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의 함정에서 뛰쳐아온 그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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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의 함정에서 뛰쳐아온 그녀
  • 동북아신문 기자
  • 승인 2007.06.02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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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2005년 12월 한국인과의 혼인으로 입국한 한국계 중국인 남영화(가명)이다.

 

2005년 4월 중국 길림성 연길시에 있는 국제결혼인소개소를 통하여 남편을 처음 만나 알게 되었는데 만나기 전 소개인은 나에게 남편을 소개해 주었다. “마음이 착하고 열심히 사는 사람인데 나이는 쉰둘이고, 한국에 집도 있으며 십여 명을 고용하여 농사를 짓고 있으니 경제적인 조건도 좋은 편이다. 결혼 6년 만에 이혼을 하였는데 아이를 낳지 않았기에 부담이 없고 잠시 부모님을 모시고 있으나 혼인을 하면 분가하여 살게 될 것이다.”라고 하였다.


당시 나는 아들과 함께 생활하고 있던 터라 언제라도 좋은 사람이 있으면 혼인할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이렇게 중매인이 나타났기에 한번 즈음은 만나 봐도 괜찮을 것이라 생각하고 양측소개인과 함께 연길에 있는 한 호텔에서 한국인배우자를 만났다. 처음 봤을 때에는 평범한 사람의 인상인데다 듬직해 보여 소개인이 한 말을 믿을 수 있어 혼인을 하기로 약속하고 2005년 12월 10일 연길에서 항공편으로 인천공항을 통하여 한국에 입국하였다.


입국 후 함께 생활하면서 알게 된 사연인데 남편의 말대로 사람을 고용하여 농사를 짓는 것이 아니라 연로하신 어머님과 함께 얼마 안 되는 밭농사를 지어가며 근근이 생계를 유지하는 상황이었다. 게다가 왼 만한 말은 전혀 알아듣지 못하는 2급 청각장애인이라는 사실도 밝혀졌다. 남편은 나에게 “예전에는 보청기에 의존하여 조금은 들을 수 있었으나 지금은 전혀 들리지 않는다”고 하였다. 남편이 청각 장애인이라는 사실을 전혀 모르는 상황에서 혼인을 했기에 많이 당황스러웠고, 가슴이 갑갑하여 숨을 쉴 수 없을 정도로 크게 실망하였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니 혼인 전 의문이 조금씩 풀렸다. 중국으로 전화를 하여도 꼭 시어머님이 나와 통화를 하면서 “며느리의 목소리를 듣고 싶어서 전화를 하는 것이다”라고 하였고, 가끔은 아주버님과 시동생도 전화를 하였는데 남편은 전화를 받을 수 없었던 것이었다.


좋은 일, 슬픈 일, 기쁜 일, 더욱이 부부간에 해야 하는 귓속말도 마음 놓고 할 수 없는 현실이 너무도 기막혔다. 게다가 남편은 집에서 혼자 술을 자주 마셨는데 술을 마실 때면 꼭 제가 옆에 있어야했고, 함께 술을 마셔줘야 했다. 그리고 낮이든 밤이든 새벽이든 시와 때를 가리지 않고 술을 마셨고, 술을 마신 후에는 나에게 이유 없이 욕설을 퍼부으며 주사를 부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나는 이미 제 자신이 선택한 혼인이요 인생이기에 참고 견디려고 하였다. 그러나 이런 생활이 반복되다보니 아무리 참으려고 노력을 해봐도 견디기 힘든 상황이었다.


시어머님은 나에게 “이미 결혼을 했으니 넌 출가외인이다. 그러니 남편이 좀 부족하더라도 하늘처럼 믿고 받들며 살아야지 쓸데없는 생각을 해서는 안 된다. 중국에 있는 자식도 생각하지 말고 아예 母子인연을 끊어야 하니 이제는 전화도 하지 말라. 그리고 시집에만 충실해야 하고 남편의 뜻이라면 무엇이든 따라야 한다.”라고 하였다. 남편도 시어머님과 거의 비슷한 말을 하였다. 자신들 만의 생각과 뜻을 관철시키려고 모자간의 천륜마저 끊으라는 남편과 시어머님의 요구를 나는 받아드릴 수 없었다. 나의 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는 이기적이고 혼인을 파탄으로 몰고 가는 시발점이 되는 한심한 말이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할지 순간 말문이 막혀버렸다. 고심 끝에 결정한 것은 별거였다. 이렇게 20일이라는 짧은 혼인기간을 남기고 집을 나오게 되었다.


집을 나왔으나 마음은 결코 편치가 않았다. 또 한 번의 심각한 고민에 빠지게 되었고, 가슴에 손을 얹어봤다. 내가 조금만 노력하고, 참았다면 남편과 시댁식구들이 나에게 그렇게 의심하거나 경계하지 않고 이해해줄 수도 있지 않을까? 라는 생각을 하다 가출 2일 만에 다시 집으로 돌아갔다. 서로가 사랑을 바탕으로 이루어 진 혼인은 아니지만 또 남편이 똑똑하든 좀 부족하든 이미 인연이 되어 부부로 맺어졌기에 최대한 참아볼 각오였다.


그러나 이 일은 단 나 한사람만의 노력만으로 될 일은 아니었다. 남편의 허락이 없이는 전화도 못하게 하였고, 밖으로 나가지도 못하게 하였다. 술만 마시면 또 주사를 부리기 시작하였고, 시비를 걸다가 때리기까지 하였다. 나는 이 혼인 자체를 너무도 후회했고, 남편에 대한 배신감보다 소개인의 말을 무작정 믿은 내 자신이 더 미웠다. 당장이라도 미칠 것만 같았다. 게다가 남편은 상습적으로 나의 호주머니에서 휴대폰을 꺼내어 확인했고, 지갑을 뒤졌다. 도저히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남편에게 이혼해줄 것을 요구하자 남편은 대답대신 술만 마셨다. 그리고 만취한 상태에서 나에게 욕설을 퍼붓더니 폭행까지 하기 시작하였다.


남편에게 한참을 얻어맞고 나니 귀가 멍해졌고, 얼굴과 몸엔 시커먼 멍이 들었는데도 남편은 함께 술 마실 것을 강요하였다. 온 몸의 힘이 풀리고 더 이상 맞으면 죽을 것 같아 술을 마셔줬었다. 남편도 나도 지치대로 지쳤다. 남편이 몸을 가누지 못하고 쓰러져 잠든 틈을 타서 나는 집을 나왔다.


가출 후 혼인을 정리하기 위하여 청주시에 있는 국제 모모결혼 정보회사를 운영하는 소개인이자 사장님을 찾아갔다. 나의 사정을 다 듣고 난 사장님은 남편과 시어머님을 설득하여 이혼을 하도록 하였다.


가출 20일이 지난 후 남편과 시동생 그리도 시어머님과 사장님이 함께 청주법원으로 가서 협의 이혼을 하려고 했지만 판사 앞에서 남편의 거부로 이혼을 하지 못하고 되돌아왔다.


법원에서 나오자 시어머님은 나에게 욕설을 퍼부었다. 다행히 몸을 피하여 매는 맞지 않았다. 나는 사장님과 함께 사무실로 돌아왔는데 뒤따라 온 남편가족들이 욕설을 퍼부었다. 그러면서 이렇게 협박하였다. “손해배상을 하고 여권과 외국인등록증을 내 놔, 혼인을 하기 위하여 사장님에게 700만원을 줬으니 그 돈을 사장님이 갚든지 니가 갚던지 갚아야 이혼해줄 것이다.”


이제야 나는 남편이 혼인을 하기 위하여 사장님에게 700만원을 줬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사장님은 나에게 이혼하는 조건으로 남편에게 200만원을 돌려주는데 이 돈으로 다른 여자를 소개해주면 된다고 하였다. 사장님의 이 말은 나 때문에 혼인에 실패했고, 마음에 상처를 받았기에 보상을 해줘야한다는 것이었다. 사장님의 주장에 너무도 어처구니가 없어 나는 사장님에게 따져 물었다. “남편의 모든 허물을 저에게 속이고 거짓으로 혼인을 하게 한 것으로 인해 제가 받은 피해와 정신적인 배상은 누구에게 받아야 합니까? 저는 돈도 없을뿐더러 돈이 있다하여도 이러한 손해배상은 해줄 수 없습니다. 손해배상을 받아야 할 사람은 남편이 아니라 저입니다.”


그러자 사장님은 더더욱 이해할 수 없는 변명을 하였다.

“혼인이 정리되면 너에게는 다른 한국인을 찾아 혼인을 하도록 할 것이다. 그리고 그 사람으로부터 받는 돈으로 결혼비용을 충당하면 된다.”

“저는 고향으로 돌아가는 한이 있더라고 다시는 한국인과 혼인할 생각이 없습니다.”

 그러자 사장님은 이혼을 하든 말든 나를 통해야 하니 여권과 외국인등록증을 나에게 맡겨라 내가 잘 보관해줄 것이다, 라고 하였다. 내가 싫다고 하자 사장님은 강제로 나의 신분증을 빼앗아갔다. 그 후 여러 차례 사무실을 찾아갔고, 또 전화를 하여 여권과 외국인등록증을 돌려 달라 하였지만 지금까지 돌려주지 않고 있다. 마지막으로 청주사무실을 찾아간 날은 2006년 8월 14일이었는데 이 날도 사장님과 서로 얼굴만 붉히고 되돌아왔다.


2006년 8월 28일, 내가 여권과 외국인등록증을 불법으로 빼앗은 것을 신고하자 사장님은 나의 물건을 남편에게 돌려주었다. 하여 나는 외국인등록증과 여권을 찾기 위하여 맞아 죽을 각오를 하고 10월 말경에 남편의 집으로 갔다. 다행이 별 문제는 없었다. 나는 시댁식구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우리부부는 감정이 맞지 않고, 공통적인 언어가 없을뿐더러 대화마저 이루어지지 않기에 이 혼인은 잘못 된 것이니 만큼 혼인을 정리하자”


남편이 청각지체 장애인이다 보니 우리의 대화는 글로 할 수밖에 없었다. 남편은 체류연장은 해줄 수 있지만 이혼은 못해준다고 하였다.

몇 개월씩 집을 나갔다가 되돌아 온 나를 남편은 기다려주었고, 따뜻이 맞아주며 용서를 빌었다. 혼인파탄의 원인을 제공한 당사자는 남편이지만 몇 개월에 한 번씩 귀가하는 나를 아무런 말없이 맞아주는 것에 많이 놀라기도 하였고, 나의 마음 한구석이 점점 저려왔고, 눈시울을 젖게 만들었다.


청각지체장애를 안고 힘든 삶을 살아가는 남편이 불쌍하기도 하여 입장을 바꾸어 생각하기로 하였고, 결국은 남편의 모든 과거를 용서하고 다시 남편을 품에 안아주었다. 사랑보다 동정이 먼저 키워지는 정 반대현상이 일어났다. 이렇게 우리부부는 몸과 마음이 하나가 되었다. 그 후 체류연장을 하려고 출입국을 갔다가 남편이 예전에 가출신고를 한 것 때문에 연장을 할 수 없게 되었다. 청각장애로 타인의 말을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면서 땀을 뻘뻘 흐려가며 경찰서와 출입국을 찾아가 가출신고는 잘 못된 것이기에 취하해달라며 애원하는 모습을 보니 나의 마음 깊은 곳에서 또 아려오기 시작하였다.


조사받는 과정이 너무도 괴롭고 견디기 힘들어 남편에게 차라리 이혼하자고 하였다. 남편은 또 나에게 빌기 시작하였다. “다 나의 잘 못이니 앞으로 잘 살면 되다. 한 번만 용서해 달라. 이혼만큼은 하지말자”라고 애원 하였다. 비록 애정이 없는 혼인이지만 동정으로 시작하여 사랑을 키워보기로 하였다.


어렵게 일을 마무리 지은 후에야 우리는 체류연장을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가전의 화목과 행복은 동정과 노력, 그리고 정성으로 만들어 낼 수 있는 일은 아니었다. 글쎄 남편은 부부관계를 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더 아상 어떻게 해야 혼인관계를 유하할 수 있단 말인가? 솔직히 이런 상황에서 혼인관계를 계속 유지할 자신이 없다. 우리부부 서로에게는 안타까운 일이지만 힘들고 괴로운 이곳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2007년 3월 6일 나는 집을 나왔다. 집을 나온 후 남편과는 전화를 할 수 없는 상황이기에 시어머님에게 여러 차례 전화를 하였을 뿐 귀가하지는 않았다. 집을 나올 당시 나는 한국에 나와 있는 나의 오빠가 위암으로 수술을 받아야 하기에 간병인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시어머님에게 말씀드리고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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