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 새로운 운동이 필요하다
경실련은 다른 나라에서 유례를 찾아 볼 수 없는 독창적인 운동이다.
경실련을 만든 뒤 나는 많은 사람들에게 ‘해외에 경실련과 비슷한 운동이 있습니까’라는 질문을 받곤 했다. 하지만 나는 해외에서 경실련과 같은 운동을 본 적이 없다. 내가 미국에서 6년 동안 있었지만 미국의 시민운동에는 관심조차 없었다. 나의 모든 관심은 민주화운동에 집중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경실련 운동은 전적으로 한국의 토종 운동이다.
또 경실련이 태동된 원인도 1989년의 상황에서 비롯된다. 1989년 봄, 여름은 땅값, 아파트 값이 천정부지로 뛰어올라 많은 집 없는 사람들의 주름살을 더욱 깊게 만들었던 때다. 그 당시 땅 가진 사람의 5%가 전국 민유지의 65.2%를 가질 정도로 땅의 소유가 소수의 손에 집중되어 있었댜.
또한 땅값 상승으로 인한 불로소득도 엄청나서 88년에는 땅 가진 사람이 한 해 동안 2백12조원을 벌었고, 89년도에는 3백14조원, 90년도에는 2백67조원을 벌었다. 3년간 8백여 조원을 땅가진 사람들이 번 셈이다. 이 돈은 ‘땅을 갖지 않은 사람’의 호주머니에서 ‘땅 가진 사람’의 호주머니로 합법적으로 이전된 돈이다.
이러한 엄청난 돈의 대이동에서 나도 예외일 수 없었다. 나는 89년 봄에 내가 가지고 있던 성내동의 32평 아파트를 팔고 다른 아파트를 분양받으려다가 아파트 값이 갑자기 뛰는 바람에 졸지에 아파트 한 채를 완전히 날리고 말았다. 그리고 그 후부터 나는 지금까지 부모님이 계시는 아파트에 얹혀 지내고 있다. 나는 아파트만 보면 가슴이 아프지만 “하나님께서 나한테 집 없는 서민들의 설움을 함께 나눌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그런 실수를 하게 하셨다”고 위안을 삼곤 했다.
또 1989년에 노동자들의 노사분규가 크게 일어나 그해 노동자들의 임금20% 정도 인상되었고 전체 임금인상분은 약 10조원에 달했다. 그런데 같은 해 땅 가진 사람이 번 돈은 3백14조에 달했으니 대부분의 노동자들이 서민인 것을 감안하면 노동자들은 열심히 투쟁해서 앞으로 10조원을 벌고 뒤로 3백14조원을 밑진 셈이었다.
이렇다 보니 서민의 고통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다. 해마다 전세 값이 뛰어 지하실로 도시변두리로 산꼭대기로 전전하지 않으면 안 되었고, 임금이 올라도 땅값 상승분을 쫓아가지 못해 생활형편은 더 열악해졌다. 반면 투기꾼들의 주머니는 갈수록 두툼해졌다.
나는 이러한 상황이 시정되지 않고서는 우리사회의 어떤 문제도 해결될 수 없다고 생각했다. 경제성장을 이루려면 돈이 생산적인 방향, 투자의 방향으로 흘러가야 한다. 만약 그 반대로 돈이 투기에 몰린다면 그 나라의 경제는 제대로 성장할 수가 없다.
예컨대 노동자들이 열심히 일하지 않고 서비스업종에 몰려 향락퇴폐산업만 번창하게 만들고, 중소기업인들이 열심히 제조업에 종사하지 않고 강남에 가서 여관업만 하려고 한다면 나라의 경제가 제대로 발전할 수가 없다.
하지만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전세값 상승분조차 감당하지 못하게 되면 노동자들은 일할 맛을 잃을 수밖에 없다. 이런 상황에서는 근면성실하려는 마음이 생길 수가 없는 것이다. 이러다 보니 소위 ‘실망소비’라는 현상이 일어나게 된다.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내집 하나 장만하기 힘든 현실에 실망한 나머지 자동차부터 사고 보자느니 불고기 먹고 외식하며 우선 즐기고 보자느니 하는 풍조가 만연해지는 것이다. 말하자면 1989년 7월에는 바로 이러한 망국적인 분위기가 전 사회를 휩쓸고 있었다.
나는 이런 사회모습을 보면서 그 당시 가장 큰 병폐인 부동산 투기를 근절하고 땀흘려 일하는 사람들이 대접받을 수 있는 그런 사회를 만드는 일이 가장 중요한 과제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나는 열심히 노력하면 틀림없이 해결책을 찾을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땅투기 근절방법을 찾아 우리사회에 만연한 투기바람을 잠재워야 비로소 경제성장도 이룰 수 있고, 사회적 형평도 기대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나는 이런 생각을 하면서 당시 우리나라의 주류의 사회운동이었던 재야운동이 이런 문제에 관심을 가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재야운동은 이런 문제에는 아무런 관심이 없었다. 당시 재야운동은 소위 통일운동세력과 노동운동세력으로 갈라져서 일반인들의 삶과는 별반 상관없는 노선투쟁에 몰두하고 있었다. 피디(PD)계열인 민중민주주의 혁명운동세력은 어떻게 하면 노동해방을 실현할 것이냐에 관심을 집중해 해마다 과격한 노사분규를 일으켰고 엔엘(NL)계열인 민족민주주의 혁명운동세력은 통일운동에 관심을 집중시켜 평양축전참가투쟁이라든가 북한바로알기운동, 문익환목사님 방북사건 등 통일투쟁에만 관심을 쏟았다.
그래서 나는 부동산투기 문제의 근절을 위해서는 새로운 운동이 필요하다는 결론을 내리게 되었다. 그리고 운동권에서 관심을 갖지 않는다면 이제까지 뒤에서 구경만 했던 사람들이 운동의 중심이 될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당시 우리사회는 땅값상승이 너무 심각해 사람들을 굳이 두 개의 계급으로 나누자면 하나는 ‘집있는 계급’, 또 하나는 ‘집 없는 계급’으로 나눌 수 있을 정도였다. 집이 있는가 없는가가 그 사람의 재산증식능력을 가늠하는 척도가 되고 있었다. 보통 자본주의의 모순이라고 하면 ‘자본가와 노동자 사이의 모순’을 지칭하지만 그 당시 우리사회의 상황은 자본가와 노동자간의 모순보다는 자본가와 노동자를 합쳐 생산자계층이라고 한다면 생산자계층과 불로소득 계층의 문제가 더 심각한 상황이었다.
경실련은 이러한 인식을 바탕으로 해서 만들어진 운동이다.
우리는 경실련 발기선언문에서 ‘경실련은 자본주의 시장경제체제의 효율성과 역동성에 기초하되 다만 시장경제가 가져다주는 빈부의 양극화 현상을 정부가 개입해서 시정하는 것을 통해 경제성장과 사회적 형평 이 두 가지를 동시에 실현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다’는 점을 분명하게 밝혔다. 이러한 입장은 명시적이든 암묵적이든 사회주의체제 건설을 목표로 삼았던 당시의 사회운동과는 명백하게 구분되는 점이었다. 말하자면 경실련은 당시 상황에서 ‘자본주의 시장경제체제에 기초한다’라는 점을 당당하게 밝히고 시작한 최초의 운동단체라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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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경실련을 만든 사람들
새로운 운동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한 나는 ‘부동산 투기와 싸우는 시민운동’이라는 한 페이지짜리 제안문을 써서 가까운 사람들에게 보여주며 함께 이 운동을 하자고 제안하기 시작했다.
그 당시 나는 기독교 운동 내에서 아이덴터티 그룹으로 불리던 후배들과 가까왔는데, 대개 새문안교회 출신들이었다. 신대균, 김성수, 이덕승, 유종성, 장신규, 전응휘 등이 그들이다.
이들은 사회과학적 인식에 기초해 사회운동을 강조하던 그룹과는 달리 기독교인으로서의 주체성을 강조하는 그룹이었는데, 내가 기사연에서 실무자들의 스트라이크로 어려움을 겪고 있을 때 함께 분개하기도 하고 나를 도와주기도 했던 후배들이다.
나는 이 중 한 사람인 신대균(준목)에게 제안문을 보여주었다. 그랬더니 신목사가 ‘형님, 참 좋은 운동인 것 같습니다. 함께 이 운동을 해 봅시다’며 선뜻 동의해 주었고, 다른 후배들도 대부분 내 제안을 흔쾌히 받아들였다.
그래서 이 후배들과 함께 어떻게 이 운동을 펼쳐 나갈 것인가를 고민하게 되었는데, 그 과정에서 ‘부동산 투기와 싸우는 시민운동’보다는 좀 더 넓은 의미의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으로 하는 것이 좋겠다는 합의가 이루어 졌다. 경실련 준비위가 뜨기 한 달 전쯤인 89년 6월경의 일이다.
그리고 그 때부터 경실련이라는 시민운동을 만들자는 아이디어를 가까운 사람들에게 본격적으로 말하기 시작했다.
당시 나는 기사연 원장을 사퇴하고 내가 쓰던 원장실의 바로 옆방인 김용복 박사 사무실을 임시사무실로 쓰면서 경실련을 본격적으로 준비했다. 그리고 처음부터 함께 의논했던 후배들 가운데 신대균, 유종성, 장신규 등이 초창기 핵심실무자 역할을 맡았다.
새문안교회 후배들 못지않게 경실련을 만드는 데 주축이 된 그룹은 우리마당에 나오던 지식인 그룹이었다.
우선 친구인 박세일 교수에게 경실련에 대한 구상을 설명했다. 그랬더니 박교수가 ‘아주 좋은 운동인 것 같다. 정책대안을 모색하는 일은 내가 책임질 테니 서목사가 시민운동 부분을 전담하면 좋겠다’며 전폭적인 지지를 보여주었다.
이 밖에 우리마당에 나오던 분들이 많이 동참했는데, 그 중에는 이근식, 이각범, 양건, 이영희, 박기봉, 박재창, 박인제, 안병영, 이인호, 김규칠, 권용우 등이 있었다. 사실상 우리마당 회원들 대부분이 경실련 초창기 인사로 들어왔다고 봐도 틀리지 않았다.
이 가운데서도 특별한 열정을 보여준 사람은 이근식 교수(서울시립대 경제학과 교수)였다. 내가 이근식 교수에게 경실련 운동에 대한 나의 구상을 설명하자 잠시 뒤 다시 전화가 와서 만나자고 하더니 “자기도 이 운동을 열심히 하고 싶다”며 적극적인 참여의사를 밝혔다.
이 교수는 대학 시절 경제복지회에서 함께 활동한 친구로 학번이 같아 대학 졸업 후에도 잘 알고 지낸 친구다. 이 교수도 대학 시절엔 나처럼 사회주의 이념에 심취해 있었지만, 그 뒤 나처럼 사회주의 혁명은 불가능하고 합리적인 운동이 필요하다는 방향으로 생각이 바뀌었다.
그리고 ‘우리는 왜 경실련을 발기하는갗라는 발기문은 내가 썼지만 창립선언문은 이근식교수가 썼다. 그리고 이 교수는 초대 정책연구위원장을 맡아 정책위원회의 기초를 탄탄하게 다져 주었다. 강철규박사, 김태동 교수 이진순 교수 등 서울상대 출신 교수들을 경실련에 가입시키는 데도 앞장을 섰다.
경실련에 참여한 또 하나의 그룹은 새문안 교회 친구들이었다. 윤경로 교수, 이형모씨를 위시해서 유재현, 서원석, 이숭리, 이숭선 형제 등 새문안교회 친구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나는 미국에서 돌아오자마자 새문안교회 친구들을 모아 새마당이라는 모임을 만들어 한 달에 한번 정도 모임을 가졌는데, 이 모임의 회원들이 경실련에 많이 참여했다. 특히 새문안 교회의 가까운 친구들은 경실련을 만드는 데 재정적으로 큰 도움을 주었다.
그 가운데서도 잊을 수 없는 사람이 이희택씨다.
이희택씨는 사실 땅이 많은 ‘땅부자’이다. 제주도에 수십만 평의 땅을 갖고 있었는데, 그 친구가 내 말을 듣더니 “내 땅값이 똥값이 되는 한이 있더라도 망국적인 부동산 투기는 근절되어야 한다, 그러니까 서목사가 이 일을 열심히 해주기 바란다” 그리고 이희택씨가 선뜻 1천만원을 내 놓았다.
이 돈이 초창기 경실련을 만든 자금이었다. 5평짜리 조그만 사무실에서 간사 5명과 함께 경실련을 만드는 작업을 시작했는데, 그 때 내 월급은 40만원이었다.
경실련 조직작업을 시작하면서 만난 또 하나의 그룹은 복음주의교회 그룹이었다. 내가 기사연에서 쫓겨나는 것을 보면서 안타까와 한 분 가운데 이만열 교수가 있는데, 이 교수가 나를 복음주의교회 쪽의 많은 분들에게 소개해 주었다. 그 때 손봉호 교수를 처음 알게 되었고, 박철수, 고왕인, 이문식 등 많은 분들과 친분을 맺게 되었다.
진보교회 진영에서는 유일하게 인명진 목사가 경실련 초창기부터 참여해주었다. 인목사는 과거 산업선교 활동을 함께 했던 분인데, 내가 기사연 원장에서 쫒겨날 때 무척 분개하신 분이다. 인목사도 내가 미국에 가 있는 동안 호주에서 몇 년 간 계시다가 나보다 먼저 귀국해 예장 갈릴리교회 목사, 국민운동본부 대변인을 지내며 6.29선언을 끌어내는 주역이 되었지만 내가 미국에서 많은 변화를 겪었던 것처럼 인목사님도 호주에서 돌아올 당시 생각의 변화가 많았다.
당시 기독교운동권의 분위기가 경실련에 대해 굉장히 비판적이었던 것을 감안하면 인목사가 경실련에 참여한 것은 대단한 결단이었다. 그런데도 인목사는 이 점을 개의하지 않고 경실련에 초기부터 동참했다.
실제로 진보교회의 한 목사님의 경우 내가 경실련 운동에 대한 구상을 설명했더니 “역시 서경석답다. 참 훌륭하고 꼭 필요한 운동이니 서목사가 열심히 해라”라면서 자신도 동참하겠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 뒤 기독운동권에서 그분에게 ‘경실련에 참여하던지 진보적인 기독교운동을 하던지 하나를 선택하라’고 압박을 가해 결국 경실련을 그만두고 말았다.
황인철 변호사님과 변형윤 교수님이 경실련의 공동대표를 맡아준 것도 경실련에 큰 힘이 되었다. 이 두 분은 기존 운동권의 운동방식에 비판적인 시각을 갖고 시작한 경실련이 운동권으로부터 받는 외풍을 막아주는 역할을 해주셨다.
그 밖에도 경실련에 들어온 많은 지식인들이 있었는데, 한상진 교수, 조형 교수 같은 분들이었다. 그 분들은 기사연 사건을 보면서 대단히 개탄했었는데 그 뒤 기사연에서 쫓겨난 내가 새로운 시민운동을 만든다고 하니까 기꺼이 울타리가 되겠다며 모여든 분들이다.
이렇게 경실련의 초기 골격이 만들어져서 89년 7월 8일 경실련 준비위원회를 정식으로 출범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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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우리는 왜 경실련을 발기하는가
“지금 각 분야의 사람들, 시민들, 청년들이 모여 경제정의를 이룩하기 위한 시민운동단체를 발기하기 위해 이 자리에 모였습니다. --- 우리 사회에는 두개의 계급만이 존재하게 되었는데, 하나는 주택소유 계급이고 다른 하나는 무주택 계급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땅의 진정한 민주주의와 통일을 염원하는 사람들에게 이러한 경제적 부정의와 망국적 불로소득의 척결 없이는 우리는 한 발짝도 민주주의와 통일을 향해 나아갈 수 없다고, 또한 우리는 이 땅의 안보를 걱정하는 보수세력에게도 지금의 격심한 경제적 부정의가 척결되지 않는 한 혁명과 같은 극단적인 방법밖에는 해결의 길이 없다고 생각하는 젊은이들은 결코 줄어들지 않을 것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 따라서 이제는 우리들 ‘보통시민’들이 나설 수밖에 없습니다. 시민들이 함께 모여 회비를 내고 단체를 꾸려나갈 것입니다. 그리고 구체적인 삶의 현장에서 경제적 부정의의 실상을 하나하나 파헤치고 고발할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문제 하나하나에 대한 빈틈없는 대안도 학자의 머리에서 보다는 시민들의 생생한 실지 경험에서 더욱 확실하게 찾도록 할 것입니다
이렇게 찾아진 대안을 합법화하기 위한 캠페인을 할 사람도 바로 시민입니다. 국회의원으로 하여금 꼼짝없이 입법을 하도록 만들 수 있는 힘은 할머니, 할아버지, 유모차를 끄는 아기 엄마 할 것 없이 모든 시민이 쏟아져 나와 여의도 광장을 꽉 메우며 평화행진을 할 때에만 생길 것입니다.
이러한 시민의, 시민에 의한, 시민을 위한 운동이 바로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입니다”
1989년 7월8일 서울 명동 YMCA강당에서 열린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 발기인대회 때 발표한 ‘우리는 왜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을 발기하는갗라는 글의 일부분이다.
이글은 내가 발기인대회가 열리기 이틀 전에 두시간만에 쓴 글이다. 이글에는 경실련의 출범이유와 앞으로 운동방법에 대한 원칙이 적혀 있는데, 이처럼 중요한 글을 내가 어떻게 두시간만에 쓸 수 있었는지 지금 생각해도 대견스럽다. 그리고 이글에서 말한 당시의 원칙이나 운동방식이 그 후에도 철저하게 지켜져 내려오고 있다.
내가 경실련 운동을 시작하게 된 배경은 크게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는 당시 경제적 부정의의 현실이 너무도 심각하다는 인식이었다. 나는 그것을 극복하지 않고는 어떤 문제도 해결되지 않는다고 믿었고, 그래서 여러 사회운동의 목표 가운데서도 굳이 경제정의의 실천을 주요 목표로 삼았다.
두번째는 운동론적 관점에서 볼 때 기존 재야운동과 구별되는 새로운 운동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평화적이고 합법적이고 합리적인 대안을 모색하고 국민적 합의에 기초한 운동이 새로 나와야 한다. 그리고 그 운동의 주체는 특정 계급이 아니라 바로 보통시민들이어야 한다고 믿었다.
세번째로는 선으로 악을 이기는 운동이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말하자면 운동의 목표뿐만 아니라 그것에 이르는 방법까지도 선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왜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을 발기하는갗라는 글에는 이런 원칙이 잘 담겨 있다.
나는 이글에서 우리가 경실련을 만든 가장 큰 이유를 “부동산투기, 정경유착, 탈세, 극심한 소득격차, 불공정한 노사관계, 농촌과 중소기업의 피폐 등 한국사회의 경제적 부정의, 그 중에서도 특히 부동산 투기에 의한 엄청난 불로소득을 시정하는 일을 정부나 정치인에게 맡겨서는 안 되고 시민 스스로의 조직화된 힘으로 거대한 압력을 형성하지 않는 한 불가능하다고 생각한 때문”이라고 썼다.
나는 당시 운동권에 대해서도 “당장의 민주주의 실천과 노동자들의 권익옹호, 그리고 통일의 과제가 있는데, 당신들이 이를 희석시키는 역할을 하는 것이 아닌가?”라고 질문한다면 “아니오, 우리는 바로 이 나라의 민주화와 통일, 그리고 산업평화를 위해 이 일을 하고 있습니다. 이 길이야말로 사실은 경제성장과 복지, 민주주의와 통일로 가는 지름길입니다”라고 대답하겠다고 했다.
왜 민중이 아니고 시민이냐는 질문에 대해서도 “우리가 힘을 모으려는 세력은 소외되고 억눌린 민중만이 아니라 선한 뜻을 지닌 가진 자도 이 운동의 중요한 주체이다. 왜냐 하면 우리사회가 이래서는 안 되고 기필코 민주복지사회로 가야겠다고 하는 선한 의지를 가진 사람이면 그가 기업인이든 중산층이든 할 것 없이 이 운동의 중요한 구성원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고 답변했다.
실제로 경실련 운동은 노동자와 기업가로 구성되는 생산자층의 편에 서서 불로소득층과 맞서는 운동이다. 아니, 보다 근본적으로 이 운동은 우리의 내부에 있는 탐욕과 이기주의를 척결하고 남과 함께 사는 정신과 양보의 정신을 기리는 정신운동이다. 바로 이점 때문에 오히려 재산가는 자기 소유를 남과 함께 나누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이 운동의 아름다운 본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내가 굳이 이 운동의 주체를 시민이라고 표현한 것은 단지 민중과의 차이를 보여주기 위해서만은 아니었다. 오히려 더 깊은 관심의 대상은 87년 6월 민주화 대항쟁 때 길거리에 쏟아져 나왔던 시민들이었다.
우리사회에 정치적 기적을 가져다주었던 이 시민들이 87년 말 대통령 선거유세 이래로 줄곧 관망만 하고 있는 것을 나는 안타깝게 생각했다.
때문에 나는 시민들을 향하여 바로 이 보통시민들이 다시금 경제정의를 위한 행동에 참여함으로써 이번에는 분배의 기적을 만들어 내야 한다고 말했다.
당시 우리사회는 좌우의 양극적 대립으로 인해 표류하고 있었고, 시민들은 불안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재야운동권의 문제제기를 흡수하는 완충지대가 존재하지 않음으로 해서 국민적 합의에 기초한 운동의 출현을 바라고 있었다.
나는 시민들을 향해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우리 국민의 위대함을 믿습니다. 우리 국민은 5공이 철저하게 청산되고 민주주의가 각 분야에서 착실히 뿌리내릴 것을 원하고 있습니다. 우리 국민은 우리사회의 가난하고 소외된 노동자, 농민, 도시빈민들이 가난에서 벗어나 다 함께 잘 살게 되는 사회가 오기를 열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 국민들은 비록 매우 조심스럽고 신중한 방법이기는 하지만, 그러나 확고하게 우리나라가 통일을 향해 착실한 전진을 할 수 있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국민적 합의에 기초한 운동은 느린 것 같아도 실제로는 자주, 민주, 통일로 가는 가장 빠른 지름길입니다. 왜냐하면 이러한 운동이 나타나 국민을 안심시킬 때 비로소 국민은 움츠렸던 가슴을 펴고 다시금 진보의 대열로 되돌아올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 경실련은 바로 이러한 국민적 공감대의 지원을 받으며 말 그대로 보통시민이 주체가 되는 운동을 전개할 것입니다. 우리가 토지, 주택문제를 당면과제로 생각하고 있는 이유도 이 문제가 일반 시민의 피부에 가장 절실하게 와 닿는 문제라는 점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 운동을 진전시킬 때 비폭력 평화운동의 방식으로, 대중적이고 합법적인 방식으로 전개하고자 하는 것도 이때에만 일반시민들이 가장 편안하게 참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우리가 관념적이고 원칙론적인 주장을 배제하고 구체적인 대안을 모색하려고 하는 것도 바로 이 시민들은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대안을 제시하였을 때에만 호응하기 때문입니다.
또한 이 운동은 철저하게 비정치적인 순수한 시민운동으로 끝까지 나아갈 것입니다. 그럴 때만이 이 운동은 시민들의 깊은 신뢰를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행동전략은 온건하고 대중적이었지만, 그렇다고 경실련운동이 현 체제를 안정화시킴으로써 결과적으로 가진 자들의 이익만을 도모하는 김 빼기 운동은 결코 아니었다.
나는 이글의 말미에 이렇게 썼다.
“우리의 꿈은 우리사회의 근본적인 개혁입니다. 서민계층의 입장에 확고하게 서서 분배 5개년계획이나 분배 10개년 계획을 통해 경제성장과 사회적 형평을 동시에 성취해내는 것- 이것이 온 국민의 꿈이자 이 운동의 목표입니다.
사람들은 이렇게 반문합니다.
‘과연 될까?’
그러면 우리는 이렇게 답합니다.
‘이길 이외에 다른 길이 없습니다. 우리 국민에 대한 무한한 신뢰를 가지고 앞으로 매진할 따름입니다.
그렇지만 한 가지, 이미 국민들은 이 운동에 열렬한 호응을 보내기 시작했습니다”
실제로 발기인대회가 끝나고 난 뒤 경실련 사무실에는 그야말로 전화통이 불이 날 정도로 시민들의 전화가 빗발쳤다.
하루에 수백 명의 시민들이 회원으로 가입했고, 열흘도 안 되어 경실련 회원수가 3천명으로 늘어나며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시민단체로 주목받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