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중 초기서원 교육 비교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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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중 초기서원 교육 비교 (2)
  • 동북아신문 기자
  • 승인 2007.07.0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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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남대학교 정낙찬·김홍화>
 2. 중국서원


남송 서원의 흥성은 성리학의 발전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다. 남송 학자들은 성리학을 연구하는 학자들이었고 남송의 서원은 성리학을 강의하고 전수하는 서원이었다. 성리학에 대한 연구와 강의는 서원교육과 교학의 기본내용이었으며 서원의 교육과 교학은 또한 성리학을 선전하고 전파하는 중요한 기지였다. 뿐만 아니라 남송의 서원은 정주학(程朱學)의 연구중심이었으며, 또 정주학의 전파중심이었다(李國鈞․王炳照․李才棟, 1994: 168).

「여택강의(麗澤講義)」를 살펴보면 당시의 주요한 교육내용이 유가경전을 위주로 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예를 들면 역경(易經), 시경(詩經), 상서(尙書), 논어(論語), 맹자(孟子), 주례(周禮), 예기(禮記) 등이 있고 다음으로는 역사에 관한 것인데 예컨대 사기(史記) 등이다(李國鈞․王炳照․李才棟, 1994: 382).

주자는 교육을 소학과 대학 두 단계로 나누었다. 주자는 소학교육을 아주 중시하였다(『朱文公文集』 卷 76, 題小學). 그는 소학교육의 좋고 나쁨은 대학교육에 관련이 있을뿐더러 어떤 사람을 배양하는 문제에 관계된다고 하였다.1) 그리고 대학교육은 소학교육 내용의 심화라고 하였다. 그는 소학에서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하는 것만 배울 뿐이지 왜서 그렇게 해야하는가 하는 도리에 대해서는 대학교육에 가서야 배운다고 하였다(『朱子語類』 卷7, 學 1, 小學). 여기서 주자는 학교교육을 아주 선명하게 두 단계로 나누었으며 소학은 사(事)를 이해하고, 대학은 그 이치(理)를 궁구하는 것으로 양자 모두 필요하고 중요하다고 하였다.

교재는 교육의 기본이 되는 것으로 한대(漢代) 이후 학교교육에서는 유가의 경전을 주요 교재로 삼았으나 한당(漢唐)시대와 송대는 연구대상이나 연구방법이 서로 달랐다. 한당시대의 유학은 훈고사장학이 중심이었는데 반하여 송대 유학자들은 의리학(義理學)․도학(道學)이라고도 칭하는 송학(宋學)을 연구대상으로 하여 우주의 원리나 인간의 본성을 연구하는 것이 중심이었다.

서원의 교재를 놓고 말하자면 송학을 또 의리지학이라고 일컫는데 육경(六經)전체가 포함되지 않으며 오직 역경, 논어, 대학, 중용 및 맹자 등을 그들이 주요한 재료로 하였으며, 여유가 있으면 다른 경전을 언급하였다. 때문에 송대 학자들이 중요한 교재로 연구한 것은 특히 역경과 사서이다(陳靑之, 1978: 210).

백록동서원에서 주자가 제시한 대학교재를 놓고 봐도 그 범위가 상당히 방대하여 포함되지 않는 것이 없음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표 2>에 나타난 바와 같이 주자가 백록동학규에서 박학(博學)을 중시한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표 2> 주자가 제시한 대학교재

교재

교  과  목  명

경(經)

역경․서경․시경․주례․의례․이대기․춘추와

(易經․書經․詩經․周禮․儀禮․二戴記․春秋) 

삼전․대학․논어․맹자․중용(三傳․大學․論語․孟子․中庸)

사(史)

좌전․국어․사기․양한사․삼국사․진서․남북사․신당서․오대사

(左傳․國語․史記․兩漢史․三國史․晋書․南北史․新唐書․五代史)

자(子)

제자(諸子)

* 출처: 伍振鷟(1978). 兩宋理學敎育思潮. 臺北: 偉文圖書出版社를 참고했음.


수업시간에 시행되었던 교육내용을 살펴보면 백록동서원의 수업내용을 직접적으로 알 수 있는 기록은 주자의 중용일장강의(中庸一章講義)와 백록동서당책문(白鹿洞書堂策問) 그리고 육상산(陸象山)의 논어강의(論語講義)가 있는 정도이다. 먼저 주자가 순희 7년 3월에 강의한 중용일장의 강의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中庸』, 卷 1).


하늘이 명령하신 것을 성(性)이라 하고, 성을 따르는 것을 도(道)라고 하며, 도를 닦는 것을 가르침이라 한다. 도라는 것은 잠시도 떠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만약 인간이 벗어날 수 있는 것이라면 그것은 도가 아니다. 군자가 남에게 보이지 않는 곳을 삼가고 남에게 들리지 않는 곳을 두려워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가장 은밀한 것만큼 잘 보이는 것이 없으며 가장 미미한 것만큼 잘 드러나는 것이 없다. 군자는 홀로 아는 그 곳을 삼간다. 희로애락으로 표현되기 이전을 가리켜 중(中)이라고 하며, 희로애락이 중에 맞게 표현된 상태를 가리켜 화(和)라고 한다. 중은 천하가 따라야 할 궁극적 표준이며, 화는 도가 천하에 두루 퍼져 있는 상태이다. 중과 화의 원리가 완전히 실현될 때 천지는 제자리에 서며 만물을 성장한다.2)


이상은 중용 1장의 중요 문장으로서 중심내용은 도의 본원이 하늘에서 나와서 바꿀 수 없다는 것과 그것을 기르는 요령 그리고 성신(聖神)의 공로와 조화의 지극함을 말하고 있다.

순희 8년 2월에 육상산의 백록서원강의(白鹿書院講義)(子曰君子喩於義․小人喩於利)를 보면 다음과 같다(陳谷嘉․鄧洪波, 1998: 213).


이 장은 의리로서 군자와 소인을 분별하고 있다. 문장의 취지(辭旨)가 분명하지만, 이것을 읽는 자가 진실로 자신을 절실히 하여 살피지 않으면, 역시 아마 보탬이 있지 않을 것이다. 나는 평일에 이 장을 읽고 느끼는 바가 있었다. 나는 학자들이 이 장에서 마땅히 그 뜻을 분별할 수 있다고 생각된다. 사람이 깨닫는 바는 그 배우는 것에서 비롯되며, 배우는 것은 그 뜻에서 비롯되니, 의(義)에 뜻을 두면 배우는 것이 반드시 의에 있다. 이(利)에 뜻을 두면 배우는 것이 반드시 이에 있으며, 배우는 바가 이에 있으면 이에 깨닫는 것이 이에 있다.

그러므로 학자들의 뜻을 분별하지 않을 수 없다. 과거로 인재를 선발함은 오래되었으며, 명유(名儒)와 거공(鉅公)이 모두 이로부터 나왔다. 지금의 사대부(士大夫)도 진실로 이것에서 벗어날 수는 없다. 그러나 과거의 합격과 불합격이 다만 기술(技術)과 유사(有司)의 호악(好惡)에 좌우되었을 뿐이니 군자와 소인의 구분이 되지 않는다. 지금 세상은 이런 과거를 서로 숭상하고 이에 빠져 있어, 스스로 벗어날 수가 없으니 하루종일 종사(從事)하는 일이 비록 성현의 책(冊)을 읽는 것이지만, 요컨대 그 뜻이 향하는 바는 성현과 위배되어 있다. 미루어 위로는 또 관직의 고저와 봉급의 후박(厚薄)만을 계산한다. 어찌 능히 국사와 백성의 고통에 마음과 힘을 다하여, 책임을 맡은 일에 대해 어긋남이 없겠는가?3)


위와 같은 『논어』 권 4, 16장에 대한 강의는 당시 과거와 군자(君子)․소인(小人)을 연결시켜 강론(講論)함으로써 백록제생을 훈계하는 경향이 강하게 나타나고 있다.

이상은 중국 초기서원의 교육내용을 기재한 자료로서 여기서 우리는 당시 서원에서 성리학을 근본 교육내용으로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강의 내용에서 당시의 사회를 비판하는 경향이 강함을 보아낼 수 있다. 그리고 백록동서원의 교육내용은 궁리의 마지막 단계를 지향하고 있었으므로 당시로 놓고 보면 상당한 수준에 있었음을 알 수 있게 한다.


3. 교육내용 비교


한국과 중국 초기서원 교육내용의 공통점은 모두 성리학을 근본 교육내용으로 했으며 경학을 사장학보다 우선시 했다는 것이다. 초기서원이 건립되었던 당시 두 나라 모두 성리학 융성기로서 교육내용은 사장학보다도 경학을 우선시하였다. 그러나 현실적인 요구에 부응하기 위하여 모두 과거준비를 위한 제사자집이나 문장공부도 첨가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한국과 중국 초기서원 교육내용의 차이점은 필수교과에서 약간의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즉 한국의 최기서원에서는 소학과 사서오경을, 반면에 중국의 초기서원에서는 역경과 사서를 필수과목으로 다루었다.

그리고 한국의 초기서원은 주자학에 관련된 과목만을 중심으로 하였기 때문에 주자학의 순수성이 강조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중국의 초기서원에서는 주자학에 관한 학문뿐만 아니라 다른 학파의 학문도 공부할 수 있었다.


Ⅳ. 교육방법


1. 한국서원


가. 강학(講學)

1) 강(講)

한국서원의 교육은 주로 강의 방법을 통하여 이루어졌다. 강이란 배운 글을 소리높이 읽고 그 글의 의리(義理)를 묻고 답하는 전통적인 교수방법이다. 강은 대개 ‘순강(旬講)’․‘망강(望講)’․‘월강(月講)’등으로 나뉘는데, 순강은 10일마다, 망강은 15일마다, 월강은 1개월마다 열린다. 지천서원의 원규에 의하면, 서원의 모든 생도들은 반드시 매일 열리는 석강(席講)과 10일마다 열리는 순강 및 봄가을로 열리는 강회에 참가하도록 규정하고 있다(김창욱, 1996: 104).

조선시대에는 과거에도 강경과(講經科)가 있었는데, 생원(生員)․진사(進士) 및 사학(四學)의 학생과 문벌가의 자제를 선택하여 어전(御前)에서 경전(經典)을 암송케 하는 것을 말한다. 이것을 약칭하여 경과(經科)라고 하였다(정순목, 1979: 191).

강에는 그 방법에 따라 배강(背講)과 면강(面講)이 있다. 배강은 암송낭독이고 면강은 임문낭독(臨文朗讀)인데, 일반적으로 강이라 하면 배강을 일컫는다. 그러나 강은 단순히 경전을 외우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문리를 터득하지 않고서는 강이 이루어질 수 없다. 기계적인 기억에는 한도가 있을 뿐만 아니라 특별히 뛰어난 기억력을 지니고 있다 할지라도 논리적 이해가 뒷받침되지 않으면 사상누각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특히 낭독한 뒤에 전개되는 질의응답은 기계적인 암기에 빠지지 않게 하는 역할을 할 뿐만 아니라 ‘박학(博學), 심문(審問), 신사(愼思), 명변(明辨)’ 하는 기능과 수양을 도모하여 주는 것이다(정순목, 1979: 191-192).

또한 서원에서는 계절에 따라 그 교과내용을 달리 편성하여 강학하는 방법도 채택하였다. 석강서원의 원규(장병기, 1961: 석강서원지)에 의하면, 겨울과 봄에는 사서오경을, 여름과 가을에는 제사자집을 읽게 하여 계절과 교과를 조화시키고 있는데, 여름철의 더운 때에는 엄격하고 까다로운 경서를 피하려는 지혜가 돋보인다. 독서법도 다독(多讀)과 기송(記誦)만을 일삼지 말고 정독과 사색에 힘쓸 것과 지와 행이 반드시 일치해야 함을 강조하였다.


2) 강의(講儀)

강의는 일반적으로 강은 ‘받는다’라고 말한다. 강을 받는데는 일정한 절차가 있는데. 이러한 절차를 강의라고 한다. 강의는 서원에 따라 약간의 차이가 있기도 하였으나 대체로 비슷하였다. 이 강의안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정순목, 1979: 192).


당번(直日)은 사석(師席) 앞에 책상을 둔다.

사강(司講) 1인은 동향을 하여 사석 오른편에 또 다른 1인은 그 왼 편에 앉는다.

추첨통(置籤筒)을 스승의 책상 위(또는 왼편)에 놓고 강을 할 책 세 권을 사석과  사강 2인의 책상 위에 놓는다.

강생을 차례대로 이름을 부른다.

지정된 강생은 사석 책상 앞으로 나간다.

두 번 절하고 무릎을 꿇고 앉는다.

추첨통 안에서 하나를 뽑아 강생에게 주면 강생은 일어나서 받아 주어진 글을 읽고 질의에 응답을 한다.

끝나면 사석과 사강은 각기 찌(栍)를 성적에 맞게 헤아려 직일에게 알리고, 직일은 기록부에 이를 상세히 기록한다. 강생은 두 번 절하고 물러난다.

강을 마치면 집례(執禮)가 사석에게 나아가 강을 마쳤음을 아뢴다.

사석이 자리에서 일어나면, 제생은 일제히 일어나서 사석을 향하여 함께 두 번 절한다.

이에 사석은 읍을 하여 답하고, 강을 그만둔다.4)


이 강의안에서 우리는 당시 서원교육이 단순하고 임의적인 방법으로 진행된 것이 아니라 일정한 절차와 방법에 따라 치밀하게 준비되고 계획된 방법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임을 알 수 있다.

서원에서 강회가 시작되기 전이나 끝날 무렵에 주자의 「백록동규(白鹿洞規)」와 「향약(鄕約)」을 낭독하는 것이 상례였다(『퇴계전서』 권 41, 잡저 이산원규). 주자의 「백록동규」는 주자가 만들어서 백록동서원의 학도들에게 게시한 것으로, 모든 교육의 근본이 오륜을 밝히는 것으로부터 시작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오교지목과 위학지서 및 수신․처사․접물지요로 짜여진 「백록동규」는 조선의 거의 모든 서원에서 그대로 존숭되고 있었다(『퇴계전서』 권 7, 차, 진성학십도차, 동규후서).


나. 문답법

서원에서의 교수방법에는 철저한 개별식 문답학습 방법이 있다. 강장에게 매일 강을 받고 의리를 문답하였는데, 강장은 개개 원생의 학습이 철저히 된 것을 본 연후에 개별적으로 새로운 내용을 교수하였다. 현대적 용어로 말한다면 이 교수 방법은 획일적이거나 주입식이 아닌 개인 중심의 문답식이었다(최완기, 1975: 36). 형식은 많은 내용을 한꺼번에 가르치지 아니하고 작은 양을 반복하여 복습하게 함으로써 충분히 이해할 수 있게 하였다. 서원에서의 교육 또한 1대 1의 대면학습이기 때문에 능력별 개별학습이 가능하고, 학습진도는 원생들 각자의 능력과 노력에 따라 결정되었다. 그러므로 문답식 교수방법은 스승과 제자간의 인격적 교류가 원활하게 전개될 수 있는 장점을 지니고 있는 교수방법이라고 말할 수 있다(정순목, 1979: 192).


다. 토론법

 서원에서의 교육방법은 주로 강의형식이 아니라 토론형식이었다. 토론은 스승과 제자 혹은 제자와 제자들간에 서로 학문을 토론하고 자신의 소견을 쟁론하는 것이다. 퇴계는 「심경(心經)」과 「계몽(啓蒙)」에 대한 특강을 하였으나 오히려 수시(隨時)․수처(隨處)에서 비유와 경험전달을 통한 계발방식을 즐겨하였으며 대화교육이 특색이었다(최완기, 1975). 토론은 편지의 형식을 빌어서 진행될 때도 있는데 이 때의 편지는 철학논문일 수 있다. 당시는 서로 마주하여 지식을 교환할 기회가 적었기 때문에 이를 보충코자 편지를 사용하였다. 편지는 사우간이나 선배가 후배를 계도하고 평배(平輩)간에는 상호 절차탁마하는 진지한 정의를 나누는 수단이었으며 학풍진작에 커다란 공헌을 하였다.


2. 중국서원


가. 강학

강학은 서원의 주요한 활동이며 서원이 교육기관으로서의 중요한 표지이다. 중국 초기서원의 강학은 많은 새로운 발전을 가져왔는데 주요하게 강회식 강학을 사용하였다. 강회식 강학은 서원교육의 하나의 중요한 특징으로서 일반 학교의 교육과 구별된다. 이는 당시 학교에서 스승이 강의하고 학생은 듣기만 하는, 오직 하나뿐이고 지정된 한곳에서만 교육을 하거나 받는 일반 학교보다 많이 자유롭다. 강회식 강학의 목적은 상호 토론과 논쟁에 있고, 때로는 일개 학파의 정선된 주의 주장을 드러내거나 다른 학파와의 주장과의 차이점을 변석(辨析)하는 데 있다.

 서원의 강학은 보통 주강자(主講者)가 강단에 올라 경문(經文)을 전수하거나 경의(經義)를 상세하게 진술한다. 그리고 그 학파의 중심되는 강령을 천발(闡發)하기도 한다. 남송시기 주자는 백록동에서, 육구연은 상산에서, 여조겸은 명초산(明招山)에서, 장식(張栻)은 악록서원에서 몸소 주강(主講)하였다. 그 뒤 산장(山長)이나 학장(學長) 또는 재장(齋長)들도 마찬가지로 친히 강의하기도 하였다. 서원의 유명인사들이 강의한 요점을 적어서 강의(講義)나 어록(語錄) 등을 펴내기도 하였다. 예컨대 여조겸의 「이택강의(麗澤講義)」․진량의 「경서발제(經書發題)」․정단례의 「강동서원강의(江東書院講義)」․주자의 「어류대전(語類大全)」․육구연의  「상산어록(象山語錄)」등이 대부분 문헌기록이었다(정순목, 1990: 133).

 

 강학에는 본 서원의 스승이 강학하는 외에 늘 다른 서원의 저명한 학자들을 초청하여 강학하는 강회식 강학이 있다. 강회(講會)가 방금 시작될 때는 오직 서원 내부의 교육활동으로 단정되었지만 발전되어 가면서 후에 와서는 서원에서 주최하는 하나의 지역성적인 학술집회로 되면서 서원이 그 지역의 학술중심으로 되었다. 강회는 본 서원의 큰 스승이 주강하거나 기타 학파의 학자들도 참가한 가운데서 또한 다른 학파의 큰 스승들을 초청하여 주강할 수 있다. 강회이전에는 항상 주강자가 먼저 이번 강학의 종지를 공포한 다음 강의를 시작한다.  주강자가 강의를 끝마친 후 듣는 사람들은 의문을 제기할 수 있으며 부동한 의견을 발표한 후 쌍방이 변론을 전개한다.

 

일반적으로 말하자면, 강회의 참가자들은 본 학파의 학술사상을 선전하면서 다른 학파의 주장을 반박하였는데 늘 쟁론이 매우 격렬하였으며 서로 양보하지 않았다. 순희(淳熙)2년에 강서성 신주(信州)의 아호사(鵝湖寺)에서 공개적인 논변을 진행했는데  바로 ‘아호지회’(鵝湖之會)라는 유명한 강회였다. 이때 모인 유명인사들로는 주자․육구령(陸九齡)․육구연(陸九淵)․유청지(劉淸之) 등이 있었는데 주자와 육씨 형제간에 쟁론이 벌어졌다. 주자는 ‘독서는 먼저 박람을 한 뒤에 요약을 하여야 한다(先泛觀博覽 而後歸之約)’고 주장한 데 반하여, 육씨 형제는 ‘먼저 본심을 밝히고 난 다음에 박람하여야 한다(先發明本心 然後使之博覽)’고 하면서 주자의 교육방법이 지리(支離)하다고 하였다. 결국 강회는 서로 자기주장을 고집하여 결론을 얻지 못하고 말았지만 당시 학술계의 주목을 받았다. 순희 8년(1181년)에는 주자가 육구연을 백록동서원에 요청하여 강학을 하였는데  그가 강학한 내용을 돌에 새겨서 원문에 세우게 하였는데 이때로부터 강회제도의 선하(先河)를 열었다(정순목, 1990: 133). 

 

강회제도는 시초에는 서원내의 하나의 교육활동에 그쳤지만, 그 후로는 점차 서원의 범위를 초월하여 지역성적인 학술활동 집회로 형성되었다. 서원에서 유명한 학자가 강학을 할 때 주위의 서원과 외지의 서원의 사생들이 모여서 강의를 들었다. 많은 학자들은 천리 길도 멀다하지 않고 강회에 참가하였다. 서원에서는 스승의 명성을 듣고 배우러 오는 자들을 열정적으로 맞이하였으며 세심하게 배려하였다. 한사람의 견문은 유한하지만 중인(衆人)의 견문은 무한한 것으로 강회는 사람들로 하여금 견식을 넓히게 하였다. 강회는 많이는 서원에서 개최하였는데, 서원은 이를 계기로 하여 교육범위를 확대하였고 교육내용을 풍부히 하였으며 교육수준을 제고하였다. 동시에 서원은 자체의 영향을 확대하였고 사회지위를 제고하였으며 지방학술활동에 공헌을 하였다(李國鈞․王炳照․李才棟, 1994: 170).


나. 문난논변(問難論辯)

서원에서는 문난논변의 방법을 많이 사용하였다. 원생들 사이에서 서로 토론하고 연구했을 뿐만 아니라 사생간에도 경상적으로 질의 문난하였다. 문난논변의 방법에는 집단적인 토론뿐만 아니라 개별적인 교수도 있었는데 그 내용이 고제(高弟)에 의해 대대로 전해지기도 했다. 주자의 많은 학생들은 스승과의 질의 문난 내용을 기록했으며, 그 기록을 분류를 나누어 『주자어록』을 편집하여 오늘에까지 전해 내려오게 하였다(李國鈞․王炳照․李才棟, 1994: 201).

서원에서는 원생들로 하여금 독서를 통해 의문점과 난점을 제기하게 하였으며 학생들을 격려하여 문난논변하게 하였다. 서원에서 원생들은 책을 읽어 스스로 이해하는 것에 중점을 두었으며 스승은 원생들의 난점과 의문점에 대하여 설명을 진행하였다. 주자는 독서에는 반드시 의문이 있어야 한다고 하면서 학생들이 제기한 의문과 난점에 대해 특별한 중시를 돌렸다. 그는 의문을 가져야만 그 미소한 부분까지 연구할 수 있으며, 의문은 점차적으로 해결해 나가야 한다고 하였다. 그는 백록동서원에서 늘 친히 학생들과 질의 문난하기도 하였다(李國鈞․王炳照․李才棟, 1994: 172).

한 사람이 유명한 스승에게 가르침을 받는 동시에 학문의 벗인 동학들과 더불어 절차탁마(切磋琢磨)하는 것은 개인적인 독학에 비하여 훨씬 많은 소득과 진보를 가져다 줄 수 있다. 그리하여 학문을 추구하는 선비들이 유명한 스승을 찾아 서원에 들어간 그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 같다.


다. 자학위주(自學爲主)

송대 관학에서도 생도들의 자학을 제창하였지만 관학에서의 교육은 과거시험을 내용으로 하였기에 학생들이 과외에 하는 자습은 교사가 주입한 문자를 억지로 암기하는데 지나지 않았으며 전혀 자발적이라고는 말할 수 없다. 서원에서는 과거의 속박에서 벗어나 비교적 활발한 자학위주의 교수방법을 채용하였다.

서원의 스승들은 원생에게 대체적으로 원론적인 강령을 제시할 뿐이고, 원생들은 본인의 능력에 따라서 스스로 체득하고 이해했다. 유가의 『육경(六經)』은 서원교육의 중요한 교재였다. 스승은 그 가운데 한가지를 선택하여 중점적으로 강의하는 형식을 취했다. 예를 들면 육구연은 백록동서원에서 강회를 할 때, 『논어(論語)』가운데 ‘군자는 의에 밝고, 소인은 이에 밝다(君子喩於義․小人喩於利)’라는 제목만으로 하였다. 이는 학생 스스로가 터득하게 하려는 데 있으며 결코 경전을 처음부터 끝까지 강의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알려준다.

서원에서는 일반적으로 개인적인 독서 연구를 위주로 하였는데 원생들은 하루 중의 대량의 시간을 독서에 이용하였다. 서원의 스승들은 원생들의 독서 지도에 지극한 관심을 돌렸다. 그들은 학생들의 독서방법 지도를 교수의 중요한 임무로 삼았다. 그들은 본인의 학문을 탐구한 경험에 근거하여 독서지도의 원칙과 절차를 개괄해 내었으며 학생들을 이끌어 독서 자학하게 하였다. 주자는 정성된 마음으로 성실함을 지니고(居敬持志), 순서를 지켜 차례 차례로 진행하고(循序漸進), 정독하며 깊이 사색하고(熟讀精思), 마음을 비우고 넉넉한 마음으로(虛心涵泳), 실제 생활에서 몸소 체험하며(切己體察), 문제에 부딪쳐 힘쓰는(着緊用力) 등 여섯 가지 독서 원칙을 제정했었다. 이 여섯 조목을 정리하면 ‘독서란 정독하며 깊이 사색하는 일’과 ‘실지 생활에서 몸소 체험하는’ 두 조목에 지나지 않는다. 전자는 ‘박문(博文)’이고 후자는 ‘약례(約禮)’이다.(정순목, 1990: 90).

서원에서 독서계획은 강제로 집행되지 않았으며 학습진도는 자신의 역량에 따라 빠를 때도 있고 늦을 때도 있었다. 질의와 토론의 경우에도 학생들의 연찬과 이해의 정도에 따라 일률적으로 진행되지는 않았다. 스승은 때로는 명백한 해답을 내려주기도 했지만, 때로는 전반적인 개략만을 제시하면서 각자 스스로 터득토록 하였다. 토론을 반복하고 결론은 하나만을 강조하지는 않았다.

이 같은 교육방침은 학생들로 하여금, 자기학습․자기연찬․자기실현을 체득하는 것을 위주로 한다. 스승은 옆에서 이끌어주는 학습보조자라는 정신의 표현이다. 이러한 일은 학업상의 표현만이 아니라 수양 면에서도 그러하였다. 즉 학생의 자아수양을 중시하고 스승은 어디까지나 동기 유발자로서 직접적으로 많은 훈시 따위는 하지 않는다. 이러한 자학위주의 정신은 역대의 훌륭한 서원들이 한결같이 하였다.


3. 교육방법 비교


한국과 중국 초기서원 교육방법의 공통점은 두 나라 서원에서 주요하게 강회식, 문답식, 토론식, 자습위주 등 다양한 교육방법이 다루어졌다는 점이다. 강회식 강학은 서원에서 진행하는 가장 기본적인 전통교육방법이었다. 철저한 개별식 문답학습방법도 있었는데 이 교수 방법은 획일적이거나 주입식이 아닌 개인 중심의 문답식이었다. 이 또한 1대 1의 대면학습이기 때문에 능력별 개별학습이 가능하고, 학습진도는 원생들 각자의 능력과 노력에 따라 결정되었다. 토론형식도 있는데 토론은 스승과 제자 혹은 제자와 제자들간에 서로 학문을 토론하고 자신의 소견을 쟁론하는 것이다.

한국과 중국 초기서원 교육방법의 차이점은 한국 초기서원은 강학활동을 서원내에서 벌린 반면 중국 초기 서원의 강학활동은 서원내 뿐만 아니라 점차 서원의 범위를 초월하였다. 중국의 초기서원에서는 본 서원의 스승이 강학하는 외에 늘 다른 서원의 저명한 학자들을 초청하여 강학하는 강회식 강학이 있었다. 강회제도는 시초에는 서원내의 하나의 교육활동에 그쳤지만, 그 후로는 점차 서원의 범위를 초월하였으며 어떤 학자들은 천리 길도 멀다하지 않고 강회에 참가하였다. 강회는 점차 지역성적인 학술활동 집회로 형성되었다.


Ⅴ. 교육평가


1. 한국서원


가. 출석평가

원점절목(圓點節目)은 거재(居齋) 유생의 근타(勤惰)성적을 점수로 (1日 식당출석이 1점) 평정하는 법이나 이 제도는 형식적 법제가 되었을 뿐 그다지 교육적인 실효를 거두지는 못하였다. 이는 일종의 출석기록부이기 때문에 제생들은 출석점수 따기에만 눈을 팔고 교육의 근본 취지를 망각하는 경우가 허다하였으므로 원점부정을 막기 위하여 ‘도기(到記)’제를 병행하도록 하였다(신석호, 1969-1970: 58-59). 도기란 조석 식사 때마다 교수 한 명이 양현고(養賢庫) 직원과 함께 친히 학생을 점검하여 도기에 적어 놓고 봉인하여 월말에 기록하는 것을 말한다(정순목, 1979: 196).

서원에서는 원점제도와 같은 번거로운 출석평가는 없었다. 원래 서원의 설립 목적의 하나가 ‘학제와 관령(官令)의 구속이 없는’ 자유로운 학적분위기를 살피게 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서원에서는 도기제도는 있었다. 일명 ‘식당록(食堂錄)’이라고도 하는 이 도기의 용처는 제생의 출석을 점검하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물품용도의 낭비를 막고자 부득이 마련한 것이었지만 실제로는 제생의 출석을 점검하는 하나의 방편이 되었다(정순목, 1979: 196).


나. 학업평가

조선조의 모든 학교는 관학과 사학을 물론하고 국초에 정한 ‘학령’에 의거하여 운영되었다. 경국대전(經國大典)과 학령은 조선조 문교법전의 정헌(定憲)이다. ‘학령’에는 매월행사․매일행사․독서(讀書)․제술(製述)․강경성적․벌칙 등에 대한 자세한 학칙이 제정되어 있었다(정순목, 1979: 197).

서원은 원칙적으로 ‘학칙과 관의 명령의 구속이 없는(勿拘學令)’이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교육제도 운영상의 문제에 한한 것이고 강학내용의 운영에 있어서는 스스로 「학령」의 준칙이 따랐다. 이것은 서원뿐만 아니라 서당교육에 있어서도 적용되었는데 특히 고과평정법(考課評定法)과 독서지침에 있어서는 관학과 사학에 별다른 구별이 없었다.

먼저 서원교육에 적용되었던 독서․제술의 지침을 알아보기로 한다(정순목, 1979: 197-198).


독서: 먼저 글 뜻을 명백히 하고 응용에 통달할 것.

한갓 장구에 얽매어 문의(文義)를 견제하지 말 것.

늘 사서․오경과 경사를 읽되 장․로․불․잡류 및 백가․자집(子集)은 읽지 말 것.

제술: 과거준비교육이기 때문에 서원에서 드러내 놓고 강조하지는 않았다.

달마다 제술을 한다. 서원에서는 이를 삭회(朔晦)라고 하여 그동안의 학문적 수득을 서로 강론하고 직월(直月)을 개정하였다.

초순에는 의(疑)․의(義)․논(論)을, 중순에는 사(辭)․표(表)․송(頌)․명(銘)을, 하순에는 대책(對策)․기(記)를 짓는다.

제술은 간엄하고 정공(精功)하게 사의(辭意)를 달(達)하면 되고 불미한 문체를 사용해서는 안된다. 글씨는 해서(楷書)로 하여야 한다.


다음으로 강(講)의 성적평가는 대통(大通)․통(通)․약통(略通)․조통(粗通)․불(不)의 5단계 또는 통․약․조․불의 4 단계 평가척도를 사용하였다(정순목, 1979: 198).


대통(大通)은 구두에 밝고 설명에 막힘이 없어서 일서의 취지를 두루 알고, 다른 책에까지 미쳐 매우 밝게 알고 철저하게 통하는 경우이다.

통(通)은 더할 수 없는 경지에까지 이르지는 못하여도 구두에 밝고 설명에 막힘이 없는 경우이다.

약통(略通)은 밝게 알고 철저하게 통하지는 못하나 구두가 분 명하고 사의 가 통거한 경우이다.

조통(粗通)은 구두엔 밝고 사의는 깨달아 일장의 대지(大旨)는 알기는 하나 설명이 미진한 경우이다.

불(不)은 낙제를 말한다.


2. 중국서원


중국 서원의 교육평가는 학업평가에 관한 기록만 있는데 학업평가는 주요하게 시험의 형식으로 되었다. 중국의 서원은 당대로부터 시작되었으며 서원의 시험제도 역시 당대에 시작되었다. 『당육전(唐六典)』의 규정에 의하면 집현전서원의 학사(學士), 직학사(直學士), 시강학사(侍講學士), 수찬관(修撰官), 교리관(校理官), 지서관(知書官)등, ‘고금의 경적(經籍)을 간행하거나 편집(刊輯古今之經籍)’하거나, 또는 ‘방국대전(邦國大典)을 가리기 위해 충분히 고문이 대응’하는 자들이나 ‘문장을 쓰거나 경적을 교정하고 정리’하는 자들이나 매 사람마다 모두 시험에 참가해야 한다고 하였다. 이는 중국서원에서 시험에 대한 최초의 기록이다(『唐六典』 卷 9, 中書省, 文淵閣, 四庫全書 本). 이로부터 중국서원의 시험제도가 명대(明代)에 시작되었다는 설법(盛郞西, 1934: 第5章)은 맞지 않다고 할 수 있다.

시험이 서원에서 하나의 제도로 형성되기는 송대 시기이다. 「명도서원규정(明道書院規程)」5)은 모두 11조로 되었는데 그중 3조가 시험과 관계가 있었다(『景定建康志』 卷 29, 文淵閣, 四庫全書 本). 제1조에서 설명한 것은 초생시험(招生考試)인데 아주 엄격하지는 않지만 합격을 해야 서원에 들어와서 공부할 수 있다는 것이다. 제2조는 평시 제도화된 학업고시이다. 시간, 내용이 있을 뿐만 아니라 평선과 기록의 방법과 규정이 있어서 엄밀함을 보아 낼 수 있다. 제3조는 덕행도의(德行道義) 부분의 시험인데 오늘의 덕육의 범주에 속하며 시험의 결과는 학생들을 출척(黜陟)상벌하는 중요한 근거였다는 것이다. 이로부터 서원의 시험에는 초생입격(招生入格)시험, 학업고과(學業考課)시험과 덕업과찰(德業考察)시험 세 가지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우리는 초생입학과 평시고과 두 가지 시험형식을 주요 표지로 하는 송대서원의 시험제도가 이미 확립되었음을 알 수 있다(陳谷嘉․鄧洪波,1997: 478).


다. 교육평가 비교


한국과 중국서원에서의 교육평가에서 공통점은 모두 관학에서 기원했다는 점이다. 관학시험과 과거시험의 장점을 바탕으로 장기적인 발전 중에서 자체의 특색을 형성하여 시험제도의 중요한 한 부분으로 되었던 것이다.

한국과 중국서원에서의 교육평가의 차이점이라면 한국서원에서는 출석평가와 학업평가로 학생에 대한 평가를 진행했으며 중국서원에서는 출석평가는 없고 시험의 형식으로 학업평가와 덕업평가를 진행했다는 것이다. 한국서원에서의 평가방법에는 출석평가와 학업평가가 있었는데 출석평가에는 원점절목(圓點節目)과 도기와 같은 출석평가방법이 있었고 학업평가에는 강경(講經) 성적의 평가방법인 대통(大通)․통(通)․약통(略通)․조통(粗通)․불(不)이 있었다. 송대 서원에서 교육평가는 주로 시험평가를 하였는데 시험에는 세 가지가 있었다. 초생입격(招生入格)시험, 학업고과(學業考課)시험과 덕업고찰(德業考察)시험이 있었다. 중국서원에서의 덕업고찰시험은 덕행도의 부분의 시험으로 이는 오늘의 덕육의 범주에 속한다고 볼 수 있다.


Ⅵ. 결 론


본 연구에서는 한국과 중국 초기서원의 교육에 대한 비교 연구를 통하여 두 나라 초기서원의 교육과정에서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고찰하는데 목적을 두었다.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본 연구에서는 문헌연구방법으로 한국과 중국 초기서원 교육에 관한 여러 문헌 자료를 교육사적 차원에서 분석하였다. 본 연구의 결과를 종합한 결론은 다음과 같다.

첫째, 한국과 중국의 초기 서원 교육목적의 공통점은 모두 법성현(法聖賢)을 일차적인 교육목적으로 하였으며 현실에 부응하기 위한 과거준비를 부차적인 목적으로 하였다는 점이다. 그리고 모두 주자의 백록동학규를 모범으로 하여 원규를 제정하였으며 주자학의 교육목적인 법성현을 서원의 교육목적로 설정하였다. 차이점은 한국 서원원규는 백록동학규를 모범으로 하였지만 그 운영과 실천방법에 있어서 독자적이었다는 점이다.

둘째, 한국과 중국 초기서원 교육내용의 공통점은 성리학을 근본 교육내용으로 했으며 사장학보다도 경학을 우선시하였다는 점이다. 차이점은 필수교과에 있어 한국의 모든 서원에서는 소학과 사서오경을 필수과목으로 다루었고, 중국의 서원에서는 역경과 사서를 필수 과목으로 다루었다는 점이다.

셋째, 한국과 중국 초기서원 교육방법의 공통점은 모두 강회식, 문답식, 토론식, 자습위주 등 다양한 교육방법이 다루어졌다는 점이다. 차이점은 한국 초기서원은 강학활동을 서원내에서 벌린 반면 중국 초기 서원의 강학활동은 서원내 뿐만 아니라 점차 서원의 범위를 초월하였다는 점이다.

넷째, 한국과 중국 초기서원 교육평가의 공통점은 서원에서 다루어지는 평가는 모두 관학에서 기원했다는 점이다. 차이점이라면 한국 초기서원에서는 출석평가와 학업평가로 학생에 대한 평가를 진행했으며 중국 초기서원에서는 출석평가는 없고 시험의 형식으로 학업평가와 덕업평가를 진행했다는 점이다. 중국 초기서원에서의 덕업고찰시험은 덕행도의(德行道義) 부분의 시험으로 이는 오늘의 덕육의 범주에 속한다.

본 연구에서는 한국과 중국의 모든 서원을 그 연구대상으로 하지 못하고 두 나라 서원 중 초기서원만을 그 주된 연구대상으로 하여 비교하였다. 그러나 한국과 중국의 서원교육을 더욱더 체계적으로 완전하게 이해하기 위해서는 한국은 17세기이후, 중국은 원대(元代) 이후의 서원교육에 대한 비교연구도 곧 뒤따라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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