졸정원(拙政園)의 나무숲이 흔들리고 있다.
오랜 정자(亭子)와 명귀한 화초는 커녕 그럴듯한 참대나무 한그루 보이지 않는다. 높다라니 자란 수삼나무와 동청나무 그외 이름 모를 평범한 나무들만이 까칠한 푸른 꼭대기를 내보이는 거기가 바로 내가 바라보는 풍경이요, 내게 익숙한 졸정원이다.
그 하나의 원림에 붙은 《세계문화유산》이나 《중국4대원림》이란 거창한 이름이 나에게는 그다지 중요하지가 않다. 나를 감동시키는것은 그 안의 한그루 과일나무일수도 있고 갑자기 어느 숲에서 날개를 푸드덕이며 날아가는 한마리 새일수도 있다.
오래도록 풍경을 느껴보지 못했다.
가끔은 지루한 일상에서 벗어나고저 멀리 려행을 떠나기도 하지만 정작 목적지에 이르고 보면 실망부터 느껴지고 그렇다할 추억거리 하나 없이 피곤한 마음으로 돌아서기가 일쑤다.
어쩌면 풍경 하나에 많은 것을 바라는 자체가 욕심이 아닐까.
풍경 하나에 붙은 이름이 거창할수록 우리는 그곳을 다녀간 고금중외 려행객들의 어찌어찌 좋다는 인식속에 애써 자신을 밀어넣으려 한다. 설사 풍경이 정말로 그렇게 좋다 할지라도 왜 그렇게 좋았던지 어느 누가 웃으며 말할수가 있으랴. 아무리 훌륭한 곳이라 하여도 나까지 꼭 그만한 감동을 받으라는 법은 없다. 푸른 호수에 밝은 해살이 눈부시게 쏟아져도 내 마음에는 바람이 불어 갈대가 부러지고 여기저기 꽃들이 제 아무리 좋아라 웃으며 피여나도 시방 애매한 벌레라도 마구 짓밟고 싶도록 짜증이 나는걸 낸들 어쩌랴.
금붕어같이 현란한 뒤모습을 보이며 나에게서 멀어지는 풍경, 그러나 나는 내 시야에 비껴오고 내 청각속으로 흐르던 내가 느끼지 못했던 그 많은것을 기억하고저 한다. 스쳐지난 그 수많은 것을 한줌의 모래와같이 조금씩 떠다 쌓아두면 거기 맞춤한 해빛이 내리쬐고 그리고 또 한줄기 비가 내려 언젠가 싹이라도 트지 않을가, 꽃이라도 피지 않을가.
아카시아꽃이 만발하던 날, 어느 한적한 시골마을의 오솔길에서 바라보던 여름바다를 나는 아직 기억하고 있다. 거기 해변가는 어지럽고 황혼빛이 물드는 저녁무렵에 인적마저 드물었다. 그렇다할 풍경마저 없던 그 곳에는 단지 커다란 바위 하나만 침묵을 지키고 있을뿐. 외로운 새 한마리가 날개를 접고 있던 바위, 생계를 위해 바다로 나간 어민들의 흔적외에는 아무것도 찾아볼수 없던 곳, 전혀 개발도 되지 않는 그 바다가에서 나는 그 계절 무엇이 그리도 슬펐을가.
바람이 스쳐갈때 바위는 엄마의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파도가 황혼의 정적을 깨뜨리며 쏴—하고 부서질때 바위는 문득 아버지의 모습이 되여 나타났다. 때로는 언변이라곤 없는 친구같이 안타까이 침묵을 지키며 바라보기도 하고 거무칙칙한 그것이 갑자기 투명해지며 나를 비추는 거울이 되기도 했다.
그러다 바위는 다시 바위가 된다. 그밖의 어떠한 이미지도 부여되지 않은 모양새 없고 투박한 그런 바위로 돌아온다. 그 바위가 온 여름이 지나도록 나를 끄당긴 리유를 나는 모른다. 그것은 나에게 어떠한 행운도 가져다주지 않았고 그럴듯한 방향이나 예감마저 가르쳐주지 않았다.
그러나 바위를 보고 있으면 내 마음은 이상하리만치 편해지고 있다. 언젠가 Y시에서 나를 찾아온 고향친구, 맨발바람에 슬리퍼를 신고 서너시간동안 기차를 타고 나를 찾아온 그 친구처럼 바위는 물에 흥건히 젖어있고 바위에는 모래가 가득 묻어있다. 그것은 오래전 어디에서 만나진듯 익숙하면서도 그 속에 내가 있고 내 속에 그것이 있듯 우리는 서로 이질감을 느끼지 못한채 융화되여 있다. 그쯤 내 마음속에는 크지도 작지도 않은 그만한 파도와 모래톱, 그리고 바위가 있었을가.
쉽게 다가설수 있고 떠나면서 웃을수 있던 곳, 바위를 떠나던 날 비는 내리지 않았다. 그러나 나의 또다른 긴 려행은 어쩌면 거기서부터 다시 시작되였는지도 모른다. 이 세상 어딘가에 다시 내가 원하는 만남은 있으리라는 생각, 그것은 무한한 설레임으로 나를 흔들고 있다.
이렇듯 빛나는 세상, 새가 되여 날수 있는 하늘, 뱀처럼 미끌수 있는 땅, 노루가 되여 바라볼수 있는 언덕과 락타처럼 외로운 사막, 승냥이같이 울부짖고 여우처럼 빛나게 웃을수 있는 그런 수림은 없을가.
후조(候鳥)처럼 계절이 바뀔때마다 나는 무엇인가 찾아 먼 길을 떠나군 했다. 그러나 오만한 연인과도 같이 풍경은 그리 쉽사리 만나주질 않았다. 어쩌면 레루우를 달리는 렬차처럼 그 많은 산과 물과 나무를 쉽사리 그렇게 흘러보내야만 했을가.
지금 나는 오랜 정원의 변두리에 서있다.
량반집 규수처럼 아름답고 도고한 여기 원림(園林), 그 안의 명귀한 화초들을 나는 이름을 댈수 없고 액자속의 서예작품도 그 깊은 뜻을 헤아릴 길이 없다. 그것은 슬그머니 내 자존심을 건들어 웬지 모르게 나를 우울하게 만든다.
애써 무엇인가 보고 듣자고 해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고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다. 어쩌면 환히 들여다 보이는것 같기도 하고 순간적으로 나에게로 불쑥 다가오는것 같기도 한 거기는 내가 뛰여 넘을수 없는 유리로 된 담벽이라도 있는걸까.
이 시각 풍경은 어쩌면 나를 거절하는지도 모른다. 풍경이 워낙 그렇게 멀리 있는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여기는 틀림없는 나의 주소. 매일같이 나는 그 뒤골목의 작은 오솔길을 걸어 출퇴근을 해야 하고 나에게로 오는 우편물도 어김없이 여기 주소가 적혀있다. 풍경은 어느새 나에게서 멀어져가고 나는 어쩔수없이 그 변두리를 방황하는 직장인이 되여있다. 아침해가 솟을때와 땅거미가 질 무렵 고루한 정자와 아름다운 화초는 보이지 않는다. 대신 울퉁불퉁한 좁은 골목길과 정원을 감싼 흰 담벽, 그 벽을 신나게 타고 오르내리는 담쟁이 풀과 사무실이 있는 3층 베란다에서 내다보이는 들쑹날쑹한 나무 숲이 있다.
가끔 누구의 말씀이 조용히 내 걸음을 멈추게 한다. 얼핏 보면 바람속의 먼지나 풀잎우의 벌레같이 작고 미세한 기척, 구경 무엇이 이렇듯 작은 목소리로 나를 부르고 있는 것일가. 내가 좋으리라고 생각했던것, 좀더 시간을 갖고 만나고 싶었던 것이 그때면 조금씩 나에게로 다가오는 것을 느낀다.
어느날 불쑥 담벽사이로 내민 누군가의 손을 잡았다. 금방 일을 마친 사람의 손처럼 터실터실하지만 정이 가는 손.
흙탕물이 튕긴 바지가랭이와 비물에 젖은 셔츠, 뜨거운 땀이 흐르는 웃는 얼굴과 바람에 흩날리는 빛나는 머리카락… 나는 내곁을 스치는 아름다움에 순식간에 소름이 끼친다.
이제 바람이 불어 나무들이 쏴—하고 소리를 내면 나는 그속에서 꽃이 피고 나비가 나는것을 알수 있고 정자의 검은 기와를 타고 흘러내리는 비방울소리를 들을수 있겠지.
꽃은 나에게 그 이름을 부르도록 강요하지 않았다. 새들은 나에게 그 노래를 따라 부르라 강요하지 않았다. 정자(亭子)는 오만하지 않고 호수는 시종 침묵을 지키고 있다.
그러나 풍경은 어느새 피여있고 비가 올듯말듯하는 자그마한 돌다리우에서 나는 내곁을 맴도는 천국의 향기를 맡았다.
그날이 어느날인지 나는 기억하지 못했다. 다만 내 친구에게도 산이 있고 물이 있고 나무가 있음을 알았다.
오늘 같이 바람부는 날, 눈보라속에 사라져간 황산의 송객송(送客松)을 위해 나는 우정(友情)의 눈물을 흘린다. 그처럼 한번도 만나지지 않은 많은 것을 그리워한다.
이진화: 중국 소주 거주.
연변작가협회 회원. 중단편소설, 수필 수십편
'연변문학' 문학상, '도라지문학'상 등 수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