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과 소와 개와
1.
마차를 끌고 가는 말에게 주인이 채찍으로 한 대 때렸다. 그러자 말은 놀라서 달렸다. 주인이 채찍질을 하지 않자 말은 스스로 속도를 줄였다. 그러자 주인은 연거푸 말에게 채찍질을 하였다. 말은 쉬지 않고 더욱 열심히 앞으로 달려갔다. 주인이 계속해서 채찍을 휘두르자 말은 콧김을 하얗게 내뿜으면서 정신없이 더욱 빨리 달려갔다. 채찍을 맞을수록 말은 더욱 빨리 달렸고, 주인은 그럴수록 채찍질을 자꾸 해댔다.
목적지에 도착한 뒤, 지친 말에게 물었다.
“너는 왜 그렇게 달리기만 하니? 힘들면 중도에 천천히 가지.
그러자, 말은 이렇게 대답하였다.
“달리지 않으면 맞아 죽게 생겼는데 달리지 않을 수 있소? 더구나 주인은 내가 오래 잘 달리는 줄을 잘 알고 그러는데.
2.
우차를 끌고 가는 소에게 주인이 채찍을 갈겼다. 소는 움찔 하고는 몇 걸음을 조금 빠르게 걷고는 다시 처음의 속도로 걸었다. 그러자 주인이 연거푸 두세 대 채찍질을 하였다. 소는 역시 몇 걸음만 빠르게 걷고는 여전한 속도로 걸어갔다. 주인이 채찍을 계속해서 내리쳐도 소는 얼마만큼만 빨리 걷고는 곧 제 속도로 걸었다.
내가 소에게 물었다.
“너는 때리는 데도 왜 달리지 않니? 그러니까 자꾸 맞지.
그러자, 소가 이렇게 대답하였다.
“때린다고 달려가면 어떻게 목적지에까지 갑니까? 그러다가는 중도에 쓰러지고 말지요. 주인도 내가 달리지는 못해도 오래 잘 걷는 줄을 잘 알게 되면 때리지 않을 테지요.
두어 차례 때려 본 주인은 채찍질을 그만두었다. 다만 한참을 가다가 가끔 한 번씩 채찍을 들었고, 그것도 싫으면 ‘이랴’ 소리만 쳤다. 그러면 소는 역시 조금 빨리 가다가 여전히 제 속도로 걸어갔다.
3.
썰매를 끄는 개들에게 주인이 ‘이랴’ 하고 소리를 질렀다. 그러자 개들은 정신 없이 달려나갔다. 개들은 주인이 한 번도 채찍질을 하지 않았는데도 길게 혀까지 빼고는 헉헉거리며 끝까지 달렸다. 목적지에 도착하여서는 지쳐서 이리저리로 쓰러져 숨을 몰아쉬고 있었다.
나는 개에게 물었다.
“너희들은 때리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그렇게 힘들여 달리니? 그러다가 중간에 쓰러지기라도 하면 어쩔려고… .
그러자 개가 이렇게 대답하였다.
“때린다고 달리고, 안 때린다고 천천히 가나요? 어차피 할 일이니까 열심히 하는 것뿐이지요. 더구나 주인은 우리들이 때리지 않아도 언제나 열심히 달리는 줄을 잘 알고 있어서, 때리지 않고 소리로만 일러주는 것이지요.
4.
나는 말과 소와 개가 다 같이 짐차를 끌고 가면서도 서로 살아가는 것이 같지 않음을 알았다. 그리고 그들이 인간에 의해 지배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자신의 능력과 판단에 맞춰 인간에게 대처하며 살아가고 있음을 깨달았다. 인간세계의 지배와 피지배의 관계도 이와 같을 것이다. ☺
<신길우의 수필 48>
식물들의 항거
아이들이 초등학교를 다닐 때 아내가 미모사[잠풀] 화분 하나를 사 왔었다. 키도 30㎝ 한 자 정도로 작고 가지마저 덩굴처럼 가늘고 엉성해서 별로 보잘 것이 없었다. 다만 긴 잎자루 끝에서 작은 잎새들이 두 쌍씩 마주나서 깃털 모양으로 손바닥만큼 다시 펴져 있어서 정감이 조금 갔었다. 어릴 때 길을 오가며 가지고 놀던 아카시아 잎새 같아서였다.
그런데, 미모사의 잎들을 쓰다듬자 잎새들이 접히고 잎줄기가 아래로 내려뜨려지는 것이 아닌가. 마치 시들어버린 것 같은 모습이었다. 다른 가지의 것들을 만지자 그것들도 잎을 접고 축 처졌다.
“야, 요것 봐라. 재밌는데.”
나는 계속해서 미모사 잎들을 모두 쓰다듬어 주었다. 미모사는 가물에 바짝 시든 모습을 하여 보기에 민망했다. 미모사의 이 동작은 동물들에게 잎새를 뜯어 먹히지 않으려 하는 생존을 위한 방어 동작이다. 물론 한참 뒤에 나가보았을 때에는 미모사는 다시 잎새들을 펴고 제 모습을 하고 있었다.
우리는 식물들을 동물보다 더 마구 대하고 무시한다. 식물은 난 자리에서 자라고 산다. 비바람에도 피할 수 없고, 동물이 잎새나 어린 가지를 물어뜯어도 먹힐 수밖에 없다. 잘리고 꺾여도 방어하거나 전혀 대항하지를 못하는 것으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렁이도 밟으면 꿈틀 한다”는 말이 있다. 수천 수만 년을 살아오면서 식물들이라고 어찌 당하고만 있었겠는가? 식물도 동물이나 인간과 마찬가지로, 기뻐하기도 하고 두려워하기도 한다. 저항하려 온갖 능력과 지혜를 발휘하고, 화내고 괴로워하다가 죽어버리기도 한다. 식물도 하나의 생명체로 동물들과 똑같이 본능과 지혜와 감각을 가지고 살고 있는 것이다.
방안에서 기르는 화초(花草)를 보자. 사람이 자스민 향을 몸에 뿌리면 즉시 위험을 느끼고 심하면 시들어진다. 매일 자주 그러면 결국 견디지 못하고 말라죽는다. 탄소동화작용을 제대로 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식구가 여럿이어서 화장품이나 향수의 냄새가 자꾸 퍼져도 같은 현상을 일으킨다. 위축(萎縮)이 계속되면 식물이나 동물이나 마찬가지로 힘들다. 사람도 심신이 심하게 계속 위축되면 결국 앓게 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그런데, 식물들 중에는 이런 소극적인 방어 동작보다 훨씬 적극적인 방어를 하는 것들도 있다.
대다수의 나무들은 가장 소중한 잎새를 뜯어 먹히지 않으려고 여러 가지로 애를 쓴다. 기린이나 영양들이 나뭇잎을 뜯어먹으면 나무는 독성(毒性)을 뿜어내어 더 먹지 못하게 한다. 그래서, 기린과 영양들은 한 나무에서 독기가 나기 전에만 잠깐씩 먹는다. 그러므로 그들은 나무들을 옮겨 다니며 조금씩만 뜯어먹는 것이다.
침엽수들도 잎새가 시들면 독성을 담아 떨어뜨린다. 그래서 침엽수 주변에는 다른 풀이나 나무들이 자라지 못한다. 그래서 솔밭에는 노란 솔잎만 깔리는 것이다. 은행나무도 잎에 독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은행잎에는 벌레 먹은 것이 없다.
이 모두가 나무들의 살기 위한 방어 조치이다.
목화(木花)는 이보다 더 적극적으로 대처한다. 항거라 할 수 있다. 벌레가 잎을 뜯어먹으면 목화는 독특한 냄새를 풍겨서 바람에 날린다. 그러면 말벌들이 그 냄새를 맡고 몰려와서 벌레를 찾아내어 그 몸속에다 알을 낳는다. 그래서 벌레는 죽고 알은 부화되며, 목화는 더 이상 피해를 보지 않게 된다. 다른 곤충들을 유혹하여 침입자를 죽이는 조치를 하는 셈이다.
식충식물(食虫植物)들은 더 적극성을 가졌다. 통발은 잎을 변형하여 주머니 같은 모양을 하고 그 안쪽 밑바닥에 액체를 담는다. 벌레가 빠지면 죽게 되고 이것을 소화시켜서 영양분을 섭취한다. 끈끈이주걱은 끝에 끈적거리는 액체를 묻힌 작은 털들을 벌려놓고 벌레들이 달라붙으면 잎을 말아서 벌레를 소화한다. 파리지옥은 두 손바닥을 벌리고 있는 모습으로 있다가 벌레가 그 안에 들어오면 잽싸게 닫아서 짓이겨서 소화시켜 흡수한다. 움직이지도 못하는 식물이 자유롭게 움직이는 동물들을 잡아먹는 것이다.
생물은 모두가 존귀(尊貴)하다. 그 삶도 똑같이 신비(神秘)하다. 어찌 식물이 동물만 못하고, 동물이 사람만 못하다고 하겠는가. 모두가 스스로 살아가는 능력이 있고, 지혜와 본능과 감각을 가지고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다만, 사람만이 스스로 만물의 영장(靈長)이라 우쭐대며, 동물이나 식물들을 마구 죽이고 함부로 해치는 못된 짓들을 저지를 뿐이다. 이 어찌 미련하며 건방지다 하지 않겠는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