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량하고 따스한 김호근선생님
상태바
선량하고 따스한 김호근선생님
  • 동북아신문 기자
  • 승인 2007.07.08 0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고 김호근서예가

○ 연변작가협회

오늘 우리는 더할바 없는 비통한 심정으로 고 김호근선생을 추모하게 되였습니다.

김호근선생은 2007년 7월 2일 아침 4시 15분, 이외의 사고로 59세 일기로 갑자기 우리 곁을 떠나셨습니다. 우리 조선족문단은 문인들의 훌륭한 벗이며 인자한 선배를 잃었습니다. 이는 우리 작가협회, 나아가서는 우리 조선족문단의 커다란 손실입니다. 이로 하여 우리는 비통한 마음을 금할수가 없습니다.

김호근선생은 1948년 1월 5일, 화룡의 가난한 교육가의 가정에서 태여났습니다. 중소학교를 졸업한 후 파란 많은 문화혁명의 세례속에서 화룡현 숭선향으로 하향을 하였으며 1972년에 연변대학을 졸업하고 오늘의 《연변문학》전신인 《연변문예》의 문예편집으로 사업을 시작하여 편집부 주임, 부주필 등 직을 력임하였습니다. 1982년 3월 2일에는 영광스럽게 중국공산당에 가입하였습니다. 1997년에는 사업의 수요로 연변작가협회에 전근되여 연변작가협회의 제7기주석단의 상임부주석 겸 비서장, 당조성원 등 직을 맡았습니다. 그리고 연변조선족서화학회 리사, 비서장, 부회장 등 직을 맡았고 조선글 서예가협회 예술고문, 연변웅변가협회 주석, 중국현대청년서화가협회의 부회장 등 직을 력임하였습니다.

김호근선생은 20여년동안 《연변문학》에서 문예편집으로 일하면서 우리 조선족문학의 발전을 위하여 무려 3천여만자에 달하는 문학작품을 편집하였고 3백여명의 문학인재들을 양성하였습니다. 선생께서 편집출판한 작품들중 중앙급문학상에 6편(부), 성급문학상에 6편(부), 주급문학상에 52편(부)이 수상하였습니다. 선생께서 《연변문학》의 주요한 직책을 담당하고있던 기간에 《연변문학》의 전신인 《천지》는 《길림성10대우수간행물》,《동북3성사회과학우수간행물》의 영예를 받아안았으며 1993년과 1996년에는 전국소수민족문학《원예사》상을 수상하였습니다.

김호근선생은 문학편집으로 사업하는 동안에도 수많은 작품을 창작하였습니다. 근 2백여편(수)에 달하는 소설, 산문, 수기, 시작품들을 발표하였으며 4백만자에 달하는 중외명작들을 번역출판하였습니다. 이러한 문학성과로 하여 주급이상의 문학상을 3차 수상하기도 하였습니다.김호근선생은 연변작가협회에 전근되여온 후 연변작가협회의 문학사업에 혼신을 다 하였습니다. 8차에 이르는 《천지물줄기》 대형문학행사를 주최하고 조직하였으며 한문판으로 된 《20세기조선족문학정수》와 조선문판으로 된 《조선족작품정수》의 번역, 편집, 출판에서 주요한 사업을 하였습니다. 그리고 연변작가협회의 기타 문학활동에서도 조직능력과 사업열정을 남김없이 발휘하였을뿐만 아니라 사업일선에서 물러난 후에도 병이 있는 몸으로 숭선에서 문학창작기지를 건립하는데 최선의 노력을 하여왔습니다.

김호근선생은 문학사업에서뿐만 아니라 서예와 사회활동에서도 혁혁한 성과를 이룩하였습니다. 선생께서는 조선글 서예에서 자기의 독특한《단천제》를 창조하였으며 조선글 서예를 중국 나아가서는 세계에 알리는데 커다란 공헌을 하였습니다. 1990년부터 선후로 중국, 조선, 한국, 로씨야 등지에서 무려 14차에 달하는 개인서예전을 가졌습니다. 그리하여 세계서예대상컵대회에서 금상을, 《국제서예명인상》 등 세계급우수상을 수상하였습니다. 또한 《국제서예예술명인증서》를 수여받았습니다. 김호근선생의 서예작품과 생평은 《중국당대서화전각가사전》, 《중국당대서예가명가대사전》, 《중국서화금석가대사전》, 《중국서예가대사전》, 《중국명인록》 등에 수록되였으며 그의 서예작품은 《한림비원》에 석각으로 조각되였고 중국산동성 유방에서는 《단천김호근서예원》을 건립하였습니다.

김호근선생의 일생은 우리 민족의 문학사업과 민족문화의 발전을 위하여 분투해온 일생이였습니다. 사업에서는 언제나 한몸 아끼지 않고 앞장에 나섰고 생활에서는 언제나 겸허하고 성실하였습니다. 직장에서는 동료들의 친구이고 선생이였으며 사회에서는 정열적인 사회활동가였습니다. 선량하고 따스한 선생의 인격적인 매력은 선생을 가까이에 두고있는 모든 사람들의 귀감이였습니다.

오늘 우리는 우리 민족의 저명한 문학편집인이며 작가이며 서예가이며 문학사업활동가이며 우수한 공산당원인 김호근선생을 잃었습니다. 이는 우리 민족의 커다란 손실이며 우리 민족문학사업에서 미봉할수 없는 손실입니다.

오늘 김호근선생은 우리 곁을 떠났지만 선생의 고상하고 겸허하고 선량한 품덕은 우리들의 마음속에 영원히 남아있을것이며 선생이 평생 심혈을 다바쳐 남긴 업적은 우리 조선족문학과 조선족문화의 터전에서 새로운 생명으로 자라날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김호근선생의 넋을 민족의 이름으로 길이길이 전해가고 기릴것이며 잊지 않을것입니다.

고 김호근선생님, 고이고이 잠드시라!

보살같은 사람

7월 2일 내가 신문사에 출근하여 일각의 시간이 지났을가 말가 할때였다. 나의 핸드폰이 갑자기 울렸다. 핸드폰을 귀에 가져다대니《형님, 나 광훈이요.》하는 석쉼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전임 연변작가협회 부주석 우광훈을 아우처럼 생각하고있기에 《아우님, 오늘 또 무슨 기쁜 소식이 있는 모양이구나. 아침에 다 전화를 걸어오는걸 보니...》하고 반갑게 웃음섞인 목소리로 말하며 전화를 받았다.

《형님, 오늘만은 기쁜 소식이 아니예요. 우리 김호근부주석이 오늘 새벽에 돌아갔습니다.》

《뭐라구?! 김호근선생이 돌아가셨다구? 무슨 병으로 갑자기 돌아갔는데...》나는 말문이 막혀 꺽꺽거리였다.

《김호근선생이 비명으로 돌아갔습니다.래일 아침에 장사를 치르니 형님, 그렇게 알고계세요.》

내가 우광훈의 부고전화를 받은 정확한 시간은 7월 2일 8시 20분이였다. 청천벽력같은 사망소식을 접하고 나는 어안이 벙벙하였다. 눈앞이 캄캄해보였다. 창밖으로 보이는 태양이 차겁게 느껴졌다. 우리 료녕조선족문학의 발전에 많은 기여를 하신 김호근선생, 근 40년 가까이 소설가로 편집인으로 서예가로 조용히 민족문화에 헌신하고 마음이 어질기로 보살같은 사람이 환갑을 눈앞에 두고 영영 이 세상을 떠나다니, 다재다능한 착한 사람이 비명에 돌아가다니 나는 아무리 애써 마음의 평형을 잡으려 해도 되질 않았다. 나는 일손이 잡히지가 않았다.

나는 김호근선생의 부고를 듣고 그 즉시로 심양에서 연길로 가는 기차에 몸을 싣고 열세시간이나 달렸다. 만약 장례식에 참가하지 못한다면 내 마음이 불안해서 못견딜것만 같았다.이 열세시간은 나한테 있어서 너무나 지루하게 긴 시간이였다. 당장이라도 연길에 도착못하는것이 안타까웠다. 원래 수면을 잘 하던 나였지만 그날밤만은 온 밤을 뜬눈으로 보냈다. 20세기전까지만 하여도 우리 료녕성의 조선족 문인들은 이러저러한 원인으로 연변작가협회와의 거래가 좀 멀었다.

2002년 8월 1일 심양조선족문학회 기관지 《료동문학》제 3집 출간기념회에 당시 연변작가협회 부주석겸 비서장으로 있던 김호근선생이 료녕을 찾아주셨다. 그이는 료녕의 조선족작가대오를 춰세우는데 심혈을 기울이고 료녕창작위원회를 우수 창작위원회로 부상시키는데 마멸할수 없는 기여를 하였다.

김호근선생은 2년전 연변작가협회의 지도직을 내놓고 2선으로 물러났다. 당시 한국의 한 기업인은 중국조선족 작가의 집을 마련하여주겠다고 후원금을 선뜻이 내놓았다. 김호근선생은 이보다 더 보람찬 일이 어디 있느냐고 하면서 우리 민족의 창작기지를 세우려고 혈혈단신 화룡시 숭선향 심심산골인 시만촌에 들어가서 건축에 바삐 돌았다. 아무런 보수도 받지 않으며 근 2년이란 세월을 그 산골에서 보냈다.

내가 작년 10월중순 시만촌에 찾아갔을 때 작가의 집은 이미 우리 민족풍격으로 덩그렇게 일떠섰는데 김호근선생의 몸은 말이 아니였다. 반쪽이 되여있었다.

김호근선생은 그때 만남에서 몸의 고생보다 마음의 고생이 더 크다고 실토정을 했다. 조선족작가의 집 마련을 위한 자금이 한국에서 제때에 조달되지 않아 자기 호주머니를 털어 돈을 처넣으며 아무 보수도 받지 않으며 일해왔는데 어떤 사람은 자기가 한국 기업인을 업고 돈을 많이 챙겼다고 퍼뜨린 소문에는 미칠것 같다고 하소연을 했다.

내가 한국 기업인과 먼 친척이 되는만큼 작가의 집 건축에 오고간 경비상황은 누구보다 내가 잘 알고있다. 김호근선생이 지금껏 작가의 집을 건축하며 수고비를 받기는커녕 개인자금까지 털어넣고있다는것을 손금보듯 잘 알고있다.

사람이 애매한 루명을 쓰게 될 때 그처럼 가슴 아픈 일을 자기가 체험한 사람이여야 알수가 있다. 나는 김호근선생이 생전에 나하고 억울해서 하소연하던 그 정경이 지금도 아프게 내 가슴에 와닿는다. 보살같은 사람, 량심적인 문인 김호근선생님이시여.

고이 잠드시라!

멋진 동생, 왜 그리 급히 갔나?

○  방룡주

김호근동생은 나를 늘 누님이라 불렀다.《누님》이란 호칭이 너무나 다정하게 느껴져서 다른 문인과는 달리 깊은 정을 느꼈고 동생처럼 허물없이 보내는 사이였다.

한번은 한국의 서예가가 그에게 산삼 50뿌리를 부탁했다. 시간이 급해 그는 다급히 나에게로 전화를 걸어왔다. 그런데 그 많은 산삼을 어떻게 하루 사이에 얻어낸단 말인가. 나는 이곳저곳에 수소문해 직접 산삼을 캐는 한족심마니들로부터 산삼 70뿌리를 얻었다. 그 중에서 좋은 걸로 50뿌리를 골라 주면서 랭장고에 0―3도 온도에서 잘 보관하라고 부탁했다. 그런데 그는 아직 랭장고가 없다고 말했다.

《아니! 작가협회 부주석이 랭장고도 없다니!》 라고 했더니 그는 허허, 하고 사람좋게 웃으면서 《그렇게 됐수다! 누님, 하나 사주시구려.》 라고 허물없이 롱담을 했다. 그 웃음이 아직도 귀에 쟁쟁하다. 그때 내 가슴에서는 눈물이 흘러내렸다.   그는 정이 많은 사람이여서 늘 동생들을 돌보고 생활이 어려운 작가들에게 따뜻한 손을 내밀어 도와주곤 했다. 80년대에 《연변문예》월간사 부주필로 있을 때 생활이 어려운 농민작가들이 많았는데 그는 늘 자기 호주머니를 털어서 그들을 방문했다. 차룡순작가가 병석에 누웠을 때 그는 몇몇 농민작가들과 함께 병문안을 가면서 자기 한달치 생활비를 서슴없이 내놓기도 했다. 정이 많은 그는 나를 누님이라고 한국에 방문갔다올 때마다 선물을 가져오곤 했다. 비록 작은 핀이라든가 돈지갑 등 사소한 물건이지만 나는 그에게서 친동생같은 혈육의 정을 느꼈다.

한번은 우리 《단풍수필회》 회원들이 점심식사를 하고 노래방에 간적이 있다. 내가 목청을 높여 《내가 살아가는 동안에 할 일이 또 하나 있지...》라는 노래를 부르는데 그가 나의 어깨를 잡으며 말했다.

《누님! 살아가기가 참 힘들지요?》라고 했다. 인생을 살자면 누구든 힘든 일이 있다. 그에게는 어떤 힘든 일이 있었는지 지금 생각해도 가슴이 아프다. 하지만 그날 나와 함께 열창하는 그는 목청이 웅글고 높았고 기운에 넘쳤었다. 그런 그가 갑자기 가다니...

내가 호근동생을 마지막으로 본건 아마도 이번 제8차회원대표대회때였을것이다. 나는 그의 수척해진 얼굴을 보고 깜짝 놀라 그를 구석쪽으로 데리고 갔다. 《왜 이렇게 야위고 망가졌어? 퇴직하면 편안히 쉴것이지 왜 그런 산골에 가서 갖은 고생을 다 하는거요?》 라고 했더니 《글쎄말이우, 내가 바보인가봐.》라고 그는 기운이 없어 보이는 얼굴에 미소를 띠며 말했다. 그 처량했던 모습이 아직도 기억에 생생하다. 우리 문인들가운데 깊은 골안에 가서 《작가의 집》을 짓느라 온갖 고독과 고생을 다 감내하면서 자기를 희생하는 문인이 몇이나 있을가.   늘 자기를 나타내지 않고 숨은 노력을 하는 멋진 사내였고 유모아적이면서도 엄숙하고 늘 자기를 희생할줄 아는 인간다운 인간이 바로 김호근이다.

그의 장례식장에 가면서 그가 이 세상에 없다는 생각을 하자 슬픔이 밀려들어 저도 몰래 눈물을 금할수 없었다. 왜 우리에게 소중한 사람은 이처럼 빨리 떠나는지...

그는 오직 남을 위하는 일에 자기를 많이 바쳤으니 그쪽 세상이지만 천국에 갔을것이라 굳게 믿는다.

그는 우리 마음속에 늘 살아 있을것이다.

김호근과 《정》

○  로문수

날마다 책상머리에 걸어놓은 《정(情)》자를 볼적마다 나는 고마운 마음으로 김호근선생을 떠올리군 한다.당대 세계 저명한 10대 예술가의 일원으로 선정된 저명한 서예대가 김호근선생은 언제나 정을 무엇보다도 귀중히 여기는 사람이다.《정》자는 김호근선생의 서예작품중 정품의 한점이다.나는 사무가 바쁜와중에도 이따금씩 《정》자의 작품을 쳐다보면 자기도 모르게 정신이 팔려 감상에 젖어 있다.인간사회에서 가고 오는 정이 있어야 조화로운 분위기를 만들 수 있다.

지난 4월 4일 저녁 우리 통화지구의 문인 일행은 연변작가협회 제 8차회원대표대회를 끝마치고 역전에 나왔다. 김호근선생은 연변작가협회를 대표하여 우리를 바래주러 역전까지 따라나왔다. 그런데 생각밖에도 김선생은 자기의 서예작품 《정》자를 우리한테 선물하지 않는가! 우리 일행은 너무나 고마워 어쩔바를 몰랐다. 으스러지게 악수하는 작별의 시각, 눈시울이 뜨거워났다.

김호근선생과의 만남은 이번이 세번째로 기억된다.첫번째는 2000년 9월 4일로 기억된다. 우리 통화지구 작가대표 일행 6명이 연변작가협회를 방문하고저 연길로 찾아갔을 때였다. 그날 저녁 8시반, 당시 연변작가협회 부주석인 김호근선생님께서 우리를 마중하러 역전에 나왔고 작가협회의 다른 분들은 저녁식사도 하지 않고 우리를 기다리고있었다.

그 이튿날부터 김호근선생은 아예 우리를 데리고 《연변녀성》잡지사, 《연변일보사》, 《소년보사》, 《연변대학》, 《룡정시문화관》, 《룡정조선고중》등 기관을 참관시켰다. 가는 곳마다 김호근선생은 업여촬영사가 되여 우리에게 기념사진을 남겨주었고 가는 곳마다 대범하고 다정다감하며 유모적인 성격을 감추지 않았다. 너무도 열정적이고 멋있는 사나이였다.9월 9일 우리가 떠나는 날이였다. 우리 일행은 김호근선생의 그 따뜻한 배려에 다들 눈시울이 뜨거워날 지경이였다.그날 우리가 떠나는 차 시간은 오후 2시였다. 그런데 김호근선생은 꼭두새벽부터 사모님을 서시장에 보내여 찰옥수수를 사다가 삶았고 도시락 여섯개에다 오이, 고추장, 구운 명태, 락화생, 일념감, 소주까지 크게 두 보따리를 들고 급히 역전으로 달려왔다.우리 일행은 넘치는 정에 목이 메여 어쩔바를 몰랐다.

《시간이 짧아서 구경도 많이 못했는데 섭섭하게 생각하지 말고 즐겁게 가시고 다음번에 다시 만납시다.》

김호근선생은 그 큰 키에 허리를 구부정해가지고 우리와 일일이 악수를 나누었다. 후에 알고보니 김호근선생은 중한수교 10주년 기념행사에 한국 울산 김호근서예전을 준비하느라고 시간이 촉박했던것이다.나는 김호근선생의 《서예작품선》에서 돋보이게 새겨진 좌우명을 찾아냈다

《부끄럼 없는 인생을 살리라》, 《속도 겉과 같이 남도 나와 같이 끝도 처음과 같이》, 《믿음 소망 사랑가운데서 사랑이 으뜸이여라》

이 아침에 갑자기 김호근선생님의 사망소식을 접하고 나니 눈물이 앞을 가린다.나는 슬며시 김호근선생님께서 선물하신 《정》자를  한품에 안아본다...

길림신문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
이슈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