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4. 문익환목사 방북사건을 보며
내가 한창 경실련을 준비하고 있던 때인 1989년 봄에 문익환 목사님의 방북사건이 발생했다. 나는 88년에 기사연 원장으로 있을 당시 주사파가 주도하던 통일운동을 바라보면서 ‘통일운동이 참 문제구나, 운동권이 저렇게 나가면 안 될텐데’하며 걱정했었다. 그런데 다음 해 문익환 목사님의 방북사건이 터진 것이다.
이 사건 이후 우리사회의 분위기가 급변하였다. 87년 6월 항쟁 이후 우리사회를 풍미하던 진보와 개혁의 분위기가 꺾이고 보수반동의 분위기가 사회를 뒤덮게 되었다. 그동안 진보와 개혁의 분위기를 대변하던 언론들도 문목사님의 방북사건을 계기로 보수반동적인 논조로 돌아서 버렸다.
나는 처음에는 문 목사님을 변호하는 입장이었다. 나는 문 목사님에게 개인적으로 깊은 애정을 갖고 있었고, 정신적으로도 무척 가까웠다. 게다가 문 목사님의 방북 과정에서 해외동포회의에서 주장한 통일방안 중 몇 가지가 관철된 것도 있었다. 또 내가 알기로 문목사님은 NL계열인 소위 주사파가 갖고 있던 통일에 대한 입장을 그대로 갖고 계시지는 않았다. 문 목사님은 통일문제에 대해 상당히 자주적이고 창조적인 입장을 갖고 계셨는데, 이를 테면 남한 정부에서 주장하던 통일방안인 유엔동시가입이나 교차승인론 조차도 ‘우리가 자주적인 통일 의지만 갖고 있다면 그 안을 받아들여도 분단고착화로 가지 않고 통일을 향한 디딤돌이 될 수 있다’는 주장을 폈던 분이다.
그러나 우리 국민의 문익환 목사 비판은 아주 분명했다. 그런 모습을 보면서 나는 ‘문익환 목사님의 실험이 왜 실패했는갗를 가지고 고심했다. 고심 끝에 나는 국민의 마음이 변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과거 군사독재 하에서는 우리 국민사이에 합법적인 운동만으로는 변화가 불가능하며 긴급조치를 위반하더라도 정부에 저항하고 항거해서 독재를 무너뜨려야 한다는 광범위한 공감대가 있었다. 이 때문에 많은 사람이 법을 위반하면서 민주화운동에 나섰고 이들이 감옥을 가더라도 우리국민은 이들을 민주인사로 적극 추앙했다.
그러나 일단 87년 6월을 거치면서 우리사회가 민주화과정에 들어가게 되면 국민의 생각이 바뀌게 되었다. 이제는 평화적이고 합법적인 방식으로 우리 사회를 고쳐나가야 된다는 생각이 국민들의 광범위한 공감대가 된 것이다.
우선 우리국민은 이제는 일상생활에서 정치적인 억압을 전혀 느끼지 못한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도 그럴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니까 학생들이 여전히 화염병을 던지고 미국과 노태우정권은 물러가라며 극단적인 투쟁을 하는 것을 국민은 전혀 이해할 수 없게 된다.
그런 상황에서는 사회운동이 종래와 같은 과격한 방식으로 운동을 계속하면 국민들로부터 소외되고 고립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이러한 국민의식의 변화를 정확하게 읽고 그에 맞는 운동을 전개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바로 이 점이 문 목사님의 방북사건을 반성하면서 깨달은 점이었다.
이제는 비합법투쟁은 국민이 지지하지 않는다. 이제는 우리 사회가 허용하는 방식으로 합법적으로 운동을 전개하지 않으면 안되게 된 것이다.
이를테면 멍석을 깔아놓고 씨름을 하라고 그러는데 그 씨름꾼이 멍석 안에서 씨름을 하지 않고 멍석 밖에서 씨름을 하려 한다면 관중들은 그것을 보고 ‘야, 멍석 위에서 씨름해라’며 야유를 보내게 된다. 이럴 때에는 씨름꾼은 멍석 위에서 씨름을 해야 한다. 그리고 멍석이 너무 작아 자꾸 바깥으로 튕겨나가게 되면 그때서야 관중들은 ‘멍석이 너무 작으니까 큰 멍석으로 바꿔야겠구나’하는 생각을 하게 될 것이다.
그래서 법이 문제가 있어도 일단 그 법을 지키면서 운동을 해야 한다. 그렇게 되어야 법이 무슨 문제가 있는가를 국민이 알게 되고 또 그렇게 되어야 법을 고치는 운동이 나올 수가 있다.
전교조 문제도 합법/비합법의 문제와 관련되어 있었다. 전교조가 초창기에 참교육을 위해 노력한 긍정적인 면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현행법을 위반하면서 출발했기 때문에 처음부터 국민의 지지를 받는데 큰 문제가 있었다. 학생들에게 본보기가 되어야 할 교사들이 스스로 법을 위반하는 모습을 보였다는 점이 바로 전교조운동의 가장 커다란 맹점이었다.
나는 이러한 깨달음을 가지고 앞으로 경실련 운동은 반드시 합법적인 운동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45. 시민이 역사의 주인입니다
경실련을 구상할 때의 나의 가장 큰 고민은 우리사회에서 어떻게 진보와 개혁의 바람을 다시 되살려 낼 수 있을까에 있었다.
당시 우리나라에 산적한 개혁과제들이 있었다. 그동안 군사독재 정권 아래서 왜곡되어 있던 사회 각 분야를 민주화, 자율화시켜야 하고, 경제개혁도 이루어야 하고, 과거의 낡은 법도 고쳐야 했다.
이처럼 개혁과제가 산재해 있는데도 불구하고 문익환 목사님의 방북사건 이후 사회전체의 분위기가 보수로 흘러가 버렸는데 이렇게 되면 보수반동의 분위기가 커져 개혁이 어렵게 된다는 것이 나의 큰 걱정이었다.
그때 내가 내린 결론은, 과거 운동권 식으로 운동을 하면 우리사회가 더욱 더 보수반동으로 갈 수밖에 없으며 따라서 전혀 새로운 방식의 운동이 등장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런 판단을 내리게 된 이유는 이러했다.
나는 1987년 6월 민주화대항쟁을 승리로 이끈 광범위한 시민들의 힘과 열정에 주목했다. 6월 항쟁의 승리는 우리나라의 광범위한 중산층이 기층 민중들과 함께 전두환 군사독재정권의 탄압에 저항해서 만들어 낸 산물이라고 볼 수 있다.
말하자면 민주화 대항쟁 승리의 가장 핵심적인 요체는 명동의 넥타이부대로 대표되는, 화이트칼라 중산층이 대거 저항운동에 참여했다는 점이다. 이들이 기층운동 세력과 함께 힘을 합쳤기에 군, 재벌, 관료 등 막강한 힘을 가진 기득권 세력의 저항을 딛고 우리 사회의 민주화를 이룰 수 있었고 결과로 눈에 드러나는 물리적인 폭압이 사라지고, 합법적인 공간이 주어지게 되었다.
일단 합법적인 공간이 주어지면 대부분의 중산층들은 ‘그 합법적인 공간을 통해서 평화적이고 점진적인 방식으로 우리사회를 고쳐나가야 한다’고 생각하게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재야세력은 이러한 국면전환으로 본질적인 변화가 이루어진 것은 하나도 없다’며 종래의 과격하고 혁명적인 방법을 그대로 유지시켜 나갔다. 그러다 보니 과거 독재 치하에서 재야운동을 지지했던 사람들이 점차 지지를 철회하게 되었고 나중에는 운동권의 과격성을 질타하는 데까지 이르게 되었다.
89년의 상황은 이처럼 국민의 마음이 운동권을 떠나가는 상황이었고 문목사 님 방북, 전교조 사건, 동의대 사건, 정원식 총리 밀가루세례사건 등 이후에는 재야운동권은 사실상 국민으로부터 고립되고 말았다.
이렇게 되면 권력을 쥔 기득권 세력이 이 기회를 놓칠 리 없었다. 기득권 세력은 이 틈새를 비집고 들어와 운동권을 고립화시키고, 좌경, 용공, 폭력이라는 딱지를 붙여 감옥에 가두어 버린다. 그리고 우리 국민도 과거에는 이들을 구속인사, 민주투사라고 부르며 적극적으로 지원했지만 이제는 더 이상 지지하지 않는다. 그리고 이들은 체제안정 세력으로 바뀌어서 오히려 기득권 세력과 결탁하는 모습까지 보이게 되었다. 이것이 바로 경실련 창립 당시의 우리사회의 모습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이러한 보수 분위기의 조성에 보수언론이 큰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한다. 이 지적이 부분적으로는 타당성이 있다고 생각하지만, 그러나 전적으로 옳은 지적은 아니다. 그때그때 사회변화를 정확하게 읽어 내는 것이 언론이다. 또 언론은 절대로 함부로 나서서 총대를 메지 않는다. 언론은 오히려 국민여론의 풍향이 어느 쪽으로 기울고 있는가를 민감하게 포착하고, 국민의 바뀐 생각을 언론이 발 빠르게 대변했다고 보는 것이다.
이런 고민을 거듭하면서 나는 진보와 개혁의 바람을 되살리려면 보통시민들(중간층)이 중심이 되는 시민운동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보통시민들은 원래가 보수적인 사람들이 아니다. 이들은 누구보다도 개혁을 원한다. 경제정의, 부정부패척결, 평화통일, 민족자주, 민주주의, 지방자치, 환경보존, 더불어 사는 사회, 산업평화 등을 보통시민들도 다 원하고 있다. 다만 이들은 이런 것들이 평화적이고 합법적인 방법으로 차근차근 이루어지기를 원할 뿐이다. 말하자면 ‘안정 속의 개혁’을 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들 보통시민이 안정보다 개혁을 원하면 야당을 지지하게 되고 개혁보다 안정을 원하면 여당을 지지하게 되는 것뿐이다.
따라서 우리가 개혁적인 시민운동을 전개하면 중산층들은 우리를 지지하게 되고 이 과정에서 일반시민들은 자연스럽게 수구세력과는 생각이 다를 수밖에 없음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진보와 개혁의 바람은 다시 되돌아오게 되는 것이다.
때문에 나는 경실련 운동을 시작할 때부터 ‘보통시민들이 역사의 주인’이라는 자각을 우리 사회에 확산시키려고 애썼다. 나는 경실련운동을 하면서 보통시민들을 향해서 이렇게 말했다.
‘여러분은 역사의 주인입니다. 이제 더 이상 보통사람들이 뒤에서 구경만 하고 있어서는 안 됩니다. 이제는 앞장서서 여러분의 문제를 이야기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우리사회가 더불어 잘사는 방향으로 갈 수 있습니다’
나는 우리 사회가 개혁을 다 마친 후에는 보수로 가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지금처럼 진보와 개혁이 필요할 때에는 보통시민들이 주인이 되어 사회 정의와 개혁을 위해 싸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는 마흔살이 될 때까지 한 가지 컴플렉스를 갖고 있었다. 그것은 내가 민중이 아니라는 사실이었다. 나는 어릴 적에 가난을 모르는 유복한 환경에서 자랐다. 때문에 내가 산업선교 운동을 하면서 노동자와 같이 감옥을 두 차례나 갔음에도 불구하고 내 마음 속에는 항상 ‘나는 부르조아다’라는 컴플렉스가 있었다.
마흔 살 생일을 맞으면서 나는 문득 이런 생각을 했다.
‘내가 벌써 내 인생의 반을 살았구나. 그런데 아직도 나는 내가 역사의 주인이 아니라는 컴플렉스를 가지고 있구나’
그리고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것은 말도 되지 않는 이야기다. 그리고 수많은 보통사람들이 나처럼 이런 컴플렉스에 시달리는 것은 결코 옳지 못하다. 마흔살이 되어서까지 계급이론의 노예가 되어서 자기 스스로를 기회주의자로 생각하고 있다니 이게 말이나 되는 일인가. 왜 많은 보통시민들과 지식인들이 스스로 기회주의자라는 컴플렉스에 시달리면서 눈치보며 살아야 하는갗
나는 ‘이제부터라도 내가 역사의 주인이라는 자부심을 갖고 살아야겠다’고 마음먹었다. 그리고 운동권 사람들이 보통시민들을 역사의 주체가 아니고 기회주의자라고 말하면 나는 이 말을 온몸으로 거부하겠다고 결심했다.
경실련을 시작한 뒤 시민들 앞에서 강연할 기회가 있을 때마다 나는 이 말을 자주 했다. 그러면 청중들은 내게 열광적인 박수를 보내곤 했다. 나는 많은 사람들이 내 말을 듣고 해방감을 느꼈을 것으로 생각한다.
얼마나 많은 건강한 시민들이 운동권으로부터 기회주의자로 혹은 독재를 눈감는 구경꾼이라고 비난받아 왔던가. 그러나 이제 보통시민들은 더 이상 운동권의 말을 듣고 주눅이 들어서는 안 된다. 부르죠아라는 콤플렉스, 기회주의자라는 콤플렉스도 다 버려야 한다. 그리고 이제는 역사의 주인이라는 자부심을 가져야 한다!
오히려 이런 플렉스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어떤 때에는 필요이상으로 과도하게 운동권처럼 행동하려고 한다. 요즈음 보면 복음주의교회 젊은이들이 오히려 더 좌파로 가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지난날 복음주의 교회가 민주화운동에 가담하지 못했던 것에 대한 콤플렉스가 오히려 이러한 좌경화를 부추기고 있다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