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농장에서
정작 장인장모를 떠나보내려고 하니 시름이 놓이지 않았다. 곁에 모시고 하나하나 체크해 주어도 모를 판인데 외딴 시골에 보낸다고 생각하니 걱정이 태산 같았다. 숙소에 돌아와 보니 장인장모가 한참 짐을 싸고 있었다. 준비가 완료되자 장인은 출발시간이 아직 2시간 전인데도 짐을 들고 흔연히 뛰쳐나간다. 이 며칠을 얼마나 지겹게 보냈으면 저려라 싶었다. 말렸다가는 화를 면치 못할 것 같았다. 결국 장인장모는 하루 만 더 기다리면 외국인등록증을 찾을 수 있고 외국인등록증이 있으면 본인 명의로 핸드폰을 개통할 수 있건만 달랑 공중전화카드 한 장 넣고 길을 떠났다.
직업소개소장이 차로 곤지암에 있는 농장까지 실어다 준단다. 결국 추가된 소개비는 운임으로 생각하기로 하였다. 카니발승용차에 짐을 싣고 차에 올라타려고 하니 직업소개소장이 도중에 누가 탈지 모른다면서 내가 합승하는 것을 거절했다. 내가 어찌 어르신들만 보낼 수 있느냐고 반문하니 도착해서 그 쪽 사장과 통화를 시켜주겠단다. 결국 나는 다른 날 방문가기로 하고 차에서 내리는 수밖에 없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열악한 환경이라 내가 농장을 둘러보고 나서 어르신들을 내 놓지 않을까 지레 겁먹은 것이었다.
그날 저녁 농장주의 핸드폰으로 장모가 전화를 걸어왔다. “사위, 여긴 깊은 산골짜긴데 집이라곤 우사건물뿐이요. 전화도 없고 다른 사람이란 출퇴근하는 사장뿐이오.” 그렇게 말하는 장모의 목소리가 측은하게 들려왔다. 사위를 바라고 한국에 온 것은 아니지만 한국에 사위가 있다는 것이 끗발이 없다보니 도움이 되지 못했다.
다행이 TV는 있단다. 한국이 여러 가지로 납득이 가지 않아도 한국드라마는 인정해 주는 어르신들이다. 중국에 있을 때도 불법으로 무궁화위성접수기를 설치해 놓고 한국드라마만 보았다. 그러다가도 단속반이 들이 닥쳐 아파트외벽에 설치한 안테나를 뜯어 가면 장인장모는 단속이 풀릴 때까지 안절부절 못하고 괜히 화만 내곤 하였다. 단속이 풀리고 새 안테나를 사서 설치해주면 애들처럼 좋아하던 어르신들이다. 70년대는 이불을 뒤집어쓰고 고국방송을 들어야 했다면 요즘 같은 세월에는 토를 달지 말아야 하건만 고국방송은 ‘境外방송’이라고 안테나와 위성접수기가 압수대상이다. 장인장모는 한국에 와서 희한한 것 중 하나가 한국TV가 편해진 것이다. 집에서 한국TV를 볼라치면 이걸 켜고 저걸 끄고 저걸 따고 이걸 꽂는 번거로움이 있었고 가끔 신호도 불안정하여 중요한 대목을 놓치는 일이 허다했지만 한국은 한번에 OK고 신호불량이란 없으며 숙소의 TV는 HDTV다. TV를 보며 즐거워하는 노인들의 모습이 우습기도 하고 보기도 좋았다.
나는 장인장모가 걱정되어 자주 안부전화라도 하고 싶었지만 농장주한테 전화를 거는 일이라 그럴 수가 없었다. 겨우 이틀을 기다려 전화를 넣으니 농장주가 장인을 바꿔준다,
“나는 괜찮은데 자네 장모가 걱정이요. 젖소 젖만 짠다던 것이 별의별 일을 다 시키오.”
전화기는 곧바로 장모한테로 넘어갔다. “사위요? 난 사위가 한국에 오래 있은 게 끔찍하오. 우리 집에선 사위만 와서 이런 고생을 했지 뭐요. 우리가 와 보지 않았으면 사위가 한국에서 고생한 걸 어찌 알았겠소.”
장모는 여러 가지로 불편하면서도 사위걱정을 먼저 하신다. 그리고는 며칠 더 해보겠으니 걱정 말란다.
“아닙니다. 장모님, 일이 고되면 무조건 포기하십시오. 체질에 맞아야 하는 겁니다. 아무 때도 전화만 하면 차를 갖고 모시러 가겠습니다.”
장모는 망설이고 있었다. 힘에 부치고 기대치에 못 미치는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내가 포기시키는 것은 순서가 아니다. 일하지 않던 사람들이라 한국노동생활을 하려면 적응기가 필요하다. 그러니 본인들이 알아서 판단을 내려야 한다.
다시 며칠이 지난 어느 날 장인으로부터 갑자기 전화가 왔다. 마침 골짜기를 지나는 사람이 있어서 사정하고 전화를 빌렸단다. 농장주가 곁에 없으니 장인은 시름놓고 그동안 있었던 일을 하소연한다. 농망기에만 농사일을 거들어준다던 것이 농사일이 기본이고 소사양은 아침저녁으로 잠깐씩 하는 정도란다. 거기다 농장주의 입에서 튕겨 나오는 것은 온통 욕지거리란다. 내가 모시러 가겠다고 하니 장인은 내일 농장주와 터놓고 말해 보겠단다. 그러고 나서 거처를 정하겠다는 것이다.
다시 이틀이 지나니 더는 기다릴 수 없었다. 나는 하던 일을 팽개치고 곤지암으로 떠날 준비를 했다. 그런데 농장주한테 전화를 넣으니 장인장모가 이미 전날 저녁 떠났다는 것이다. 직업소개소에서 다른 일자리를 소개시켜주었다는 것이다. 농장주한테 장인장모가 떠난 이유를 물으니 장인의 시력이 나빠서란다. 한국인들은 가끔씩 이런 깜찍한 죄목을 잘 만든다. 그럼 근시안경을 건 사람은 농사일을 못한다는 말이 된다. 근시안경을 건 사람은 소를 치지 못한다는 말이 된다. 근시안경을 건 사람은 일하지도 말고 밥도 먹지 말라는 말이 된다.
“이봐요. 한번 만납시다.”
나는 화가 욱 치밀어 온 몸의 피가 거꾸로 솟았다. 농장주는 묵묵히 듣고만 있었다. 나는 노인들을 괴롭히는 것은 못 본다. 그 때문에 장인장모의 한국행이 더 부담스러웠던 것이다. 나는 농장주를 만나 한판 붙어볼 생각이었다. 누가 욕지거리를 더 잘 하나 보여주고 싶었다. 조선족의 욕지거리는 한국에서 워낙 유명하여 사정을 아는 한국인들은 두 손을 버쩍 든다. (계속)
2007년8월3일 영등포에서/조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