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경석 목사의 장편실화>
나의 스토리(36~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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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경석 목사의 장편실화>
나의 스토리(36~39)
  • 서경석 목사
  • 승인 2007.05.2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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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6. 누군가는 말해야한다

돌이켜 보면 기사연 원장서리로 일했던 1년간은 내 평생에 있어서 가장 힘들었던 시기였다.

나는 기사연 원장서리로 취임할 당시에 실무자들에게 별로 환영을 받지 못했다. 그 당시 기독교운동의 상황은 어른들도 젊은 실무자들의 눈치를 보지 않으면 안 되는 때였는데 우선 나의 원장 취임은 젊은 실무자들의 동의 없이 이루어졌다. 말하자면 해외파가 낙하산식으로 내려와 원장으로 취임한 셈이었다.

또 하나는 내 입장이 너무 온건한 것이 문제였다. 내가 미국에서 윤한봉 그룹과 노선갈등을 보였던 것이 국내에 알려지면서 ‘서경석류의 운동은 개량주의다’라는 생각이 퍼져 있었다.
그 밖에도 당시 기독학생청년운동이 두 그룹으로 분열되어 있었는데 내가 보수적 성향의 ‘아이덴티티 파’와 가깝다는 것도 문제였다. 그 당시 기독교운동 진영은 기독교인으로서의 주체성을 강조하는 아이덴티티(IT)그룹과 사회과학적 인식에 기초한 사회운동을 강조하는 그룹으로 분열되어 서로 대립하고 있었다. 전자는 새문안교회 출신들이 중심이었고 후자는 서울제일교회 출신들이 중심이었는데, 나는 새문안교회 출신들과 인간관계가 깊다 보니 자연히 아이덴티티 그룹으로 분류되고 있었다.

딱히 이런 이유가 없었더라도 당시의 살벌한 운동권의 상황을 감안하면 나 같은 해외파가 운동권의 대표적인 연구단체에 원장으로 취임한다는 것은 충분히 논란거리가 될 일이었다.
당시 운동권의 분위기는 선배들을 존경하는 분위기가 아니었다. 그리고 오히려 선배들이 후배들의 눈치를 봐야 했던 때였다. 만약 내가 1~2년 쯤 먼저 귀국했더라면 그 당시 운동권 용어로 ‘하방(下方)’을 해서 노동현장이나 농촌에 일정기간 일하면서 부르조아의 잔재를 다 씻어내고 난 다음에야 운동권에의 복귀를 허용 받았을 것이다.

실제로 나보다 2년쯤 먼저 귀국한 박종렬 목사(기장)의 경우 미국 버클리 대학 신학교에 가서 공부하면서 나와 비슷한 생각을 갖게 되었는데도 한국에 돌아온 뒤 상당 기간 노동현장에 가서 일해야 했다.

그런데 내가 돌아온 88년 초엽에는 운동권이 87년 대선 때 ‘비판적 지지’, ‘후보 단일화’, ‘독자 후보론’으로 나뉘어진 후유증 때문에 제대로 힘을 쓰지 못할 때여서 나는 비교적 후배들의 닥달을 덜 받고 기사연 원장으로 취임할 수 있었던 셈이다.

기사연은 그 당시 진보적인 기독교운동의 싱크탱크 역할을 하는 상당히 권위있는 운동권 기관이었다. 당시 기사연에서는 기사연리포트라는 책을 발간하고 있었는데, 이 리포트는 당시 일반 학생운동권에서 조차 지침서로 삼고 있을 정도로 영향력이 컸다.
기사연은 만들어진 지 10년이 되었는데, 나 이전의 원장은 조승혁 목사, 이우정 교수, 손학규 교수였고 손 교수가 박사학위를 마치기 위해 영국으로 가는 바람에 이 자리가 공석이 되었었다.

나는 귀국하기 직전 일본에서 김경남목사에게 들었던 조언대로 원장 취임 뒤 한 동안은 실무자들과의 직접적인 마찰을 피하며 관망하는 자세를 취했다. 왜냐하면 나는 6년이나 외국에 나가 있었던 해외파였기 때문에 국내의 운동에 대해 뭐라고 말할 입장이 아니었고, 또 내가 어떤 주장을 했다고 해서 그것이 먹혀들어갈 분위기도 아니었다.
그러나 6개월 쯤 지나고 나니까 상황이 많이 심각해졌다.

88년 우리 사회의 상황은 ‘통일운동의 원년’이라고 해도 좋을 만큼 통일운동이 봇물 터지듯이 활성화되던 때였다. 학생들을 중심으로 통일대장정, 국토종단순례, 범민족대회 등이 이루어지고 있었는데, 기사연 리포트는 이런 현상을 두고 ‘민족민주운동이 더욱 크게 확대되어 가고 있다’고 쓰고 있었다.

그러나 내 생각은 달랐다. 나는 그 당시의 상황을 ‘운동권이 변화된 상황에 신축적으로 대응하지 못하고 갈수록 급진화되어 운동권이 일반국민으로부터 지지를 잃어가고 있는 중’으로 보았다.

또 운동권이 주사파에 의해 완전히 장악되어 있는 것도 내겐 충격이었다. 실제로 그 당시 기독교 운동의 거의 모든 문서들이 북한방송을 그대로 녹취해서 만들어진 것이었다.
이런 현상들을 보면서 내 고민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컸다.
‘연구단체의 원장이라고 하면 지식인 집단의 책임자 역할인데 내가 실무자들의 비판이 두려워 눈치나 보고 침묵만 하고 있어서야 되겠는가. 나이 사십을 넘기고 연구원의 長이 된 내가 후배들이 두려워 소신조차 피력하지 못한다면 어찌 스스로를 지식인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갗

하지만 한편으로는 그 당시의 살벌한 분위기가 나를 붙잡았다. 내가 운동권의 잘못을 지적하면 곧 바로 어려움에 처하게 될 게 뻔했던 터라 솔직히 운동권을 전면적으로 비판하고 나설 자신이 서지 않았다.
그때 나한테 큰 격려를 준 분은 조선일보에 칼럼을 쓰던 유근일씨였다. 그때 유근일씨는 조선일보 칼럼을 통해 소신있게 운동권의 문제를 제기하고 있었는데, 그것이 나에게 정신적으로 큰 격려가 되었다.

또 하나는 우리마당이라고 하는 지식인들의 모임이었다. 이근식, 양건, 박인제, 박재창, 김규칠, 유근일, 이영희교수 등 중도파 지식인들이 모여서 대화하는 모임이었는데, 박세일, 이각범, 김상철 등 가까운 친구들이 가입해 있었던 까닭에 나도 귀국한 직후 이 모임의 멤버가 되었다. 이 모임에 참석해서 나누는 대화들이 내게는 대단히 큰 정신적인 격려가 되었다.  
드디어 나는 결심을 굳히기 시작했다.

“지금까지 나는 나이가 젊었기 때문에 어른들을 뒤에서 쫒아가기만 하면 되었었다. 그러나 이제는 더 이상 다른 분들의 등 뒤에 숨어 있을 수 없게 되었다. 이제는 내가 앞장서서 내 목소리를 내어야 한다. 설사 내가 소신을 피력하다가 운동권에서 파문을 당하는 일이 있더라도 이제는 할 말을 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리고 그때부터 나는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기독교 모임이나 집회, 강연에 초청받아 가면 나는 ‘기독교운동은 기독교 신앙에 기초한 것이어야지 특정이념에 기초하여 기독교운동을 해서는 안된다’고 말했다. 한번은 예장 청년운동 집회에서 이런 요지의 강연을 했는데 청중의 반응이 싸늘해지는 것이 피부로 느껴졌다.

또 한 번은 기독교 운동가들이 1백여 명 정도 모인 집회에서 북한알기운동을 전면적으로 비판한 적이 있었다. 그때 운동권은 홍동근 목사의 북한방문기인 ‘미완의 귀향일기’를 보급하는 운동을 펴고 있었는데, 나는 그것이 북한의 실상을 왜곡시키고 있다고 판단하여 무척 걱정하고 있었다. 홍동근 목사는 매우 진지한 분이지만, 어머님이 북한에 계시기 때문에 북한을 비판하는 글을 쓸 수 없는 처지에 놓여 있었다.

그래서 나는 많은 기독교 운동가들이 모인 자리에서 ‘현재 운동권에서 하고 있는 북한알기운동은 북한의 실상을 잘 모르고 하는 것이다. 얼마 지나지 않아 여러분들도 북한의 실상을 잘 알게 될 터이니 그 때까지는 북한에 대한 판단을 유보하는 것이 좋겠다’는 요지의 발언을 했다.

내가 말을 마치자 침묵이 쫙 흘렀다. 당시의 상황에서 보면 나는 엄청나게 반동적인 발언을 했던 셈이다.
나는 운동권을 장악하다시피 한 이념인 주체사상에 대해서도 거침없는 비판을 했다. 주체사상의 긍정적인 부분은 인정해야 하지만, 잘못된 부분에 대해서는 가차 없이 비판해야 한다는 것이 내 주장이었다.

물론 이러한 나의 생각을 기사연의 연구 간사들이 동조할 리가 없었다. 그러다 보니 연구원 안에서 나와 실무자들 간의 대립이 그칠 날이 없었다.
내가 기사연리포트에 ‘페레스트로이카’를 소개하자고 하면 실무자들은 일제히 반대했고, 실무자들이 주체사상을 지지하는 목소리를 싣고자 하면 내가 이를 막았다.
나는 미국에서 사회주의 혁명이 불가능하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기 때문에 어떻게 해서든지 운동권의 분위기를 합리적인 방향으로 이끌고 싶었으나, 그러면 그럴수록 후배들과의 마찰은 더욱 심해졌다.

또한 나는 당시 운동권의 상황을 조사, 분석해서 그 결과를 이사회에 상세하게 전달하였지만 별로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그때 기사연에는 박형규, 김관석, 강문규, 김용복, 김상근, 김찬국, 이우정, 이효재, 서광선 등 진보적인 교회의 지도자들 대부분이 이사로 계셨지만, 그분들은 내 보고를 듣고도 이사회에서 그다지 심각하게 반응하지 않았다.
결국 계속해서 내 목소리만 돌출되었고 주사파가 주류였던 기사연 실무자들과의 관계도 더 이상 회복할 수 없을 정도가 되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곧 이어 기사연 실무자들의 ‘나를 내쫒기 위한 투쟁’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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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7. 서경석을 내쫒자



지금 생각해 봐도 참으로 고통스러운 과정이었다. 지나간 70년대 해군중위의 신분으로 민청학련과 같은 반정부 운동에 참여할 것을 결심하는 것보다 기사연 원장의 신분으로 내가 지금까지 몸담아왔던 운동권에 대해 비판의 목소리를 내는 것이 훨씬 더 어려웠다.
한번은 평소에 가깝게 지내 온 후배 한 사람을 불러서 나의 속 생각을 토로했다.

“나는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사회주의 혁명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가장 바람직한 길은 스웨덴과 같은 민주복지국가로 가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우리 우리나라를 스웨덴과 같은 나라로 만들자. 스웨덴은 부자와 가난한 사람 사이의 격차가 6배밖에 되지 않는다더라.”

그러자 그 후배는 강하게 반발했다.
“저는 사회주의 혁명이 가능하다고 생각합니다. 형님 생각에 동의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것이 나중에 빌미가 되었다. 그동안에는 나를 비판하는 진영에서 ‘서경석 목사가 너무 온건하지 않느냐’하고 막연하게 생각해 오다가 이 말을 빌미로 ‘서경석이가 개량주의자다’라는 확실한 증거를 잡힌 셈이었다.

특히 그 즈음은 기독교운동 진영이 87년 대통령 선거를 치르면서 입장이 갈려 분열되었다가 1년 정도의 기간을 거치면서 ‘기독교사회운동연합’이라는 통합 조직을 만들었던 시점이었다. 그러면서 기독교운동을 재정비해서 기독교사회운동연합의 지도 아래 모든 운동을 전개해야 한다는 계획을 세우고 있었는데, 그 일차적인 정비대상이 바로 나였다.
내가 훗날 들은 바로는 나를 기사연 원장직에서 내쫓아야 한다는 결정이 기독교사회운동연합 내에서 이루어진 후 그것을 실행하기 위한 대책소위원회가 만들어졌고 나를 내쫓기 위한 구체적인 작전까지 짰다고 한다.

기사연은 매년 1월초가 되면 사회운동의 각 분야에 있는 사람을 초대해서 향후 1년간 기사연이 어떤 문제를 연구과제로 삼으면 좋을 지를 함께 논의하는 자리를 만들었었다. 88년 초에도 그런 자리가 있었고 89년 1월 11일에도 그런 자리가 만들어졌는데, 89년의 자리는 말하자면 나를 내쫒기 위해 포문을 여는 자리가 되고 말핬다.
그 자리에는 기독교 운동권뿐만 아니라 일반 운동권 대표들도 대부분 모였는데, 각 분야 대표들의 발표가 끝나고 나서 마지막에 기독청년협의회(EYC: 과거에 내가 가장 열심히 만들었던 조직)의 대표가 일어나더니 ‘자신은 연구과제를 이야기하지 않겠다’고 말하면서 성명서 비슷한 것을 낭독했다.

“지난 1년 동안 기사연은 민족민주운동에 제대로 복무하지 못했다. 그 책임은 서경석 원장서리에게 있다. 그러니까 서 원장은 사퇴해야 한다. 만약 사퇴하지 않으면 우리는 서원장이 사퇴할 때까지 끝까지 투쟁하겠다”
내 기억으로는 대충 이런 내용이었던 것 같다.

뒤이어 몇몇 단체가 연구과제를 발표했지만 참석자들의 귀에 들어올 리가 없었고, 회의는 서둘러 끝마쳤다. 한 마디로 그날 프로그램은 완전히 풍지박산이 되었고, 당연히 기사연은 발칵 뒤집혔다.
다음 날부터 기사연 실무자들 안에서 격렬한 토론이 진행되었고, 나를 지지한 실무자가 5명, 반대하는 실무자가 12명이 되어 본격적인 분규가 시작되었다.
‘원장 사퇴’를 주장하는 실무자들은 처음에는 사퇴하는 이유를 ‘내 관점이 잘못돼서 그렇다’고 말했었지만 나중에는 ‘리더쉽 부족’ 때문으로 이유를 바꾸었다. 

나는 실무자들의 그런 주장을 받아들이기가 어려웠을 뿐 아니라 너무나 황당하고 뒤통수를 얻어맞은 기분이었다. 내 평생에 후배들로부터 이처럼 배척을 받아본 적이 없었고, 나로서는 내가 원장에서 쫓겨나야 할 정도로 잘못을 저질렀다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았다.
‘여태까지 나는 대학을 졸업한 이래로 군대생활을 제외하고는 기독교 운동 이외에 다른 직장을 가져본 적이 없었다. 20여 년간 오로지 기독교운동을 위해 헌신해 왔고 그 과정에서 감옥을 세 차례 갔었다. 그런데 내가 이렇게 매도당하고 원장에서 쫒겨나는 것이 과연 맞는가? 내가 경리부정을 저질렀는가? 아니면 목사가 오입을 하다가 발각되기라고 했는가? 기독교기관에서 생각이 온건하다는 이유로 쫓겨나는 법이 어디 있는가? 이런 일이 생긴다면 도대체 누가 앞으로 소신을 갖고 기독교운동을 하겠는가?  

한편으로는 너무나 허탈했고, 다른 한편으로는 나의 부족함이 이런 사태를 가져왔다는 생각에서 무척이나 참담했다.
나를 지지하는 실무자들이 ‘내가 원장자격이 없어서 물러나야 한다’는 주장을 반박하는 문건을 만들자 나를 내쫓으려는 실무자들은 나의 결점과 잘못을 전무 모은 책을 만들어 그것을 운동권의 여기저기에 배포하는 일까지 일어났다.
나도 그 책을 한 권 구해서 읽어 보았는데 그 책은 나를 악마로 묘사하고 있었다.
내가 한번은 집안형편이 어려운 실무자를 불러 구두표를 한 장 건네준 적이 있는데, 이 책은 이를 두고 원장이 실무자를 자기편으로 끌어 들이기 위해 뇌물을 먹였다는 식으로 표현하고 있었다. 게다가 그 책에 적혀 있는 나는 아집과 독선, 권위주의에 빠져 실무자들을 사사건건 괴롭히는 구제불능의 사람이었다.

그 책의 한 구절 한 구절을 읽는 것이 내게는 살을 에이는 듯한 고통이었다. 감옥에서 육체적으로 겪은 고통은 이때의 고통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분규가 났을 때 이사들 가운데 강문규 YMCA 사무총장, 김용복 박사 같은 분은 확고하게 내편에 서 있었는데, 내가 너무나 괴로워서 ‘사퇴를 해야겠다’고 말하자 ‘절대로 사퇴하면 안 된다’며 나를 말렸다.
내가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몇달을 보내는 동안 기사연의 스트라이크도 점점 극렬해져 갔다. 실무자들은 아침 9시에 출근하면 모두 모여서 주먹으로 벽을 치면서 ‘산자여 따르라’라는 노래를 불렀고, 오후 다섯시가 되면 다시 똑같은 행동을 하고는 집으로 돌아갔다.
실무자들은 아예 내게는 이야기를 건네지 않았고, 내가 무슨 질문을 해도 답변조차 하지 않았다. 심지어 당시 실무자들은 나를 ‘에이즈’라고 불렀다. 내가 나타나면 ‘에이즈 왔다’며 수근대곤 했다.

그러나 스트라이크를 하는 동안 기사연 일은 하나도 이루어지지 않으면서 봉급은 꼬박꼬박 받아갔기 때문에 기사연의 재정이 급속도로 악화되기 시작했다.
나는 한때 실무자들과 타협하고 극한적인 대치를 풀어보려는 마음을 가져보았으나 뜻대로 되지 않았다. 이런 형편인데도 이사회는 해결방안을 내놓지 못하고 있었다.  
솔직히 나로서는 이사회에 대해 실망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연구원의 외부인사가 원장을 향해서 사퇴하라는 요구를 하는데도 이사회가 원장을 보호하지 않고 침묵을 지키는 것이 과연 옳은가? 이사회의 어른들은 내가 미국에 있을 때 꿈에도 그리던 분들이었고, 기독교운동을 하는 과정에서도 하늘처럼 믿고 따랐던 분들이었다. 그런데 미국에서 돌아와 보니 그분들은 이제 아무런 힘이 없고 젊은 사람들에게 얹혀서 원로로서의 역할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었다.

모름지기 원로는 젊은 사람들이 잘못하면 단호하게 꾸짖을 수 있어야 하지 않는가? 나는 그런 점에서 어른들이 젊은 실무자들의 눈치를 보면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모습이 무척 안타까왔다. 솔직히 우리사회에 원로가 없구나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결국 89년 5월 나는 원장 사표를 냈고 나를 반대했던 실무자들도 모두 사표를 냈다. 기사연도 일단 문을 닫게 되었다. 그리고 결국 이 사건으로 인해 기사연은 돌이킬 수 없는 타격을 입게 되었고 그 후에는 더 이상 지난날의 활동력을 회복하지 못하고 말았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었지만, 89년 당시 운동권의 상황에서는 피할 수 없는 시대의 아픔이었다.



38. 소신있는 개량주의자가 되겠소



기사연에서 내쫓긴 사건은 내 평생에서 가장 어려웠던 때였다고 생각된다. 민청학련 사건은 내게 육체적 고통을 안겨 주었지만, 신앙의 힘으로 극복할 수 있었고 오히려 이때의 시련은 내 인생을 더 풍부하게 만들어 주었고, 더 진지하게 인생을 살아갈 수 있도록 해주었다. 그러나 기사연의 시련은 이보다 훨씬 고통스러웠다. 한편으로는 내가 기사연 원장으로서 훌륭한 리더쉽을 발휘하지 못해서 이 일이 일어난 것 같아 괴로웠고, 또 한편으로는 그렇다고 내가 원장을 사퇴해야 할 정도의 잘못을 저지르지 않았다는 생각 때문에 매우 억울해 했다


나는 그때까지 후배들로부터 도전을 받아본 적이 없었다. 후배들의 존경스러운 선배로 살아왔던 셈인데, 처음으로 후배들에게 인격적인 모독을 당하며 무참하게 짓밟히게 되니까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은 심정이 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공격한 후배들을 미워하지 않을 수 있었다. 그 이유는 내가 도량이 넓어서가 아니었다. 나 또한 과거에 그들과 똑 같은 잘못을 저지른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미국에 유학가기 전에 한 선배를 기독교 기관의 어느 직책에서 물러나게 하는 데 내가 주동이 된 적이 있었다. 꼭 내가 원해서 한 행동은 아니었지만 후배들이 나한테 찾아와서 내가 앞장서야 한다고 해서 결국 할 수 없이 총대를 멘 적이 있었고 그 결과 그 선배는 그 자리에서 물러나야 했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 선배가 후배들에 의해 내쫒김을 당할 만큼 잘못을 저지른 것도 아니었다. 오히려 몇몇 사람들의 선동으로 그 선배가 그 자리에서 물러나면 운동이 잘 풀릴 것이라는 잘못된 인식이 공감대가 되었을 뿐이다. 말하자면 그 선배는 ‘잘 풀리지 않던 당시의 운동권 상황이 만들어낸 희생양’과 같은 것이었다.
때문에 그때의 상황을 기억하는 사람들은 ‘몇 해 전 서경석이 선배를 내쫒는 일에 앞장서더니 결국엔 자기도 후배들에게 내쫓김을 당하는 구나’라는 생각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거꾸로 내가 그때 그런 잘못을 저지른 것에 대해 하느님께 감사했다.
나는 미국에 유학하는 동안 내가 앞장서서 내쫒았던 그 선배를 몇 차례 만날 기회가 있었다. 그런데 그 선배의 눈빛을 보니 나를 용서하는 것 같지 않았다. 나에 대한 섭섭한 감정이 미국에 있는 동안에도 내내 풀리지 않고 있었다. 선배의 그런 모습은 내게 또 다른 아픔을 주었고 나는 총대를 멘 것을 후회했었다.

이러한 후회의 기억 때문에 나는 나를 공격한 후배들을 기꺼이 용서했다. 그렇다. 우리가 누구를 용서한다면 그것은 우리가 잘나서, 혹은 사랑하는 마음이 커서가 아니다. 우리 스스로 죄인임을 통절하게 느끼기 때문에 하는 것이다! 그 때에만 우리는 진실로 남을 용서할 수 있는 힘을 갖는다!

내가 기사연을 그만두고 경실련 사무총장이 된지 3년쯤 지났을 때, 기사연에서 나를 비판했던 전직 실무자 한분이 나를 찾아왔었다. 그 분은 무척 미안해하는 기색이었다.
“목사님. 죄송합니다. 지금 생각하면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없었는데.”

나는 웃으면서 이렇게 말했다.
“나도 젊은 시절에 똑 같이 선배를 내쫓은 경험이 있습니다. 지난날은 잊고 앞으로 서로 돕고 지냅시다”
나는 그 분의 손을 꼭 쥐어 주었고, 그는 그 뒤 경실련 회원으로 가입했다.

내가 기사연에서 내쫓긴 사건은 운동권의 큰 화제가 되었다. 돌이켜 보면 당시 진보적인 기독교운동에게 이 사건은 너무도 불행한 사건이었다. 당시의 기독교운동이 서경석 목사 정도의 온건론조차 수용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지난날에는 독재와의 싸움 때문에 불가피하게 변혁론으로 무장했다 하더라도 일단 민주화과정에 들어서게 되면 변화된 상황에 신축성 있게 대처할 수 있어야 했다. 그런데 진보적인 기독교운동은 거꾸로 혁명이 불가능하다고 생각한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나를 내쫓았다.  

사실 나는 기사연 원장에 취임하면서 기사연을 통해 우리사회의 대안모색 작업을 하려고 했었다. 더 이상 사회구성체 논쟁에 매달리지 말고 이제는 실사구시적인 접근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이러한 시도들은 다 개량주의적인 것으로 낙인찍혔고 결국은 폐기되었다.
사실은 내가 기사연에서 내쫓김을 당했지만 실제로 내쫓김을 당한 것은 내가 아니었다. 나는 경실련을 통해 다시 역사 속에서 화려하게 부활을 했고 실제로 역사현장에서 내쫓김을 당한 것은 진보적인 기독교운동이었다.

89년 5월 어느 날 나는 당시 기사연 이사장이셨던 박형규 목사님을 찾아가 기사연의 도장과 열쇠꾸러미를 인계하였다. 열쇠를 드리면서 나는 박목사님께 이렇게 말했다.
“기사연의 젊은 간사들이 나더러 원장자격이 없다고 하는데, 앞으로 내가 정말 원장자격이 없는지 스스로 검증해 보겠습니다. 저 밑바닥으로 내려가서 다시 운동을 시작하겠습니다. 그런데 만일 그 과정에서도 내가 리더십이 없다는 평가를 받게 되면 나는 영원히 운동을 포기하고 목회를 하거나 혹은 사업을 하겠습니다. 그렇지만 이제부터는 소신 있는 개량주의자로 살겠습니다”
이 말을 박형규 목사님께 말씀드릴 즈음에는 나는 이미 경실련을 창립하는 일을 시작하고 있었다.


39. 나를 격려해 준 현직 부장판사


이 시점에서 내가 내 친구 한사람의 이야기를 삽입해야겠다.
이 친구는 김용담 대법관이다. 김용담은 나와 걷는 길이 달랐음에도 불구하고 가장 어려울 때 큰 힘이 되어 준 친구다. 용담이는 서울고등학교 18회 동기이며 나와 새문안교회를 함께 다녔다. 내가 서울대 기계과에 입학했을 때 용담이는 서울대 법대에 입학했고, 새문안교회에서 대학생회를 만들었을 때에도 내가 총무를 맡고 용담이가 서기를 맡았었다.  

친구이기는 하지만 경쟁 상대이기도 했다. 그리고 용담이와 나는 서로 취향이 달라 거리감도 있었다. 게다가 내가 민주화운동을 하느라 정신없었을 때 용담이는 데모는 안하고 고시공부만 열심히 했다. 그러더니 대학 3학년때 고시에 합격했다. 그리고 용담이는 나를 보면 “너는 할 일없이 골목대장만 하고 있다. 그래 가지고 뭐가 되겠니”라며 한심스러워 했다.
그 뒤 용담이가 사법연수원를 졸업하고 판사로 부임할 즈음에 나는 민청학련사건으로 감옥을 가서 징역 20년을 언도받았다. 그런데 내가 10개월 후에 석방되었을 때 제주도에 초임판사로 내려 가있던 용담이가 내게 여러 차례 연락하면서 꼭 한번 제주도로 내려오라고 했다.
그래서 다음 해 내처와 함께 제주도로 가서 용담이 부부와 며칠을 함께 보냈는데, 그때 나는 이 친구가 나에 대한 정이 지극한 것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 후 내가 유치장에 들락거릴 때마다 보증설 일이 있으면 모두 용담이가 서 주었다. 당시 용담이의 신분이 판사(3급이상 공무원)였으니 운동권 친구의 보증을 서다가 불이익을 당할 수도 있었겠지만 용담이는 그것을 아랑곳하지 않았다.
지방에 부임해 있을 때에도 내가 감옥에만 가면 굳이 올라와서 나를 면회했다. 이 친구가 면회를 올 때는 특별면회이기 때문에 담배도 피울 수 있었다.

80년 내가 세 번 째 감옥을 살고 나왔을 때 이 친구가 나를 만나자고 하더니 프라자호텔에서 멋진 양식을 내게 대접했다. 그러더니 미국에 유학가는 것이 좋겠다고 나를 설득했다. 나는 용담이의 말을 듣고 처음 미국유학을 고민하기 시작했고 그로부터 1년 반이 지난 후에 미국에 갈 수 있었다. 미국에 갈 때에도 나에 대한 모든 보증을 용담이가 다 서주었다. 마지막에 공항 블랙리스트에 걸려 짐만 보내고 다시 집으로 돌아와야 했을 때에도 이것을 풀어주는 일을 한 사람도 용담이다.

내가 기독교사회문제연구원 원장서리직을 그만두어야 했을 때 마침 서울대학교 관악켐퍼스 앞에 있는 다락방 교회에서 목회자를 찾는다는 소식을 접하고 이 개척교회의 목회자가 되어야겠다는 생각을 했었다. 그래서 이력서를 제출하고 용담이와 함께 그 교회에도 가 보았었다. 그런데 그 교회는 영락교회 권사회가 세운 교회였다. 영락교회의 권사회는 내 이력서를 보고 “어? 서경석 목사는 운동권이잖아. 안 돼!” 라고 하여 결국 목회의 길로 들어서려던 나의 계획은 무산되고 말았다. 개척교회 목사의 길이 막히자 용담이도 함께 낙심했다. 그때 용담이는 ‘서경석이가 여기서 좌절할 수 없다’며 자기가 고등학교 동창들에게서 모금을 하여 매달 150만원씩을 줄 터이니 네가 새로운 운동을 구상해 보라는 제안을 했다. 나는 용담이의 제안을 듣고 용기를 내어 새로운 운동을 구상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시작한 운동이 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이었다.  

돌이켜 보면 이때가 내 인생의 큰 갈림길이었다. 만일 내가 사랑방교회 담임목사가 되었더라면 나는 그 후 전형적인 목회자의 길을 갔을 것이다. 그런데 그 길이 막혔기 때문에 시민운동의 길을 가게 되었다. 아마도 나를 향한 하나님의 뜻이 시민운동에 있었던 것 같다.  

그런데 용담이가 이렇게 나를 도운 것이 훗날 용담이에게도 큰 도움이 되었다. 훗날 용담이가 대법관 후보 영순위가 되었는데 당시 시민단체들이 대법원이 너무 보수적이라는 문제제기를 할 때였기 때문에 용담이도 자칫하면 대법관이 되지 못할 뻔하였다. 그런데 용담이가 나를 돕는 것을 통해 민주화운동을 배후에서 도왔고 또 경실련 창립의 산파역을 했다는 사실이 밝혀지면서 용담이가 그렇게 보수적인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설명하는 변증이 되었다. 이러한 사실도 도움이 되어서 용담이는 어려움 없이 대법관이 되었다.

그래서 나는 내 친구 김용담 대법관이 자랑스럽다. 서로 다른 길을 갔지만 우리의 우정은 어떤 어려움도 극복하면서 계속 이어졌고 그런 아름다운 관계가 서로에게 큰 도움이 되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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