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 ‘목사님, 고정하세요’
우리나라의 ‘집시법’은 너무 불합리해서 법 지키기가 쉽지 않았다. 경실련은 처음부터 합법적인 운동을 하겠다는 입장이었기 때문에 비록 집시법에 악법조항이 있어도 이것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다. 실제로 경실련은 출범 이후 지금까지 수많은 데모를 했지만 한 번도 법위반을 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경실련이 데모를 하면 처음에는 충돌이 일어나지 않을까 걱정했던 경찰들도 얼마 뒤부터는 경실련 데모는 의례히 합법적인 것으로 알고 염려하지 않았다.
그러나 모순이 많은 집시법을 지키려니 우리도 고충이 많았다. 우리나라 집시법은 주요 간선도로나 주한 외교사절 숙소와 대사관에서 100m지점 내에서는 집회가 불가능하다. 그런데 서울에 주한외교사절이 너무 많다 보니 이곳을 피해 데모하는 것이 도심지역에서는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다.
그러다 보니 웃지못할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맨 처음 데모 때의 일이다. 서강대에서 창립대회를 치르고 시청 앞까지 가두시위를 하려고 집회허가를 받으려니까 두 개의 경찰서 관내에 걸쳐 있어 시경으로 가야한다고 했다. 그래서 시경에 가서 서울지도를 보니까 서강대에서 시청 앞에 이르는 사이에는 영국 대사관, 스웨덴 대사관 등 대사관은 물론 대사관 숙소가 널려 있어 데모 불가지역인 근방 1백미터를 동그라미로 그리고 나면 그 속에 들어가지 않는 곳이 거의 없을 정도였다.
그래서 내가 시경 간부에게 “좋소, 그러면 우리는 시위를 하다가 대사관 1백미터 지점에 도착하면 거기서 데모를 잠시 멈췄다가 1백 미터 지점을 지나면 또 다시 거기서부터 시작하는 방법으로 해서 시청 앞까지 가두시위를 하겠소”라고 말했다.
그랬더니 그 시경간부가 기가 막힌 듯이 내 팔을 붙잡고 “아유, 목사님 왜 그러십니까, 고정하십시오”라고 말하였다. 그리고는 서로 어이가 없어 같이 웃었지만 그만큼 합법데모가 어려웠다.
당시 민중당원이 데모를 할 때는 경찰과 대치하다가 협상 후에는 데모금지 지역인 대사관 숙소 1백미터 내 지역을 그냥 지나가며 시위를 했다. 그 광경을 보면서 나는 기분이 좋지 않았다. 이것은 경찰 스스로가 법을 지키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법의 모순을 그대로 방치하면서 경찰 스스로 적당히 봐주는 식으로 하는 것인데 이렇게 하면 법치주의가 올바로 설 수가 없다.
그래서 나는 경실련과 같은 시민단체가 경찰로 하여금 법을 지키도록 일깨워 주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예를 들면 집회신고를 하면 경찰에서 조건통보를 해주는데, 그 내용에 ‘구호를 외치지 말 것, 전단을 나누어 주지 말 것’ 이라는 식의 말도 안 되는 조건이 들어있는 경우가 많다.
경찰은 이런 통보가 지켜지지 않을 것임을 뻔히 알면서도 면피용으로 그렇게 통보하는 것이다. 그럴 때 우리는 ‘그런 조건통보는 받을 수 없다’고 버티었다.
한번은 이런 식의 조건통보를 안 받겠다고 했더니 담당 경찰관은 “이건 순전히 형식인데 왜 형식적인 절차를 갖고 까다롭게 그러시냐”고 불만을 털어 놓았다. 그러면 나는 “우리는 형식이 중요하다, 이렇게 엉터리 조건통보가 어디에 있느냐, 전단도 나누어주지 않고 구호도 외치지 않으면서 무슨 시위를 하느냐, 우리가 강조하려는 점은 법치의 중요성이다, 그러니 당신네부터 법을 지켜라”고 말해 주었다. 이런 싱갱이를 몇 차례 하면 경찰의 조건통보 내용도 합리적으로 바뀌게 된다.
또 이런 일도 있었다. 노태우 정권 때 수서사건 규탄집회를 탑골공원에서 열려고 집회허가 신청을 냈더니 종로구청에서 파고다공원 사용 금지통고가 나왔다.
그래서 왜 그런지 알아보았더니 집시법에 ‘공원에 물건을 고정적으로 부착을 하려면 사전에 허가를 받아야 한다’는 조항이 있는데, 그 조항 위반이라는 것이다. 하도 어이가 없어 “우리는 플래카드만 부착할 계획인데, 건축물도 고정물도 아닌 플라카드를 공원에 부착하지 못한다는 조항이 어디에 있느냐”고 따지고 사용금지 통고를 내린 종로구청장을 직권남용으로 고발하겠다고 했다. 그랬더니 얼마 뒤 비공식적인 통로를 통해 ‘사실은 중앙정보부가 내린 지시였다’는 이야기가 들렸다. 그래서 우리가 ‘그게 사실이라면 중앙정보부장을 고발하겠다’고 또 다시 엄포를 놓자 결국 종로구청에서 집회사용 허가를 내주었다. 이렇게 해서 우리는 합법적인 시위를 할 수 있었다.
이처럼 경실련의 합법시위 관행도 실은 오랜 투쟁의 과정을 거치며 정착된 것이다. 그리고 때로는 합법시위를 지키다가 의외로 좋은 결과를 얻어 흐뭇했던 경우도 있다.
한번은 내무부에서 지방세 과표를 현실화하겠다고 했다가 백지화를 해서 경실련이 내무부와 논쟁을 벌인 적이 있었다. 그런데 내무부 담당자에게 ‘우리와 이 문제를 놓고 지상토론을 해보자’라고 요청했는데 도통 응하지 않았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내무부가 우리와 지상논쟁을 하도록 유도할 수 있을까를 고민하다가 지도를 봤더니 정부종합청사 바로 옆길에 시위 가능 지점이 있었다. 그곳에서 집회신고를 내면 정부도 거절할 수가 없었다. 이 때문에 종합청사 옆길에 집회신고를 해놓고서는 다시 내무부와 협상을 했다.
‘만약 우리와 지상토론을 하지 않으면 종합청사 바로 옆에서 데모를 하겠다’
이렇게 했더니 내무부가 항복을 하고 토론에 응하겠다고 해서 지상토론을 벌인 적이 있다.
또 집시법이 워낙 문제가 많다 보니 합법적인 데모를 하다 보면 억울한 경우도 있기 마련이다. 태국에서 정치사태가 일어나서 짬렁시장이 군부세력에 의해 체포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의 일이다. 짬렁시장은 경실련 초청으로 처음 한국을 방문한 분으로 경실련과 매우 가까운 인사이다. 따라서 이 소식을 듣고 경실련에서 태국대사관 앞에서 데모를 하기로 결정하고 집회허가 신청을 냈다.
집시법상 집회신고는 48시간 전에 마쳐야 하므로 일단 집회허가 신청만 해놓은 상태에서 집회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다음 날 짬렁시장이 석방이 되어 버렸다. 짬렁시장의 조기석방은 두 손 들고 환영할 일이지만, 우리의 집회계획은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다. 만약 그때 우리가 눈 딱 감고 허가신청을 받기 전에 데모를 했더라도 큰 문제는 없었을 것이다. 그러니 이런 경우는 괜히 법을 지키려다 데모도 못한 경우이다. 사실 48시간 이전에 집회신고를 해야 한다는 조항은 그래서 옳은 조항이 아니다.
이런 불편함에도 불구하고 나는 법을 지키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특히 경실련은 보통시민이 주인인 단체이기 때문에 합법적이고 평화적이지 않으면 평범한 보통시민은 편한 마음으로 참여할 수 없다.
49. 법을 어긴 세 번의 사례
‘법을 지켜야 한다’는 것이 나의 주장이었지만 그러나 경실련 운동을 하면서 예외적으로 세 번은 법을 지키지 않았다.
한번은 서초동 꽃동네에 사는 도시빈민을 돕는 일을 할 때였다. 당시 경실련은 도시빈민들에게 정부가 아무 대책 없이 철거를 강행할 때에는 경실련 회원들이 와서 몸으로 막겠다고 선언했었다. 그런데 정부가 대책 없이 철거를 강행하여 우리는 할 수 없이 정부와 충돌할 수밖에 없었다. 철거반원들이 밀어닥치는데 경실련 회원들이 몸으로 막아서다가 전부 닭장차에 실려가서 먼 곳에 내려놓아준 적이 있었다. 빈민들의 안타까운 처지를 국민에게 홍보하기 위한 불가피한 처사였던 셈이다.
나머지 두 번의 경우는 공명선거실천시민운동협의회 활동을 하면서이다.
하나는 정책켐페인이다. 당시의 선거법을 법대로 지키면 각 후보의 주장이 구체적으로 잘 알 수 없었다. 그래서 경실련은 후보자들의 공약을 공정하게 평가해서 그 결과를 국민에게 알리는 ‘정책켐페인’을 전개했는데 이 켐페인은 엄밀하게 말하면 법위반이었다. 그러나 나는 몇 군데에서 정책캠페인을 강행했다. 처음에는 선거관리위원회와 싱갱이가 있었지만 정책캠페인의 원래 의도가 특정후보 지지가 아니었으므로 결국 선관위도 우리를 고발하지 않았다.
또 하나의 사례는 군부재자 투표부정과 관련된 일이었다. 당시 경실련에는 군부재자 투표부정을 고발한 이지문 중위 이외에도 많은 군인들이 군 내부의 비밀을 제보해 왔었다.
그중 한 제보의 내용은 병사들에게 TV시청 못하도록 하는 등 보안부대가 병사들의 참정권을 심하게 제약하는 지시를 내려 보내고 있었다. 그리고는 TV시청금지 지시를 비밀문서로 분류해 놓았다.
우리는 이 사항이 비밀로 분류되는 것은 옳지 않다고 판단하여 이 사실을 공개하기로 했다. 그 뒤 이 내용이 각 언론에 대서특필되자 국방부 측에서는 우리를 군사기밀보호법 위반혐의로 책임을 묻겠다는 말이 나왔다. 그러나 국방부는 우리를 고발하지 못했다. 워낙 엄청난 국민의 지지가 우리 편에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몇 가지 경험에서 볼 수 있듯이 기본적으로는 합법의 원칙을 지키지만 정말로 어쩔 수 없을 때에는 우리도 할 수 없었다.
50. ‘우리가 원하는 것은 노동자들의 불법파업이오’
어느 재벌 회사의 간부를 만났을 때의 일이다.
“회사에서 노사분규가 일어났을 때 만약 노동조합이 처음부터 끝까지 법을 지키면 회사가 견디지를 못합니다. 때문에 우리는 노동자들을 자꾸 약을 올리지요. 그러면 노조가 처음에는 참다가 나중에는 참다못해 법을 위반합니다. 그러면 우리는 공권력을 동원해서 어렵지 않게 노사분규를 진압할 수 있지요”
그분은 이렇게 말하면서 ‘그런 의미에서 보면 우리나라 노동자들은 많은 경우 스스로 묘혈(墓穴)을 파고 있다’는 얘기도 덧붙였다.
이 말을 듣고 섬찟했지만, 다른 한편으로 느낀 점도 많았다.
기업주는 반드시 공정하게 행동하지는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이런 상황을 딛고 노조가 자신의 주장을 관철시키려면 매우 지혜롭게 행동해야 한다. 따라서 노동운동도 국민 대다수가 지지할 수 있도록 평화적이고 합법적인 방법으로 진행되어야 노동자의 이익을 지킬 수 있다.
지금까지 노동조합은 사주 측으로부터 억울하게 당한 점들이 많을 것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노동조합은 일반국민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는 데 번번이 실패해왔고 언론의 지지도 거의 받지 못했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가장 중요한 이유는 합법운동을 마치 문제가 있는 운동으로 여긴 데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합법운동을 한계가 있는 운동, 체제 내에 안주하는 운동이라고 하찮게 보고, 과격하게 싸워 장렬하게 깨지고 감옥에 들어가야 성공할 수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군사독재 정권시절에는 옳았지만, 지금의 상황에서는 옳지 않다. 오히려 재벌그룹 간부가 이야기한 것처럼 ‘기업주가 파놓은 함정에 빠지는’ 실수를 저지르게 된다.
물론 합법운동의 타당성을 따지기에 앞서 법을 어길 수밖에 없도록 만드는 악법에 대해서도 짚고 넘어가야 한다. ‘악법인데 지키란 말이냐’고 항변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대다수 국민들이 그 법이 악법이라는 사실을 명명백백하게 알기 전까지는 악법도 지켜야 한다는 게 내 생각이다. 오히려 악법을 지키는 과정에서 그것이 얼마나 악법인가를 국민이 알게 되는 것이 필요하다.
공선협(공명선거실천시민운동협의회)이 활발한 활동을 하면서 선거법이 많이 고쳐졌지만, 공선협이 처음 발족할 당시만 해도 선거법은 정말로 문제가 많았다. 그래도 그 악법을 철저하게 준수했고 또 그랬기 때문에 국민은 선거법이 얼마나 잘못되었는가를 깨닫게 되었다. 이 때문에 법의 잘못된 조항이 빨리 고쳐질 수 있었다.
이런 일도 있었다. 국회에서 토지공개념 관련법을 다룰 때 방청석에 앉아 이를 지켜보았는데, 법안이 상임위원회에서 법안심사소위로 넘어가자 방청을 할 수 없었다.
그런데 사실 모든 법안은 법안심사 소위 안에서 막후 협상으로 해결되는 경우가 많아 우리가 제 아무리 상임위 방청을 하고 또 그것을 토대로 의정감시를 하려고 해도 되지 않았다.
그래서 우리는 법안심사 소위를 방청하겠다고 했다. 당시 방청 허용은 소위 위원장의 재량에 달린 문제인데, 다른 소위의원들은 호의적인데 유독 위원장만은 찬성하지 않았다.
때문에 우리는 그 의원의 지구당 사무실 앞에서 ‘왜 시민들의 의정감시 권리를 보장하지 않느냐’고 시위를 하려고 집회신고를 냈다. 그랬더니 그 지역은 사람들의 왕래가 잦은 곳이라며 금지통보가 왔다. 그 다음에 또 다른 곳에 집회신고를 냈더니 이번에도 금지통보가 내렸다. 나는 경찰서담당 정보과장에게 전화를 걸어 왜 자꾸 금지통보를 하느냐고 항의했다. 정보과장은 제발 자기 관내가 아닌 다른 곳에서 집회를 해달라고 하며 자기 관내에서는 할 수 없다고 고집했다.
나는 “아니요, 우리는 끝까지 집회신고를 할겁니다. 특히 당신네 관할경찰서 지역 안에서 집회가 가능한 한 평의 땅이라도 있으면 거기서 데모를 하겠습니다. 그게 한 달 후든 두 달 후든 상관하지 않겠습니다. 언제고 집회허가를 내줄 수밖에 없는 때가 오면 그때 집회를 열어 당신들이 집시법을 얼마나 악용하고 있는가를 만천하에 폭로 하겠습니다”
그랬더니 정보과장이 당황해하며 어쩔 줄을 몰라 했다. 그리고 곧이어 그 의원으로부터 사과전화가 걸려 왔다.
그러나 이미 법안심사소위 방청의 시기는 지나가 버렸기 때문에 사과를 받는 선에서 일을 마무리하고 말았다.
이처럼 법을 지키면 도덕적으로나 명분상으로 우위를 갖게 되므로 때로는 엄청나게 큰 힘을 발휘한다.
나는 학생운동을 보면서도 법과 질서를 지키려는 노력이 적은 것에 대해 늘 아쉬움을 갖는다. 한번은 지방강연에 가기 위해 자동차를 타고 연세대 앞을 거쳐 김포공항으로 가는데, 학생들이 차도를 점거하고 데모를 하고 있었다. 도시빈민운동을 지원하기 위한 시위인 듯 보였다. 그런데 5분이 지나도 길을 열어주지 않았다. 기다리다 못해 나는 차에서 내려 학생들에게 고래고래 고함을 지르며 야단을 쳤다.
“도대체 너희 학생들이 무슨 자격으로 시민들의 발을 묶느냐. 너희도 법을 지켜라. 스스로 법을 지키지 않으면서 무슨 민주주의를 하겠다는 거냐”
그러자 몇몇 학생들이 나를 알아보고 ‘서목사님 왜 이러십니까’하며 말리기도 했고, 어떤 빈민은 내게 욕을 하기도 했다. 나는 당시 학생들의 행동에 대해 분개했다. 학생들 중 누구도 법을 어겨가면서 시민들에게 피해를 줄 수 있는 자격이 있는 사람은 없으며, 시민들도 그것을 참지 말고 오히려 학생들을 준열히 꾸짖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학생운동도 진정으로 우리사회의 변화와 발전을 추구한다면 합법적으로 행동해야 한다. 그래야 일반국민의 지지를 얻을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