대했던 것은 안정성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원자력 발전소 문제도 원자력 발전소가 문제가 있다는 점은 인정하지만, 전력수요가 하루가 다르게 늘어나는데 무조건 발전소 건설을 반대만 할 수는 없었다. 오히려 중요한 것은 에너지 절약운동과 대체에너지 개발을 통해 전력수요를 줄이는 일이다.

이처럼 합리적인 대안을 모색하다가 아무래도 그것이 찾아지지 않으면 우리는 차라리 침묵을 지켰다. 다른 단체와 연대활동을 하거나 어떤 이슈를 놓고 함께 논의할 때도 주장이 합리적이지 않을 때에는 연대활동에 참여하지 않고 독자적으로 발언하는 길을 택했다. 그 이유는 우리가 그렇게 해야만 공신력을 쌓을 수 있고 정부당국에 대한 영향력도 높일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또 경실련 내부에서 견해가 엇갈릴 때에도 침묵을 지켰다. 주로 노사문제가 터졌을 때 그런 경우가 많았다.

노사문제의 경우 대개 어느 한 편만의 일방적인 잘못이라기보다는 노동자나 기업주나 다같이 약간의 잘못을 하기 마련이어서 이들 사이의 잘잘못을 명확하게 따져서 해결책을 만들기가 쉽지 않았다. 더구나 일단 노사분규가 터지면 어느 편을 드는 일은 정말 어렵다.
또 노사분규가 일어나면 경실련 내부에서도 상대적으로 노동자 편을 드는 학자가 있는가 하면, 다른 한편으로 기업주 편에 서는 학자도 있다. 따라서 합의된 공동의 결론을 만들지 못하는 경우가 많은데, 이럴 때엔 아예 성명을 내지 않고 침묵을 지켰다. 일반인이 볼 때 경실련이 성명을 낼 만도  한데 왜 침묵을 지키는가하고 의아해할 때는 대개 이런 경우였다.
물론 가끔가다가 무리하게 한쪽 편을 들어 부작용을 일으켰던 때도 있었다. 대구경실련이 대구에서 고속전철을 지상화할 것이냐, 지하화할 것이냐를 두고 내부에서 견해가 엇갈렸을 때의 일이다. 대부분의 대구시민들이 지하화를 원했기 때문에 경실련도 지하화를 지지했는데 일부 간부들이 지역이기주의가 아니냐며 상당히 반발을 했다. 일단 이처럼 반발할 때는 침묵했어야 했는데, 그냥 한쪽 편에 서는 바람에 대구경실련에 내분이 생겨 한동안 어려움을 겪었다. 침묵할 줄 아는 용기도 중요하다. 무책임한 열 번의 발언보다 정확한 한 번의 발언이 훨씬 더 중요하다는 인식을 할 필요가 있다.

경실련이 대안 모색운동을 원칙으로 삼고 있었던 까닭에 환경운동을 펴면서 환경운동연합과 입장차이를 보인 적이 여러 번 있었다. 환경운동연합은 대안모색보다는 사람들의 경종을 울리는 데 좀 더 관심이 있었지만 우리는 대안모색의 원칙을 철저히 견지했다.
물론 대안이 없다고 해서 문제제기를 하지 않는 것이 반드시 옳지 않을 수도 있다. 예를 들어 쌍방울에서 덕유산을 스키장으로 만들어 유니버시아드 동계대회를 유치한다고 나섰던 적이 있다. 물론 그렇게 되면 자연공원이 심각하게 파괴된다. 하지만 유니버시아드 동계대회의 한국개최가 결정된 이상 적절한 장소를 찾지 않으면 안 된다. 이럴 때 무조건 반대만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아무도 반대하지 않으면 환경문제에 대한 국민의 의식을 일깨우지 못하게 되므로 또 다른 악영향을 끼치게 된다. 때문에 ‘대안을 모색하자’는 경실련의 운동원칙을 지키면서 동시에 대안이 없더라도 경종이라도 울려야 하는 사회적 필요성을 조화롭게 배합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그 기준은 구체적인 상황 속에서 판단할 도리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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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5. 정의의 반대는 의리

내가 경실련을 시작할 때 갖고 있었던 원칙 중 하나는 ‘경실련을 찾아와서 도움을 요청하는 사람을 절대로 빈손으로 돌려보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경실련의 문턱을 낮추어 누구든지 나를 만날 수 있고 경실련에 와서 도움을 청할 수 있게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물론 이렇게 생각하다 보면 작은 요청이나 방문객 때문에 많은 시간을 빼앗기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한 번은 어느 운전기사가 너무 억울한 일을 당했다며 호소해서 그것을 해결하느라 며칠간을 동분서주했던 적도 있다.

이러다 보니 경실련에는 자신의 어려움이나 문제거리를 해결해달라고 찾아오는 시민들의 발걸음이 끊이지 않았다. 석촌호수 노점상들에서부터 서초동 꽃동네 주민, 남태령 고개에 있는 도시빈민, 약사, 한의사, 군인, 외국인 노동자에 이르기까지 어느 직업, 어느 지위의 사람에 관계없이 경실련 문을 두드렸다.

그런데 경실련에는 또 하나 중요한 원칙이 있었다.
누구나 경실련에 와서 도움을 청할 수 있지만, 경실련이 구체적인 입장을 정할 때에는 반드시 사전에 충분한 조사연구를 한다는 점이다. 신문에 난 자료나 통계도 반드시 확인과정을 거쳤다. 신문에 나는 정보 가운데는 확정되지 않은 ‘설’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느 기관이나 기업에 대한 비판성명을 내기 전에 반드시 반론권을 주어 사전에 사실여부를 철저하게 확인토록 했다.

그런데 이런 원칙을 지키기가 어려운 때도 있었다. 포항제철 사건의 경우가 그러했다. 공선협 활동을 하고 있던 어느 날 울산에서 포항제철 노동자 세 사람이 올라와 포항제철이 당시 민자당 후보 선거운동을 하고 있다고 고발했다. 자신의 직장을 포기하는 한이 있더라도 양심선언을 하겠다고 우리를 찾아온 것이다. 나는 그 분들의 방문을 받고 상당히 낙담했다. 그 이유는 포항제철이 그 당시 잡지 ‘경제정의’에 광고를 실어준다든지 하는 방식으로 경실련에 지속적인 재정지원을 해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 당시 박태준 회장은 경제정의에 대한 의식이 상당히 높은 분이었다. 내가 직접 만나서 그분의 생각을 확인한 적도 있었는데 그분은 일반인에게 알려진 것과 달리 경제정의에 대한 인식이 상당히 높았고 경실련운동에 대해서도 지지를 보내주셨다.
그런데 이런 포항제철을 공격하는 양심선언을 하겠다니 나로서는 당황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그들의 말을 들어보니까 그들의 말이 거짓말 같지 않았다. 보통의 경우에는 이럴 때 당사자인 포철에 전화를 걸어 사실여부를 확인하고 그들의 반론도 들어본 뒤 결정한다. 하지만 이런 경우에는  당사자 확인을 할 수 없는 것이다. 확인하고 나면 포철은 무슨 수를 써서든지 언론에 이것을 막으려고 애를 쓸 것이고 그 과정에서 이들 포철 노동자들의 좋은 뜻이 꺾이게 되면 큰일이기 때문이다. 이 상황에서 경실련이 포철에 사실확인을 하면 노동자들은 알고 보니 경실련은 회사편이로구나 하고 실망할 것이다. 나는 고심 끝에 이들에게 기자회견 기회를 주어 양심선언을 할 수 있게 해 주었다.  

이런 결정을 내리고 나서 마음이 너무 무거웠다. 포철이 보기엔 내가 정말로 의리 없는 사람으로 비칠 것이기 때문이다. 그분들의 입장에서는 ‘우리가 경실련을 그렇게 도와주었는데, 이럴 수가 있느냐’하고 항변할 것이  틀림없다.
다른 한편으로 이제 포철의 재정지원은 이제 끊기겠구나 하고 생각하니 걱정도 컸다. 그래서 그 사람들에게 ‘당신네들이 나를 곤경 속으로 몰아넣고 있다’고 개탄하는 말을 했다. 나는 참으로 정의를 지키기가 어렵다는 생각을 했다. 옛날에는 감옥 갈 용기만 있으면 정의의 편에 설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은 의리를 저버릴 수 있는 용기가 있지 않으면 정의를 지킬 수 없는 시대가 되었다.  

나는 기자회견을 열어 이들이 포철이 선거개입한 사례를 공표하도록 했는데, 잠시 뒤 공선협 사무실이 발칵 뒤집혔다.
포철 사람이 달려와 자신들은 선거에 개입한 일이 없는데, 무슨 소리냐며 강력하게 항의를 했지만 이미 포항제철과 민자당은 큰 타격을 입었다. 그 노동자들이 명명백백하게 선거개입을 증언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선거가 다 끝난 후에 포철의 이대공 부사장께서 이번의 양심선언이 허화평 후보 측의 음모에 의한 것이고 실제로 양심선언을 했던 세 사람 가운데 한 사람이 양심의 가책을 이기지 못하고 ‘모든 것은 자신들이 거짓으로 꾸며낸 일’이라고 털어놓았다는 것이다. 허화평 후보 진영에서 돈을 주고 이들을 꼬여 거짓말을 하게 한 것이다.

포철 측은 우리에게 그 노동자의 고백을 통해 허 후보 진영에서 이들을 어떻게 회유하고 작전을 짰으며, 그 전날 어느 호텔에서 잠을 자고 무슨 의논을 한 뒤 경실련에 찾아오게 했는지에 관한 증거물을 모두 보여주었다.
나는 그것을 보면서 굉장히 충격을 받았다. 내가 너무 순진했구나 하는 후회도 했다.
그 사람들이 찾아 왔을 때 진실을 차분하게 규명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기에 앞서 ‘내가 정의롭게 행동하려면 어떤 결단을 내려야 하는갗하는 실존적인 고민에 너무 빠진 나머지 진실을 규명하려는 노력을 소홀히 했다는 반성을 했다. 만약 치밀하게 조사했다면 아마도 무언가 석연치 않은 점을 발견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 뒤 허 후보 측의 고소로 포철의 선거법 위반 사실 여부를 가리기 위한 재판이 열렸는데, 나는 포철 관계자들에게 ‘만약 재판 과정에서 포철이 잘못이 없다는 점이 명백하게 드러난다면 우리의 실수를 공개적으로 인정하겠다’고 얘기했다.
재판 결과 허 후보 측의 공작사실이 다 드러나 포철은 결국 경주지청에서 무혐의 판정을 받았다.

재판 결과를 듣고 나는 이 사실을 공명선거실천시민운동협의회(공선협) 실행위원회에 보고한 뒤 공선협이 이에 대해 공개적으로 사과하자는 의견을 말했다. 다른 위원들도 모두 동의해 결국 우리의 잘못을 공개적으로 사과하는 서신을 포철에 보냈다.
당시 시사저널이 이 사실을 알고 ‘자신의 잘못을 공개적으로 사과할 줄 아는 용기 있는 시민운동’이라며 우리를 거꾸로 칭찬하는 기사를 싣기도 했다.
당시 포항시민들과 포철의 사이가 좋지 않았기 때문에 포항의 시민단체들은 우리의 행동에 대해 납득하지 못하겠다는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 그 뒤 내가 포항에 내려가자 시민들이 이 사실에 대해 해명해달라는 요청을 해서 상세하게 해명을 해주기도 했다.
한참 지난 뒤 허 후보 측에 매수되었다는 사실을 처음 폭로한 사람 이외에 다른 사람도 ‘자신이 했던 기자회견은 완전히 날조된 것이었다. 너무 괴롭다’는 내용의 편지를 내게 보내기도 했다.
우리는 그 때 ‘어려운 처지에 빠진 사람의 요청을 거절하지 않고 정의롭게 대처한다’는 경실련이 갖고 있는 좋은 뜻을 허 후보 측이 자신들의 선거전략에 교묘하게 이용한 사실에 매우 분개했고 이런 방식으로 국회의원이 된 것에 대해 개탄을 금치 못했다.

우리는 이러한 경험을 94년 2월 제4차 회원 총회에서 발표한 ‘경실련 회원의 다짐’이라는 글에 담았다. 이 다짐에는 이런 대목이 있다.
“제 아무리 옳은 주장을 해도 인간의 부족 때문에 얼마든지 잘못을 저지를 수 있습니다. 그러나 잘못을 깨달았을 때가 더 중요합니다. 정직하게 잘못을 인정할 수 있는 용기가 오히려 우리의 공신력을 높여 줍니다”

경실련 사무총장 시절에 나는 정의를 지키기 위해 의리를 저버린 경우가 무척 많았다. 예를 들면 페놀사건이 터졌을 때 두산그룹은 경실련에서 발간하던 잡지인 ‘경제정의’에 꼬박꼬박 광고를 주고 있었다. 그런데 두산의 페놀사건이 터진 것이다. 우리는 당연히 두산과 싸움을 시작했고 우리가 먼저 두산의 광고를 거절했다. 두산 쪽에서는 광고를 계속 주겠다고 했지만, 우리 측에서 ‘이 사건이 끝난 뒤 다시 광고를 주면 받겠습니다’고 정중하게 거절했고, 실제로 페놀사태가 마무리되고 한참 지난 뒤에야 다시 광고를 받기 시작했다.

삼성 이건희 회장의 집 문제가 터졌을 때도 마찬가지다. 그때에도 이회장의 집에 얽힌 비리가 경실련이 발간하던 주간 ‘시민의 신문’에 제보로 들어왔는데, 삼성은 그 당시 우리에게 꾸준히 광고를 주고 있었을 뿐 아니라 프로젝트도 함께 하고 있던 재벌이었다. 하지만 시민의 신문으로서는 그 제보의 내용이 거짓이 아닌 이상 그것을 보도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런데 제보가 들어왔다는 사실을 알고 삼성에서는 우리에게 ‘보도를 하지 말아 달라’고 집요하게 호소했다. 주로 그 동안 경실련을 가까이에서 도왔던 분들이 그런 역할을 담당했다.
이런 상황이 벌어지면 참으로 괴롭지 않을 수가 없다. 그분을 생각하면 당연히 그분의 말을 들어야 하지만 그렇게 되면 제보자는 경실련도 결국은 별 수 없구나 하는 생각을 할 것이다. 무엇보다 사무총장인 나로서는 도저히 실무자에게 “봐주라”는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물론 내가 ‘그 보도는 빼거나 줄이자’라고 하면 실무자들이 내 뜻에 따르겠지만, 그런 내 모습을 보면서 실무자는 나는 물론이고 경실련에 대해서도 실망을 하게 될 것이 뻔하다. 게다가 나는 실무자교육을 할 때마다 “경실련은 어떤 경우에도 로비가 통하지 않는 마지막 단체로 남아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지 않았던가.

때문에 나는 경실련 사무총장을 하면서 이런 일이 있을 때 외부의 압력이나 재정적인 관계 때문에 실무자에게 간섭을 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오히려  그 내용을 보도한 다음 거꾸로 회사에 찾아가 “우리가 그럴 수밖에 없었던 것이 참 죄송합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던 저희 사정을 이해해주십시오”라고 말했다.

사실 대기업은 ‘보험금을 낸다’는 생각으로 홍보비를 쓰고 있기 때문에 설사 경실련이 자기 회사에 불리한 행동을 했다고 하더라고 당장에 홍보비를 줄이지는 않는다. 또 로비를 하려고 돈 보따리를 짊어지고 오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 재정적인 부담 때문에 로비를 뿌리치기가 힘든 것이 아니라 인간관계, 즉 ‘의리’를 내세운 로비를 뿌리치기가 힘들다.
실제로 한화그룹 김승연 회장의 LA 땅투기 사건의 예가 그랬다. 한화그룹은 그전까지 경실련에 재정지원을 했던 적이 없었다.

하지만 경실련의 부정부패추방운동본부가 이 재산 도피건을 검찰에 고발하려 하자 한화그룹에서는 내 주변의 가까운 사람들을 총동원해서 이를 막으려고 노력했다.
실제로 그 당시 경실련 어른을 비롯해 내가 그 부탁을 거절하기 어려운 분들이 총동원되어 내게 ‘고발하지 말아 달라’는 간청을 했다.
하지만 경실련은 결국 김 회장의 해외부동산투기를 검찰에 고발했고 이 를 계기로 침묵하고 있던 각 언론에서 이 기사를 크게 다루기 시작해 결국 김승연 회장의 구속으로 이어지게 되었다.
그때 나와 신대균 사무처장은 이를 고발할 것인가 말 것인가를 두고 고민을 많이 했는데, 그런 내 모습을 실무자들이 숨죽이면서 지켜봤다. 아마도 그때 김 회장을 고발하지 않았다면 우리 실무자들은 굉장히 실망했을 것이다. 실무자들 가운데에는 ‘내가 박봉에 시달리면서 밤 12시까지 왜 일해야 하는갗 하는 회의를 품는 사람이 반드시 나왔을 것이다.  
하지만 로비를 뿌리치고 김 회장을 고발한 경실련 지도부의 행동을 보고 실무자들은 안도의 숨을 쉬었고 실제로 나는 그들의 얼굴에서 자긍심이 피어나는 것을 볼 수 있었다.
말하자면 ‘로비가 통하지 않는 마지막 단체, 짠 맛을 잃지 않는 실무자들’, 이런 것들이 경실련을 신뢰받는 단체로 만들어준 것이다.

그러나 개인적으로는 고통스럽기 그지없었다. 참 인간적으로 몹쓸 짓이라는 생각도 많이 했다. 김승연 회장에 대해서도 그때 꼭 면회를 가려고 했으나 그러지 못한 채로 그분이 석방되었다. 그리고 그분이 아주 훌륭하게 수감생활을 보내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찾아온 사람을 빈손으로 돌려보내지 않는 따뜻한 마음’, ‘경실련에 불이익이 생길 우려가 있어도 정의를 말할 줄 아는 용기’, ‘한 편의 의견에 치우치지 않고 갈등하는 양쪽의 의견을 듣고 치밀하게 조사해서 결론을 구하는 불편부당한 태도’ ‘로비가 통하지 않는 마지막 단체’
경실련은 이런 원칙을 지키려고 최선을 다했다.
그러나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본의 아니게 잘못을 저질렀을 때는 과감하게 우리의 잘못을 인정하고 사과했다. 그리고 이것이 경실련을 신뢰할 수 있는 단체로 만들어 준 힘이었다고 나는 지금도 믿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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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 김일성 조문파동과 취소성명

북한의 김일성 주석이 사망하고 우리사회에 이른 바 조문파동이 일어났을 때 경실련 안에서도 ‘조문파동에 어떻게 대처할 것인갗를 둘러싸고 논란이 컸었다.
나는 그 때 “침묵을 지키자. 가능하면 이 문제에 대해서는 발언하지 말자”는 입장을 갖고 있었다. 하지만 ‘조문찬성 입장을 발표해야 한다’는 주장도 만만찮았다. 그래서 결국 우리는 논란 끝에 다음과 같은 전제조건을 단 뒤 조문 찬성입장을 밝히기로 했다.

우리는 김일성을 도저히 용서할 수 없다. 6.25를 일으킨 장본인이고 KAL기 폭파 사건 등으로 많은 사람의 목숨을 앗아간 만행을 용서할 수 없다. 하지만 민족의 장래와 화해와 통일을 생각할 때 조의를 표하는 것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다만 남한에서 조문행사나 추모행사를 갖는 것, 북한에 조문단을 파견하는 일은 바람직하지 못하다. 다만 정부차원에서 조의를 표하는 것은 필요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결국 우리는 이런 조건을 붙여 ‘조문찬성’ 성명서를 냈다.
그런데 언론이 전제조건을 담은 앞부분은 거두절미해버리고 ‘경실련이 북한에 조의를 표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성명서를 발표했다는 사실만 보도해 버렸다. 게다가 어느 일간지는 경실련에서 발표한 성명을 실은 기사 바로 앞부분에 한총련에서 조문상을 차려 놓고 학생들의 조문을 받는 사진과 기사까지 큼지막하게 실었다.

그러자 경실련 사무실이 순식간에 난리법석이 됐다. 항의전화가 쇄도했다. 모 신문은 아예 ‘경실련이 조문단 파견을 지지하다니’라는 제목의 사설까지 실었다. 물론 우리가 곧바로 신문사에 항의해 정정보도가 나갔지만, 이미 수십만 명의 사람이 사설을 읽은 뒤였다.
상황이 그렇게 되자 공동대표 세분께서 ‘성명서를 취소하는 것이 좋겠다’고 말씀하셨고, 결국 논란 끝에 조건부로 냈던 성명서를 취소하고 공개적으로 취소성명을 다시 냈다.
그동안 경실련은 내부 의견이 엇갈릴 때에는 대체로 침묵하는 방법을 택했었다. 그런데 ‘조건부 조문찬성 성명서’의 경우 의견의 완전한 일치가 없이 공식적인 의견을 밝혔다가 여론의 집중 포화를 맞고 취소 성명까지 내게 된 것이다.

취소성명을 내고 나자 또 다른 한편에서는 ‘취소한 것이 잘못 되었다. 그냥 그대로 밀고 나갔어야 했다’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했다.
하지만 나는 ‘취소성명을 내기를 잘했다’고 생각했는데, 그 이유는 ‘우리가 잘못했다고 생각할 때 그 잘못을 인정하고 고치는 게 옳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나는 ‘조문성명 취소파동’을 겪으며 여론이 둘로 나뉘어져 있을 때 객관적인 입장에 서서 정론(正論)을 펼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갗를 새삼 절감했다.
그런데 조문파동이 한창일 때 일부에서 ‘아무에게도 득(得)이 되지 않는 무익한 조문파동을 빨리 집어치워라’는 주장을 했다. 내가 보기엔 이 주장이 설득력이 있었다. 그것을 보면서 나는 ‘그 당시 우리가 만약 무익한 조문논쟁을 빨리 집어치워라’고 성명을 냈다면 훨씬 공감을 받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한편으로 경실련이 여론의 표적이 되자 그 순간 경실련의 힘이 약화되었다. 그 당시 경실련은 지하철노조원에 대한 처벌강도를 약화시키기 위해 정부와 열심히 교섭을 벌이고 있었는데, 정부가 우리의 말을 들어주지 않았다. 경실련의 힘이 약해져버린 것이다.
그런 일을 겪으면서 나는 한 가지 중요한 점을 깨달았다.  
‘앞으로 경실련이 어떤 문제에 대해서 발언할 때엔 수위를 정확하게 조절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구나. 어느 정도까지 발언을 하면 힘을 가질 수 있지만, 거기에서 한 발짝만 더 나가면 힘이 약해지는구나’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다.

예컨대 좀 더 진보적이고 과격한 주장은 얼핏 듣기엔 힘이 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현실적인 힘을 갖지 못한다. 오히려 국민적인 합의를 정확하게 파악해서 가장 정확한 발언을 할 때, 가장 큰 힘을 발휘할 수 있고 실질적으로 상황을 변화시킬 수 있다.
이점은 시민운동의 과정에서 매우 중요한 깨달음이었고, 그 다음부터 어떤 민감한 사안이 생겼을 때 ‘과연 국민의 합의가 어디에 있는갗를 우선적으로 생각하게 해주는 값진 교훈이 되었다.

물론 어떤 경우엔 국민적 합의는 없지만 과감하게 행동하는 것이 필요한 때도 있다. 예를 들면 이인모 노인 북송문제는 처음부터 국민적 합의가 있는 사안은 아니었다. 한완상 박사가 통일원장관이었지만 혼자 힘으로 이인모 노인을 북한으로 송환할 수는 없었다. 그때 나는 ‘이인모 노인을 북의 가족에게로 보내주자’는 서명운동을 준비했고, 여기에 변형윤, 강문규, 이세중, 강원룡 등 어른들이 동참해주셨다. 이런 움직임 때문에 국민적 합의가 서서히 ‘이 노인을 가족의 품에 돌려보내는 것이 좋지 않겠냐’는 방향으로 움직였고, 이에 따라 한완상 통일원장관도 이 노인의 북한송환을 힘있게 추진할 수 있었다. 말하자면 이 경우는 공신력 있는 단체와 존경받는 원로들이 거꾸로 국민적 합의를 거꾸로 만들어냈다고 볼 수 있다.
특히 이처럼 좌우이념 논쟁을 일으킬 수 있는 민감한 사안에 관해 국민적 합의를 만들어내는 경우 사회적으로 보수적인 이미지를 갖고 있는 사람들의 동참이 문제해결을 한결 수월하게 해준다. 게다가 운동권의 시위보다는 시민들이 벌이는 시위가 정부에게 훨씬 큰 압력으로 작용한다.


실제로 우리는 정부에 대한 규탄시위를 할 때 어떻게 하면 ‘우리가 운동권이 아니라 보통시민들이라는 사실을 보여줄 수 있을까’를 고민했다. 그리고 그런 노력들이 많은 시민들과 언론의 주목을 받았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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