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에서 무역 건으로 약 2개월 고려호텔에서 묵으면서 북한 어디나 할 것 없이 거의 다 돌아다니며 현지 조사하였다.
매일 합리한 스케줄 하에 모든 계획들이 잘 실행되어 갔다. 그런데 가장 어려운 점이 2가지이다.
한 가지는 모든 자원이 국가의 것이므로 어느 회사마다 다 자기들이 이 아이템을 할 수 있다고 한다. 그럼 도대체 어느 회사와 계약을 맺어야 하는지 감이 오질 않았다.
예하면 신덕샘물 중국총대리점 계약을 맺어야 하는데 어느 회사가 가장 합당한지를 모르는 것이다. 회사마다 다 자기들이 할 수 있다고 하니 답답하지 않을 수 없다.
다른 한 가지는 국제 전화를 마음대로 쓸 수 없는 것이다. 반드시 고려호텔에서 국제 전화를 해야 하고 팩스를 보내야 한다.
그런데 한참 줄 서서 기다려야 하고 전화비 또한 만만치가 않다.
팩스 한 장 중국으로 보내는데 10달러이다. 팩스 한 장 받는데도 2달러이다. 그러다 나니 2개월간 국제 전화비만 몇 천 불이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홍콩으로 팩스2장 보냈는데 영수증을 보니 생대 측 팩스번호가 잘못 찍혀 있었다. 나는 팩스 보낸 아가씨에게 잘못 보낸 것 같다고 말하였는데 아가씨는 다시 한 번 번호를 대조해 보더니 얼굴이 흙빛이 되어 말도 제대로 못하는 것이었다. 확실히 팩스번호를 잘못 누른 것이었다.
아가씨 말에 의하면 팩스 잘못 보내면 그 손해비용을 자기가 물어 주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팩스 2장이면 20불인데 당시 암거래시장에서 딸라 1불에 북한 돈180원 정도였으니 3600원을 물어주어야 한다. 이는 약 5-6년 노임에 해당되었으니 말이다.
나는 다시 보내는 팩스 비용을 물어 주겠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하였다. 아가씨는 너무도 고마워 울먹이는 목소리로 “제가 오늘 귀인을 만났으니 다행입니다”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당시 중국이 금방 개방한 상황이었으니 북한은 더 말할 것도 없었다. 그런데도 고려호텔 지하 무도장에는 날마다 사교무 춤을 추느라 많은 사람들이 붐비었다. 호기심에 한 번 들어 가 보았더니 고려호텔 수십 명 직원 아가씨들이 손님과 함께 춤을 췄었는데 그렇게 예쁘고 또 그렇게까지 사교무를 잘 추는 건 처음 구경하였다. 모두가 일등 배우들이었다.
중국으로 귀국하기 전 기념품 좀 사려고 나는 평양 제1백화점에 들리었다. 단가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낮았다. 그런데 정작 사려고하면 모두가 표(구매권) 놀임이었다. 정부에서 발급한 무슨 표 가 있어야 판다는 것이었다.
피아노 값이 북한 돈 2만 원 정도였으니 달러로 하면 110불 정도로 공짜와 다름이 없었다. 그런데 표가 없으니 살 수가 없었다.
그래서 북한에서는 친구, 친척, 또는 상급에 선물할 때 물건으로 하는 것이 아니고 표를 선사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피아노 제외한 기타 악기는 표가 없어도 살 수 없었다.
나는 악기를 워낙 좋아 했으니 종류마다 한 개씩 20여 가지를 샀다. 모두 계산해 보니 달러로 100불 정도도 안 되었다.
우리 일행은 계획보다도 훨씬 더 많은 무역, 합작, 합영 등 계약서를 체결하고 귀국의 길에 올랐다.
평양에서 청진으로 나가는 열차에 일부러 국제 열차바고니를 하나 달아 우리를 타게 하였다.
무산 세관을 통과 할 때었다. 우리들의 짐은 엄청나게 많았다.
끌어 모은 샘플만 해도 진짜 가관이었다. 그런데 이 짐을 다 풀어 하나하나씩 검사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아마 몇 시간은 걸려야 될 것 같아 나는 난감하기 그지없었다. 두만강 건너로 우리를 마중 나온 차가 서 잇는 것이 보이니 말이다.
나는 갑자기 무슨 생각이 번쩍 들었다. 나는 세관인에게 이것부터 검사해 주십시오. 라고 하면서 나의 핸드백을 넘겨주었다. 그 안에는 인조 수정알 샘플이 많이 들어 있었다. 세관인은 “이것이 무엇입니까?”하고 묻자 나는 “아주 값나가는 것이면 못 가지고 나가는데…”라고 하더니 가방 속에 있는 붉은 가위로 되어 있는 선물 명세서를 펼치었다. 그 순간 그는 자리에 굳어져 버렸다. 그는 얼굴이 벌겋게 상기되더니 금방 사무실로 들어갔는데 조금 후에 세관장님이 두 손에 그 선물명세서를 받쳐 들고 나왔다. 그리고는 우리 일행을 응접실로 모시고 커피 대접을 하였다. 세관장님은 수령님한테서 선물을 받은 경과를 간단하게 물어 보더니 우리를 아주 우러러 보는 기색으로 “선생님은 우리 조국의 공신입니다. 대단하십니다. 자주 오십시오”라고 하더니 검사고 무어고 말도 없이 자기들의 차로 우리 짐을 싣고 두만강 물을 건너 중국 측에 건너와 마중 나온 우리 차에 짐을 실어주고 돌아갔었다.
약 2달간의 평양 방문은 나의 인생에 깊은 인상을 남겼다.
그 후 나는 무역 건으로 10여 차레 북한으로 드나들었다.
심천통세달수출입회사
대표 허영섭
심천에서 집필
2007/06/1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