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어느 날 시골에 내려갔다가 길옆에서 한 할아버지가 깊숙한 구덩이를 힘겹게 메우는 모습을 보았다. 땡볕에 무거운 삽을 들고 한 삽 한 삽 흙을 구덩이에 퍼 넣는 그 구부정한 모습이 너무나도 안스러워 그대로 지나칠 수 없어 조용히 다가갔다.
《할아버지, 이 무더운 땡볕에 무슨 구뎅이를 메우십니까?》
허리를 펜 할아버지의 얼굴에서는 땀방울이 주름을 타고 소리없이 흘러내렸다.
나를 한참 뜯어보던 할아버지가 느긋한 웃음을 지으셨다.
《오래전부터 있은 구뎅인데 누구하나 손대는 사람이 없잖수. 길옆이라 보기 싫고 위험하잖수.》
《그럼 해진 서늘한 저녁 편에 하실 일이지 이렇게 땀을 흘리시며 하십니까?》
《이렇게 쓸모없는 구뎅이는 인차 메워야 하는거우.》
할아버지의 꾸밈없는 얼굴을 읽으며 나는 그 책임심에 못내 탐복했다. 그리고 내 자신에 대해서도 한번쯤은 반성해볼 기회라고 생각했다.
기실 우리 주위에는 그러한 구뎅이같은 공간들이 많고 많다. 그런 공간들에 대해 조금만 신경을 쓴다면 내가 해야 할 일들과 내가 하고 있는 일들에 대해 얼마간 확신이 서게 될 것이다. 그리고 주위에 있는 사람들과 사회상의 이러저러한 문제들에 대해서도 요해가 가게 될 것이다.
실패를 거듭하기보다 확신 있는 자세로 현실을 대하는것이 보다 명지한 선택이라고 여긴다. 그러자면 내가 빠질 수 있는 그러한 구덩이 같은 공간을 메울 수 있는 재간을 키워야 하지 않을까. 그리고 그런 공간을 볼 줄 아는 지혜도 가져야 한다. 내가 가지고 있는 공간, 남한테 보이는 공간, 그 모든 것을 보아내고 메울 수 있는 용기도 필요하다.
배가 고프다는 것은 위에 공간이 생겼다는 것을 의미하며 가난하다는 것은 돈가방이 비었다는 것을 말해주는 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항상 그 가난이 남겨놓은 비어있는 공간을 채우려고 분주스럽게 뛰어다니고 또 이별과 상봉을 거듭하면서 울고 웃는 것이다. 그래도 다는 채울 수 없는 그 공간, 채우려고 애쓰면 애쓸수록 더 많은 공간이 생겨나는 것은 또 무엇 때문일까?
가난이 싫어서, 남의 손에 들린 두툼한 돈 가방이 부러워서, 비어있는 내 방안에 내가 소원하던 모든 것들을 채우기 위해 사랑하는 가정을 등지고 찬비내리는 이국타향의 거리를 외롭게 거닐어야 하고 이별과 그리움의 눈물로 빈 가슴을 메우는 것이리라. 하나를 얻기 위해 열을 잃으면서도 짓궂게 그런 공간을 채우려고 애쓰는 사람들, 지겨운 인생살이 하면서도 소박한 작은 희망을 가슴속에 크게 채우는 것도 바로 하나의 이념같은 것이리라.
그러나 어떤 공간은 메우기 쉬운 것이 아니다. 한 것은 거기엔 욕심을 동반한 의미지가 숨겨져 있기때문이다. 욕심을 동반한 공간, 그 공간이란 도대체 얼마나 넓을까? 그리고 그 공간에 얼마마한 욕심을 채울 수 있을까? 그건 그 누구도 상상할 수 없다. 부유를 갈망하는 욕망, 권력을 바라는 욕심, 그러한 공간에는 사와 리가 얽매여져있고 그것이 서로 반죽된 끈적한 비리가 차있는 것이다. 그러한 비리는 서로 뒤섞여 악리가 되고 마는 것이 아닌가?
인간은 자기절로 관을 만들고 구뎅이를 파고 거기에 자신의 주검을 묻는다. 자기가 가지는 공간이 얼마나 넓은지도 모른채 모든 것에 만족을 모르고 있다. 그러하기에 자기의 주검까지도 그 공간을 채우는데 쓰고 있는 것이다. 인간은 이렇게 자기의 주검을 가지고도 공간을 채울 수 있는 욕심을 부릴 수 있고 그러하기에 이 세상의 모든 것을 내 것으로 만들지 못해 앙앙불락하고있는 것이 아닌가? 삶과 죽음 앞에서 인간이 종종 죽음을 택하고있는 것도 바로 자기의 공간에 채워야 할 욕심이 모자라기 때문이다. 부리고 있는 욕심에는 한도가 있는 것이기에 그 욕심대신에 자기의 주검도 서슴치 않고 내놓는 것이다.
욕심의 공간, 그 공간에서 허우적거리는 인간들, 그리고 그 공간을 메우느라 고심하고 있는 인간들의 현주소는 도대체 어딜까? 거기에는 천당이 있을 것인가? 아니면 지옥이 있을 것인가? 거기에도 공간이 있을진대 비리와 악리가 존재할 것은 분명한 도리이다.
그래 우리한테 원시사회에서만 있을 수 있는 부시돌과 돌칼, 그리고 돌창만이 있어야 될 것인가? 그리고 주머니없이 나무잎으로 아래도리만 가려야 할것 인가? 그것도 아니라면 빈손에 아무것도 걸치지 않는 원숭이 같아야만 될 것인가?
인간은 원초적인 심리를 늘 보여 주고 있다. 세상에 금방 태어난 아이한테 젖을 빠는 벗을 배워준다면 얼마나 웃기는 일일까? 아기는 열달 동안 굶은 배를 채우느라 배워주지도 않은 젖 빠는 법을 선천적으로 알고있는 것이다.
또 이런 이야기가 있다. 아들을 속세를 떠난 깨끗한 사람으로 만들기 위해 아버지는 아들을 여자를 볼 수 없는 방안에 가둬놓고 세상과 격리시켜 키웠다. 어느 날 다 큰 아들이 아버지와 함께 처음으로 바깥세상으로 나갔다가 곁을 자나쳐 가는 예쁜 처녀아이를 보고 이렇게 말하더란다.
《아버지, 난 저 짐승을 가지고 놀겠습니다.》
인간의 욕심은 그 누가 배워준 것이 아니다. 인간자신이 자기가 살아가기 위해 파놓은 하나의 구뎅이다. 하지만 각자가 하나씩만 파놓고 있던 그 구뎅이가 나중에는 수없이 생겨난 것이다. 그래서 거기에 빠지면 헤어 나오지 못하고 마는 것이 아닌가?
시골의 그 할아버지도 구뎅이를 메우면서 또 다른 구뎅이가 생겨나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을까? 그 할아버지가 구뎅이를 메우면서 흘리는 땀이 헛되게 할 수는 없는 것이다. 내 것이 아닌 남의 것을 메워주는 그 마음가짐은 참으로 소중한 것이다. 내 호주머니의 돈을 꺼내 여린 가슴에 사랑을 채워주고 내 몸속에서 흐르는 뜨거운 피를 뽑아 빈 심장에 채워주는 그 고마움, 그러한 사회가 진정 빈 공간이 없는 세계가 아닐까?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고 포섭하는 것이 바로 서로의 공간을 메워주는 과정이다.
그리고 그 공간을 메우는 이유는 나 그리고 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평탄한 길을 걸어가기 위함이 아니겠는가? 나 혼자만이 아닌 세상, 그러한 세상에 내가 원하는 모든 것을 채운다면 풍족한 인심이 될 것이고 뜨거운 인간애가 흐를 것이다.
나는 오늘도 삽을 메고 구뎅이 메우러 간다. 오늘은 또 구뎅이 몇 개를 메울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