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느 하루 평양주변 어느 공장에 참관 갔다가 호텔에 도착했으나 나는 차에서 내리지 않고 이 차로 직접 사리원에 가자고 강짜를 부렸다.
초청사의 사장님이 “지방에서 평양 들어오자면 수속을 밟아야 하는데 쉽지 않습니다.”라고 하였으나 나는 “그럼 이차로 사리원으로 갑시다.”라고 강짜를 부렸다.
초청사 사장님이 할 수없이 총국장님한테 전화로 이야기 하였는데 약 20분후에 대외 사업국 직원이 찾아 와서 등기표에 등기를 하였다. 그리고 점심식사가 금방 끝났는데 대외사업국으로 부터 사리원으로 가도 된다는 동의서가 나왔다
오후에 우리는 사리원으로 갔다.
차로 달리니 실지 한 시간 거리도 되나마나 했고 도로는 아주 좋았다.
친척과 만나 사리원 외국인 호텔식당에서 식사를 끝냈는데 그 친척집으로 내가 방문할 수 없고 여기에서 갈라지라는 것이었다.
어떻게 사는가를 봐야 될 거 아니냐? 몇 십년만에 만나는데 집도 안 가 보겠는가고 강짜를 부렸으나 이는 도저히 동의할 수 없다고 하였다.
할 수 없이 친척이 곧 평양으로 들어와 함께 고려호텔에서 며칠 묵을 수 있게 해 준다는 답변을 받고 당날로 평양으로 돌아 왔다.
약 이틀 후에 사리원군부의 찌프차로 나의 친척을 고려호텔까지 모셔다 주어 함께 며칠간을 잘 보냈고 사리원으로 돌아 갈 때 대외 사업국에서 차로 사리원까지 모셔다 드렸다.
북한에서 사람들이 자기가 사는 동네(시)를 떠나 다른 곳으로 출장 가려면 반드시 동의서를 얻어야 하는 정책이 있다고 한다.
왜서인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나는 평양에 약 2달간 묵으면서 많은 무역회사의 사장 직원들과 만나 보았다. 당시 평양에 무역 회사가 모두 100여개 있은 걸고 기억하는데 모두들 나를 만날 때에는 항상 약속시간보다 약 몇 분간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무역회사 사원들의 지식수준과 업무수준은 아주 월등하였다. 적지 않은 직원들은 영어 일본어, 러시아어를 유창하게 하였다. 어찌 여러 개의 언어를 그리 잘 하느냐고 물으니 “무역일군으로서 이는 기본이 아닙니까?” 라고 대답하는 것이었다.
2002년 1월 1일 양력설을 북한에서는 굉장히 쇠는데 나는 초청에 의해 설맞이 공연을 볼 수 있었다. 앞으부터 6번째 줄인가 중간 자리에 앉았는데 관람객들이 점점 모여 들자 나는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극장으로 들어오는 사람들 대다수가 어깨에 대성을 달거나 훈장을 엄청 많이 단 최고급 수장들인 것이었다.
공연이 시작되기 전 우뢰와 같은 박수가 터지더니 김일성 수상님이 웃으시면서 좌석에 앉으시는 것이었다. 바로 나의 좌석에서 불과 몇 미터 안 되는 자리에 앉으셨는데 중앙의 최고급 간부들이 거의 다 온 것이었다.
나는 내가 앉은 자리가 너무나 무겁다는 걸 의식하였다.
공연이 시작되었는데 모두가 유치원, 소학생 어린애들의 공연이었다. 공연 첫 순서는 김일성 아버님께 새해 세배 올리는 내용이었는데 애들의 연기 수준은 진짜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훌륭했었다. 예술에 문외한이 아닌 나는 “세상에 태어난 지 6-7년 밖에 안 되는 애들이 언제 저런 수준까지 배워냈을까?” 의심이 들 정도였다. 매 연기, 연주의 크라이이막스에 오를 때 마다 김일성 수상님은 먼저 자리에서 일어서면서 박스를 치셨고, 온 극장안의 매 사람들은 기계마양 일어서서 박수치고 앉았다. 그러기를 수십 번 되풀이 했다.
이렇게 뜨거운 열정의 관중들을 나는 역시 평생 처음 보았다.
그 이튿날 고려호텔 지배인이 나의 방으로 찾아 왔는데 무언가 붉은 가위 책자 같은걸 두 손으로 나에게 올려 바치는 것이었다.
보니, ‘조선민주주의 인민 공화국 주석 김일성’ 이라고 찍혀 있는 선물 명세서이었다. 나라 수상님한테서 선물을 받은 것이다. 냉장고를 열어보니 어느새 그 선물 명세서의 내역들이 냉장고 안에 차곡차곡 쌓여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