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미결(未決)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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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미결(未決)
  • 동북아신문 기자
  • 승인 2007.08.0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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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길우의 수필 61>

 

申吉雨 문학박사, 수필가, 국어학자

 연변대 초빙교수 역임

 서울 서초문인협회 회장

 남한강문학회 회장

 국제펜클럽 이사

skc663@hanmail.net

 

 


  시골 언덕 위의 한여름철 원두막은 언제 보아도 시원한 느낌이 든다. 더구나, 네 개의 짚 들창까지 활짝 열어 놓은 것은 공중을 날렵하게 나는 새들처럼 더욱 상쾌감을 느끼게 한다. 어쩌다가 여행이라도 떠나 이름 모르는 언덕에 서 있는 원두막을 보게 되면, 멀리 떠나보낸 누님을 갑자기 만나 보게 된 듯한 정감마저 들기도 한다.

 

  실제로 원두막 위에 올라 보라. 그 시원함이란 바닷물 속에 뛰어드는 것에 비할 바가 아니다. 그것이 비록 통나무 기둥에 나뭇가지와 밀짚으로 얼기설기 얽어 놓은 하찮은 것이지만, 그 위에 돗자리를 펴고 목침을 베고 눕는 기분이란 그 어느 것에도 비할 수 없는 상쾌감이 있다. 항상 바로만 보던 자연물을 거꾸로 느껴보는 것도 색다른 것이지마는, 푸른 하늘을 거침없이 흘러가는 하얀 조각구름들을 바라볼 때면 안자(顔子)의 안빈낙도(安貧樂道)가 저절로 일기도 한다. 더구나, 옆에 잘 익은 수박 참외가 양동이 찬 물 속에 담겨져 있다면 더 한층 흐뭇한 흥취를 자아내게 할 것이다. 그래서, 여름이면 나는 가끔 시골집을 찾곤 한다.

  

  어느 늦은 여름날 점심 때, 나는 고추장 비빔밥을 포식하고서는 전처럼 그 철늦은 원두막에 올라가 보았다. 그리고는 언제나처럼 짚방석 한 쪽을 펴고 번듯이 드러누웠다. 초가을 바람이 불어와 여름철에 맛보던 것과는 한껏 더 상쾌한 기분이 들었다. 시골 바람은 콘크리트 포도 위에서 불어오는 도시의 바람과는 달리 언제나 나뭇잎 끝에서부터 불기 때문에 시원하지마는, 아마 초가을이라서 더 한층 그런가 보다. 흰 구름이 몇 점씩 흘러가는 게 아직도 원두막의 풍취는 가시지 않고 흘러 나왔다.

  한데 순간, 내 눈앞을 딱 가로막는 것이 있었다. 거미줄. 마치 그물처럼 생긴 것이 높은 감나무 가지에서 이제 제법 밤이 열리기 시작하는 자그마한 옆의 밤나무 가지로 뻗쳐져 있었다. 그리고, 그 수많은 다각형의 중앙에는 커다란 거미 한 마리가 거꾸로 매달려 있었다.


  거미의 생리는 퍽이나 애상적이다. 이 지구상의 모든 동물들이 저마다 집이라고 꾸려 놓고서 사는데, 이 녀석만은 그렇지가 않다. 탁 트인 공간의 나뭇가지 사이거나, 무엇이나 잘 나다닐 수풀 꼭대기, 아니면 처마 끝이라든지, 하다못해 방안이라도 맨 위의 구석에 줄을 늘이곤 한다. 그리고, 그 입체감이란 조금도 없는 포식망(捕食網) 중앙에 매달려 그곳을 집처럼 알고 살아가는 것이다. 아마 거미는 집이 자기 자신을 다른 동물이나 외적 조건에서 보호하여 준다는 존재가치도 모르는 놈인가 보다.

  그러나, 거미는 언제까지나 기다리고 참아 나가는 장점을 가지고 있다. 허공에 늘인 실 같은 줄 위에 이른봄부터 늦은 가을까지 꼬박 매달려 있다. 뜨거운 햇볕이 마구 내리쬐는 삼복더위 속에서나, 찬바람이 불어 아침저녁으로 내리는 서릿발 같은 이슬을 함빡 받는 가을철에도, 거미는 운수가 나쁘거나 서툰 먹이가 걸려 들 것이라는 희망과 기대를 품은 채 매달려 있는 것이다.

 

  아마, 이러한 거미의 생리는 ‘한 3년은 굶어도 남의 것은 먹지 않는다.’는 돌아가신 할머니의 이야기처럼 굶주림을 극복하여 나가는 그것 자체에 가치가 있는지도 모른다. 물론, 거미는 남의 먹이를 도둑질하여 먹을 수도 없다. 자기가 친 그물에서 떠나 다른 놈이 쳐 놓은 곳까지 간다는 것은 자기 스스로가 새로운 그물을 펼쳐놓는 것보다도 훨씬 더 어려운 것이다. 물론 서로 인접해서 친 것도 있기는 하지만, 지금까지 나는 그들이 한 그물에 두 놈씩 앉아 있는 것은 본 일이 없다. 어쩌면 그들은 할머니의 말씀처럼 한 3년은 기다려야 걸려드는 먹이를 위해서 하나의 그물을 둘씩이나 망보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를 알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들은 먹기 위해서 살고 있는 대부분의 동물들의 생활에 환멸을 느끼고, 그렇다고 자기에게 부여된 생명을 거역할 수도 없고, 그래서 이 무한한 공간의 지극히 작은 일부에, 그리고 그것마저도 너무 조그마한 것은 불쌍하다는 듯이 띄엄띄엄 줄을 늘이고는 잘못 걸려드는 놈들만을 먹이로 삼기로 마음먹었는지도 모른다. 더욱이 자기가 쳐 놓은 그 최소한의 활동 범위 내에서도 주위를 돌아다닌다는 것은 결국 자기도 먹기 위해서 산다는 많은 생물의 생리와 같아질까 봐, 스스로 먹이가 잘못 걸려들 때까지 한 지점에서 언제까지나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렇게 생각하면, 가장 신성한 동물 중의 하나인 봉황(이것은 하나의 상상적인 새이지만)이 천년만큼 취하는 먹이로써, 오동나무 열매와 이 결백한 거미를 삼고 있다는 이야기도 수긍이 간다.

 

  하지만, 가만히 거미의 생활을 살펴보라. 얼마나 질식할 만큼 단조로운 생활이고, 또 얼마만큼 슬픈 운명을 타고 난 생물이냐? 그 최소한의 생활 범위마저도 장난꾸러기 아이들이 잠자리채를 만든다고 훑어가 버리고, 때로는 바람에 부러지는 나뭇가지가 파괴하기도 한다.

 

  그러나, 거미는 결코 실망하지 않는다. 이대로 내려가면 어디엔가 닿으리라는 한 가닥의 희망을 안고 장장 수백 길의 외줄을 타고 허공중에 거꾸로 매달리는 거미이다. 그야말로 천척만장(千尺萬丈)의 대모험을 감행하는 동물이다. 그만큼 거미는 자기의 슬픈 운명을 체념할 만치 강한 인내력을 가지고 산다. 이러한 것을 생각하면 ‘시지프스’의 이야기는 차라리 의욕적이라 할 수 있겠다.

  

“찌―――”

  갑자기 매미 한 마리가 길게 울면서 달아난다. 아마, 꼬마 녀석이 건드렸나 보다. 지금까지 거미에게 쏠리었던 정신이 이놈에게로 옮겨갔다.

  그런데, 가다 말고 곡선을 그으며 되돌아온다. 아마 옆에 서 있는 감나무가 구세주처럼 띄었나 보다.

 

  헌데, 이게 웬일인가? 그만 거미줄에 걸리고 말았다. 거미줄이 한번 크게 흔들렸다. 그러자, 죽은 듯이 꼼짝도 않던 거미가 번갯불처럼 달려들었다. 그러고서는 금새 하이얀 줄을 꽁무니로부터 무한히 빼내어 매미가 온통 하얗도록 감는 것이었다.

  매미는 죽을힘을 다 하여 달아나려고 푸드덕거린다. 그러나, 거미의 끈질긴 노력으로 점점 더 하이얘져 갔다. 그야말로 거미가 죽느냐 매미가 죽느냐 하는 치열한 싸움이 전개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나는 어떻게 해야 할까? 달려가 매미를 풀어놓는다면? 그러면 자기의 죽음을 스스로 체념하고 있을 매미의 생명은 건져지는 셈이다. 그런 반면에, 거미는 이제까지 온갖 고난을 겪어온 기다림이 헛수고가 되고, 또 언제에야 먹이가 걸려들지 모른다는 것을 생각해 보면 그대로 굶어죽고 말지도 모른다. 결국, 내버려두어도 하나의 생명은 없어지고, 그렇다고 매미를 풀어 주어도 하나의 생명은 죽어갈 것이다. 어떻게 하든지 하나의 생명이 죽어간다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사실로 나타날 것이다.

 

  그러면, 결론적으로 나는 이대로 한 생명이 다른 한 생명에 의해 죽어지도록 내버려두어야만 할까? 아니다. 이대로 죽어가고 있는 생물을 번듯이 드러누워서 태평스러이 바라보고만 있을 수는 도저히 없다. 아무리 먹이를 위해서 온갖 고초를 다 겪어 오고, 이때를 위하여 기나긴 기다림을 해야만 했던 하나의 생물이라 하더라도, 막상 그것이 팔팔 뛰는 생물을 먹이로써 죽이고 있음을 그대로 관망하고만 있을 수는 없다.

 

  나는 벌떡 일어섰다. 그리고, 다시 한 번 생각하여 보았다. 결국 이것은 어느 것이 더 가치 있는 생명이냐를 논할 것은 못 된다. 어디까지나 다 같이 귀중한 생명을 가지고 있는 생물인 것이다. 나는 발을 떼어놓으려다 말고 그 자리에 멈추어 섰다.

 

  문득, 초등학교도 채 다니기 전인 어린 시절에 매미를 잡던 일이 생각났다. 과수원 배나무마다 뛰어 다니다가 결국 한 마리도 잡지 못하고 쓸쓸히 돌아오는 길이었다. 문득 거미줄에 걸려 푸드덕거리고 있는 매미를 발견하였다. 무척 기뻤다. 달려가 곧 그것을 잡아냈다. 마침 그 때에 밭에서 돌아오시던 할머니께서 보시고는 못쓴다고 날려 보내라고 하셨다. 나는 모처럼 얻은 매미라서 무척 아쉬워하였다. 그러면서도, ‘거미줄에 걸린 것은 건드리지도 않는 것’이라는 할머니의 말씀을 듣고는, 공중을 향해 팽개치듯 던져 버리고 말없이 돌아와 버렸었다. 그런 뒤로는 죽 거미줄에 걸린 곤충에 대한 금기 사상이 계속 내 마음 속에 자리잡게 되었다. 그러나, 이제 와서 그것이 그럴 필요가 없다고 해서, 거미의 슬픈 생리를 보호하는 전환된 표현이었다는 의미를 잊을 수는 없는 것이다.

  하지만 문제는, 그런 의미를 알고 모르는 데에 있는 것은 아니다. 이제 내가 어떻게 행동하느냐가 문제이다.

 

  거미는 아직도 매미를 찬찬히 감아가고 있다. 이제 매미는 거미가 돌리는 대로 돌아가고만 있다. 거미는 마치 양쪽 손가락에 걸고 노는 실 팔랑개비처럼 매미를 돌리고 있다. 하나의 생물을 또 하나의 다른 생물이 마치 장난감처럼 돌리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머지않아서는 피가 나는 생채로 씹어 먹을 것이다.

  나는 더 이상 보고만 있을 수가 없었다. 분노 같은 어떤 것이 뭉클 가슴속에서 치밀었다.

  그렇다! 결국 거미란 놈은 이것을 위하여 꼼짝도 않았던 것이다. 애당초 줄을 늘일 때 잘 나다닐 곳을 선택한 거며, 보이지 않는 줄로 얼기설기 늘어놓는다든지, 한 자리에서 바람이 불어도 움직이지 않던 이유가 결국은 먹이를 위한 것밖에는 아무 것도 아니었다. 더구나, 먹이가 걸려들어도 주린 배를 채울 생각은 않고 찬찬 감아 놓은 채, 또 다른 놈이 걸려들지나 않을까 하고 지켜보던 것을 생각하면, 이 놈은 이 세상에서 가장 염치가 없고 비굴한 불로소득자(不勞所得者)랄 수밖에 없다. 아마 지금쯤은 오늘 저녁의 만찬을 생각하며 흐뭇하게 웃고 있을지도 모른다.


  나는 뚜벅뚜벅 앞으로 걸어갔다. 그리고, 지금 한창 돌리고 있는 거미를 쫓아 버리고 매미를 잡아 풀어 주었다. 거미는 이 의외의 거대한 침략자에 도망을 치면서 독기에 가득 찬 눈으로 나를 쏘아보고 있었다. 매미는 다시 살아난 기쁨으로 인사도 없이 날아가 버렸다.

 

  나는 그것이 잘 한 일인지 아닌지 분간하지도 못한 미결 상태의 착잡한 심정으로 묵묵히 원두막으로 걸어 내려왔다. 그리고, 아직도 그 때 일어난 내 분노가 무엇인지조차도 모른다. 단지, 지금까지도 그러한 미결 상태의 심정에서 그와 같은 이상한 행동이 취하여졌음이 잊혀지지 않을 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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