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19’민주화유공자 후손, 한국 떠날 수 없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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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9’민주화유공자 후손, 한국 떠날 수 없는 이유
  • 김사무엘
  • 승인 2007.07.2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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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환경 및 성장배경

▲ 서울조선족교회 인권센터 김사무엘 소장
이송화(가명)는 1966년 생으로 부친 이장호(가명)와 모친 조경화(가명) 사이의 1남2 녀 중 장녀로 태어나 하얼빈에서 조모의 보살핌으로 어린 시절을 보냈고, 1989년에 흑룡강 중의약대학을 졸업하였다.

조부의 원적(原籍)은 강원도 이천군 이천면 향교리 OO9번지, 본적은 서울 동성동 5가 154번지로 되어 있다. 조부는 일제시대 서울에서 생활하던 부모형제와 떨어져 만주로 이주하여 생활하였는데, 슬하에 자식 다섯을 두었다. 장남 이 강섭은 해방직전 서울에 있는 큰댁으로 보내져 학교를 다녔으며, 남은 가족들은 그 후에 서울로 돌아오려고 했으나 길이 막히면서 이산가족이 되었다. 50년대 초에 조부는 만주에서 조선족친목모임을 주선한 혐의로 반혁명에 몰려 온갖 박해를 받다가 1957년에옥사하였다.

부친은 다섯 형제 중 셋째로서 1963년도에 청화대학을 졸업하고 하얼빈과학기술대학의 교수로 재직하였고, 모친은 연변의과대학을 졸업하고, 주로 심양 및 하얼빈 등지에서 의사로 활동하였다.

이강섭 백부는 서울에 있는 큰할아버지 댁에서 기거하면서 서울대를 다니던 중 4.19 민주운동에 가담하여 총상을 입고 사망하여 현재 4.19묘소에 안장되어 있다.
본인은 조모의 각별한 사랑을 받으면서 성장하는 동안 가끔 조부와 백부에 대한 얘기를 들은 바 있어 이산가족에 대한 기억이 어렴풋이 뇌리에 남아있다.

이산가족상봉

1983년 중국은 개혁개방을 맞아 해외방송을 다소 자유롭게 접할 수 있었다. 그러던중에 막내 숙부(이성섭)가 한국 kbs방송‘이산가족 찾기’에 사연을 보내, 당시 하얼빈에 살고 있던 온 가족이 모여 한국에서 큰할머니(윤장자)가애타게 가족을 찾는육성을 전해 듣게 되었다. 백부(이강섭)의 사망소식을 접한 조모는 극도의 상심으로 1985년 이산가족의 한을 품고 세상을 떴고, 부친은 1990년 초에 큰할머니의 초청을 받고 처음으로 한국을 방문하여 이산가족 상봉의 소원을 성취했고, 이송화씨도 부친을 따라 1990년 9월에 한국을 방문하게 되었다.


서울에서의 생활

이송화씨는 부친과 함께 한국방문을 통해 서울에 있는 큰할머니와 고모할머니네 가족과 모두 상봉하게 되었고, 미국으로 이주한 5촌 고모, 고모할머니의 셋째 딸인 7촌 고모, 큰할머니의 장손인 6촌 오빠 등을 두루 만나게 되었다. 당시 중풍으로 병상에 누워있던 고모할머니는 독실한 천주교신자로 살아온 분인데, 임종을 부친이 지키게 되어 남옥고모와 각별한 사이로 지내게 되었다. 7촌 고모 역시 천주교 활동에 관심이 깊어 많은 신부님을 부친에게 소개하였는데, 이를 계기로 서강대 박O 총장님과 인연이 닿아 이후 부친은 서강대 교환교수로 초빙되었고, 본인도 부친의 권유로 한국에 재입국한 후 1992년 8월까지 경희대부속 한방병원 수련의과정 및 한의대예방의학교실에서 한의학을 연수하게 되었다.

모국어를 제대로 하지 못했던 동포3세였기에 수련생활을 통하여 능숙한 한국어 실력을 쌓았고, 이후 전통의학 분야의 의학저서를 번역하는 일에 주력하였으며 90년대초 한의학이 붐을 일기 시작할 무렵에 한중 전통의학의 국제적 교류활동에 통역을 맡는 등 작은 힘을 보태어 유학연수의 기회를 부여한 모국에 보답하려고 노력하였다.

귀국포기 사유

92년 8월, 한중 수교가 추진될 무렵, 이송화씨는 체류기간이 끝나 나름대로 연장을시도하였지만 원활하게 해결되지 못하였다. 그 동안 쌓아온 기반으로 한의학전공 대학원 진학을 꿈꾸었던 터라 귀국하여 다시 복잡한 수속절차를 밟는 것에 대한 갈등이 무척 컸다. 정치적 배경이 취약하고, 대학 졸업도 2~3년이 경과되었으므로 해외 유학에 필요한 까다로운 절차를 밟아 재입국해 유학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갖기 어려웠다. 한편, 어느 정도 한국사회에 안정적으로 적응하는 단계였으므로 귀국하여 졸업동기보다 늦은 출발선에서 사회진출을 하는 것에 대한 회의적인 생각도 귀국기회를 포기하게 만들었다.

2003년도 이후 여러 차례 자진귀국프로그램을 실시한 바 있었으나, 개인적으로 진학의 기회를 막연하게 기다리면서 문제해결에 소극적이어서 적시에 응하지 못하였다. 2005년~2006년 사이에 한중수교 전 입국자에 대한 구제 대안이 나왔을 때 역시정확한 정보인지가 부족하여 또 기회를 놓쳤다. 물론 지금 이에 대해 많은 후회와 반성을 하고 있다. 얻는 것과 동시에 잃은 것도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미 걸어온 인생길을 되돌릴 수 없어 시간의 흐름에 그대로 맡기고 말았다.

한국정착에 대한 소망

1990년도에 한국에 입국하여 어느덧 17년이란 세월이 지나갔다. 그 동안 겪은 여러고초를 감수하고 최선을 다하여 한국사회에 동화하고 선조들의 고향에 정착하여 살고 싶은 마음이 간절하다. 미운정 고운정 다 들어 이 땅을 떠나 귀국해 사회진출을시도하기란 그간의 공백이 너무 크다는 생각이다. 물론 개인적인 불찰로 야기된 과오를 고개 숙여 통감한다.

최근 우연히 인터넷 검색을 하던 중 한중 수교 전 입국 동포들의 귀화자격 및 수속절차에 대한 안내내용을 접하게 되어 관련서류를 뒤늦게 준비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적법한 체류를 유지하지 못한 과오를 시정할 수 있도록 관련 기관에 선처를 호소하기 위해 이산과족 관련 다수의 자료를 첨부하오니 귀화자격의 타당성을 재차 검토해주기 바란다고, 우리 교회 인권센터에 도움을 요청해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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