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대학교에서 글짓기를 가르친다. 그래서 제목 다는 것에 신경을 많이 쓴다.
나는 세계 3대 단편소설의 거장 러시아 체호브, 프랑스의 모파쌍, 미국의 오헨리의 대표작들을 가지고 제목의 묘미에 대해 설명한다. 체호브의 <관리의 죽음>, 제목이 너무 직설적이다 보니 탁하여 묘미를 운운할 여지가 없다. 소설은 소관리의 죽음을 통해 짜리전제통치하의 삼엄한 관리체계를 고발하고 비판하자고 했다. 그럴진대 ‘관리의 죽음’이라는 제목은 작품의 내용이나 주제를 잘 개괄했다고 생각된다. 그런데 문학작품은 정치 고발서나 비판서가 아닐진대 그 고발과 비판을 추구한다고 할지라도 은근슬쩍 둘러치기를 해야 한다. 이것이 바로 예술적 기교다. 그래서 나는 <관리의 죽음> 제목을 <제치기>로 바꾸어본다. 그 소관리의 죽음의 계기가 제치기이니 旁敲侧击의 은근슬쩍이 된다. 이로써 민감한 정치에 너무 집착하다 보니 격하고 직설적이기 쉬운 19세기 러시아문학의 해딱 발가짐을 얼마간 덜어버릴 수 있다.
프랑스 모파쌍의 <비게덩어리>, 그 제목 참 잘 달았다고 생각된다. 전쟁이라는 비상시기 귀부인들와의 대비 속에서 별 보잘 것 없는 기생의 애국심을 보여주되 그 기생을 ‘비게덩어리’로 부르는 아이러니, 무거운 정치적 느낌도 가벼운 유머로 커버하는 프랑스사람들의 재치가 돋보여 음미할 여지가 많다.미국 오헨리의 <메치의 선물>, 가장 잘 단 제목. 사랑하는 가난한 부부, 생일을 맞아 사랑하는 아내를 위해 남편은 시계를 팔아 빗을 선물로 산다. 그런데 사랑하는 남편을 위해 아내는 탐스러운 머리칼을 잘라 팔아 남편을 위해 시계줄을 산다. 그들이 저녁에 만나 서로 선물을 내놓는 순간 웃지도 울지도 못할 난감한 장면이 벌어진다. 이 난감함이 문학이고 예술이다. ‘메치의 선물’은 이것을 잘 살렸다. 미국식 흑색유모아가 확 풍겨 좋다.
<사랑이 뭐 길래>, 한국에서 최초로 중국에서 히트친 TV드라마. 중국 중앙TV에서 황금대에 방송할 정도로 인기절정에 올랐다. 그 공로는 전적으로 우리 연변의 김염란 여사에게로! 김염란 여사가 우리말을 중국말로 옮겼으니깐. 그 번역하기 어려운 구어체들을 네이티브 중국어로 잘도 소화해냈다. 그런데 옥에 든 티라 할까, 제목은 영 별로다. <愛情是什麽?>, 전적으로 애정학의 한 물음이 되고 말았다. 제목의 감칠맛이나 은근슬쩍 맛을 잃고 말았다. 한국 드라마의 원 제목 <사랑이 뭐 길래>는 제목을 참 잘 달았다고 생각된다. 그것은 우리 일반사람들이 적어도 한번 쯤 되뇌이게 되는 구어체의 물음 비슷하게 되어 있다. ‘사랑이 뭐 길러, 누구에게 묻기도 하는 것 같고 자기 스스로에게 묻기도 하는 것 같다.
사랑은 우리 인간이 알게 모르게 하게 되는 거, 그리고 이 세상 다 할 때까지 하게 되는 거, 하고 또 해도 끝이 없는 거. 그러면서도 그것은 얽히고설킨 복잡한 거, 그렇게 집착하고 열렬히 하면서도 무엇인지 잘 모르는 거... 이런 복잡미묘한 뉴앙스들이 슴배인 제목이다. 무엇이라 딱 찍어 말할 수 없는 문학 감칠맛이나 미묘함이 살아난다. 그래서 내 나름대로 한번 번역을 시도해본다. <啊! 愛情......>, <愛情呀! 愛情......>, 좀 고리타분한 것 같기도 하지만 그래도 <사랑이 뭐 길래> TV드라마 내용이나 주제를 감칠맛이 나게 번역했다고 나름대로 자부.
내가 쓴 글 몇 편, 연우포럼에 난 것을 보도록 하자. <행복한 낮잠자기>, <四川辣妹와 조선여자>, <진짜 사나이는 한국사나이> ... 나는 원래 <행복한 낮잠자기>를 ‘세월아, 네월아, 네 왔냐’로, <四川辣妹와 조선여자>는 <四川辣妹>로, <진짜 사나이는 한국사나이>는 <한국사나이>로 제목을 달았었다. 그런데 편집자 측에서 현재 상태로 고쳐버렸다. 그럼 현재 제목과 내 원래 제목을 좀 비교해보자. <행복한 낮잠자기>는 내 글의 내용을 잘 개괄했으되 너무 탁하다. 고지식하게 탁하다. 오히려 ‘세월아, 네월아, 네 왔냐’는 순리대로 살자는 내 글의 취지를 능청스러운 유머로 잘 드러내고 있어 감칠맛이 난다. <四川辣妹>, 내 글의 포인트는 어디까지나 ‘四川辣妹’. 四川辣妹의 이모저모를 보여주기다. ‘조선여자’를 끌어들인 것은 어디까지나 은근슬쩍 친 양념. 그러니 <四川辣妹와 조선여자>에서처럼 굳이 ‘조선여자’를 제목으로 끌어올려 군더더기로 만들 필요는 없다. 우리 신변과 관련되는 제목으로 독자들의 주의를 불러일으키자는 편집자의 고심은 충분히 이해하면서도 <四川辣妹와 조선여자>는 그래도 ‘四川辣妹’로 하는 것이 제격.
<진짜 사나이는 한국사나이>는 제목에 아양기가 있는 듯하다. 그러면서도 탁하고 딱딱하다. 아무리 진짜 사나이라도 굳이 제목에서까지 ‘진짜 사나이’하면 코앞에서 아양 떨며 알랑거리는 추태로 보임. 은근슬쩍의 맛이 없다. 하물며 내 글의 내용은 진짜 사나이고 뭐이고 떠나 한 인간으로서의 한국사나이들을 보여주려고 했음에라. 그래서 그저 그렇고 별 볼일 없는 듯한 ‘한국사나이’를 제목으로 하되 실은 그저 그렇지도 않고 별 볼일 없지도 않은 인정미 넘치는 한국 사나이를 보여주려고 했음. 그러니 아무래도 원래 제목 ‘한국 사나이’가 무난한 줄로 안다.
제목은 글의 첫 인상이다. 대단히 중요하다. 사람과의 만남도 첫 인상이 중요하지 않은가. 읽히고 안 읽히고는 제목의 첫 인상에 좌우지될 수도 있다. 그렇다 하여 굳이 이 급해지고 화려한 미사여구에만 혼이 빨리는 천박한 독자들의 구미에 맞출 필요는 없다. 이런 독자들에게 안 읽히지도 좋다. 오히려 읽히는 것이 부담스럽다.
제목은 어디까지나 예술인만큼 은근슬쩍 감칠맛이 나는 묘미가 있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