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시절 우리 집 옆에는 로인활동실이 있었다. 작은 초가집을 활동실이랍시고 마을 할머니들이 뜨개감 같은것을 들고와 서로 얘기를 나누는 곳이였다. 워낙에 동정심 많은 어머니는 간혹 떡이라도 하는 날이면 큰 대야에 담아서 내가곤 하셨다. 할머니들에 비하면 퍽 어린 나이인 어머니였지만 적적하고 외로우신 할머니들을 동무하여 가끔은 일부러 놀러 다니기도 했었다. 그럴 때면 악착스레 어머니의 치마자락을 잡고 나도 따라가서는 그때는 전혀 알아들을수 없었던 고부사이의 갈등 같은 얘기들을 어린 귀로 익히기도 했고 가끔은 학교에서 배운 노래를 목청높이 불러드려서 귀여움을 받기도 했었다.
그날은 작은 우리 마을에 녀자들의 속옷을 팔러 온 보따리장사군이 달변을 구사하며 로인들이 모인 활동실에 보따리를 헤쳤다. 분홍색, 초록색, 하늘색 예쁜 색의 화려한 속옷들에 예쁜 레스까지 달려서 어린 내 눈에도 무척 예뻐보였다. 보따리장사군은 이것저것 치켜들고 침방울을 튕기며 열을 올렸다.
《아유, 할머니, 이 분홍색이 얼마나 예뻐요? 그래도 이런걸 입으셔야죠.》 《에구, 우리 늙은이들이 어떻게 이렇게 천한걸 입겠소.》라고 한 할머니가 기겁을 하며 손사래를 치며 말씀하시자 거기 모인 할머니들이 모두 그 얘기에 동조를 한다는듯 고개를 끄덕이시며 《그렇잖구. 그저 흰색이 똑 제일이지.》라며 맞장구를 쳤다.
그날 할머니들은 저저마다 소박한 흰색 속옷 한벌씩을 사들고 집으로 돌아가셨다. 지금 내 기억에도 맘에 든다고 입으로 얘기하시는 할머니들의 표정은 그다지 만족스러운게 아니였던것 같다. 그날 외지에서 왔다는 그 보따리 장사군은 버스가 끊겨 그 활동실에서 하루밤을 묵게 되였다.
저녁, 퇴근했던 엄마는 속옷보따리 장사가 낮에 왔었다는 내 말에 나를 이끌고 활동실로 갔다. 그런데 그날 저녁따라 활동실에는 할머니들이 꽤 많이 계셨다. 할아버지를 일찍 여의시고 홀로 나신 할머니들만 한두분씩 저녁에 나올뿐이였는데 그날은 낮에 계셨던 할머니들이 다 모인듯싶었다. 보따리장사군이 방 한가운데 보따리를 헤쳐놓고있고…
《에구… 이제 살문 얼마나 더 살겠소. 죽기전에 저 고운 색갈을 입어보구 죽어야지 않겠소.》라며 낮에 그 색갈이 천하다며 손사래를 치시던 할머니가 한마디 하셨다. 그러면서 낮에 샀던 연한 색 속옷을 꺼내들고 바꾸련다고 했다. 그러자 모인 할머니들이 이구동성으로 《그러잖구.》라며 혀를 끌끌 차시더니 모두들 궤춤에서 낮에 샀던 속옷을 꺼내는것이였다.
《그래두 죽기전에 고운 색갈로 한번은 입어봐야지.》라며… 분명 모두가 낮에는 무척 마음에 든다고 얘기를 하셨던건데…
역시 어려서부터 깊은 통찰력(?)을 가졌던 내 치밀한 관찰은 정확했던것이였다. 할머니들은 사실 낮에 샀던 그 소박한 속옷이 퍼그나 맘에 들지 않으셨던것이다. 그저 늙은이 주책이다싶어서 예쁜 속옷을 바라보기만하다가 흰색 속옷을 사긴 했었지만 속에 걸려 밤도와 속옷바꾸러 가만가만 오셨는데 이렇게 다 모인것이였다. 그러고는 서로 보기가 민망했던지 어색하게 웃으시며 《에구… 다 로망이오. 주책이랑이.》라는 말씀도 덧붙이셨다. 그 표정은 낮에 《흰색이 똑 제일》이라며 사들고 나가실 때보다 훨씬 밝은 표정이셨다.
할머니들이 하나둘 속옷을 바꿔들고 나가고 앞마을에 계신 혼자 사시는 할머니 한분만 남았다. 할머니는 천정을 바라보며 하하하 소탈하게 웃으시더니 어머니를 보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늙으면 다 이렇소. 맘은 안 늙어서 그래두 고운걸루 입구싶구 그렇지만 그저 늙은이 주책이다싶어서 고운 색갈루 못사오. 거기다 자식들은 늙은이다 생각하고 어쩌다 속옷을 사주면 그저 허연 색갈루 큰걸 사다주지. 이럴 때나 곱은 색갈루 골라야지 어쩌겠소.》
젊은 사람한테 못보일걸 보여서 민망한듯 웃으시며 오늘 모인 할머니들의 대변인이라도 되는양 얘기를 하셨다.
마음에 드는 예쁜 속옷을 고르고 내 손을 잡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엄마는 뭐가 우스운듯 내내 생글생글 웃으시며 《늙어도 녀자맘속의 불씨는 꺼지지 않는 모양이지.》라며 내게 알아들을수 없는 얘기를 하셨다.
녀자마음속의 《불씨》라… 다 꺼져버린 화로불 같지만 뚜지면 빠알갛게 살아나는 불씨, 그것으로 녀자는 외로움을 이기고 슬픔을 이겨내는것일가? 다만 늘 습관처럼 활활 타번지려는 불씨를 애써 덮으려고 하는 녀자의 인내는 얼마나 가상한것일가. 오늘밤 나는 어렸을적 추억 한자락 떠올리며 쓸쓸하게 웃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