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제된 천재의 “날개”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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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제된 천재의 “날개”1)
  • 전유재
  • 승인 2007.05.0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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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구조주의로 바라본 “날개”의 의미 -

    1. 박제가 되어 버린 천재를 아시오?

 

“박제(剝製)가 되어 버린 천재를 아시오?”소설을 시작하면서 “날개”는 도발적 언사로 포석을 깐다. 이 포석은 분명히 “바둑판”이라는 전제에서 비롯된 사태이다. 이러한 포석을 깔았다는 의미는, 李霜 스스로의 冒頭적 집약발언에서 강조하듯이, ‘그 위에다 나는 위트와 패러독스를 바둑 포석처럼 늘어놓았소. 가증할 상식의 병이오.’라는 한탄 속에서 미리 독자들에게 확고한 신뢰를 주는 당위를 확보하고자하는 깊은 배려의 의미가 극도로 강조된다.

작가가 늘어놓은 포석이 결코 바둑판을 떠날 수 없다는 겸허하고 솔직한 발언에 의구심을 품고 시작하면, 그 ‘위트와 패러독스’의 문자적 담백함마저 심히 회의의 눈길로 바라볼 수밖에 없는 입장으로 독자의 인식지평이 제약될 위험성이 있다. 가끔씩 문자그대로의 의미전달을 수긍한다는 최소한의 존중을 기반으로, ‘위트와 패러독스’가 엄존하는 문자체계로 소설이 집약되었다고 믿으면서 들어갈 때, 구조주의적 관점의 기본 설정인 유기체적 표현수단으로서의 언어학-서사담론의 의미가 더욱 선명해질 것이다. 말하자면, 어떤 실체든 경험이든 그것의 완전한 의미는 그것을 부분으로 삼고 있는 구조 안으로 통합되어짐으로써 비로소 의식될 수 있다는 것2)으로서 소설이 읽혀지고 해석되어지는 구조주의적 인식체계의 기본원리에 부합되는 태도가 된다. 그러나 또한 그러기 위해서 우선은 발화자의 발화 자체에 깊은 신뢰를 주는 청자, 관찰자의 모습이 되어야 할 필요가 있다.

소설 내적 맥락을 충분히 존중하는 입장에서 의미해석을 진행하는 태도라면, 바둑판3)을 인간세의 구체적인 현현으로 환원하여 이해하는 인식에 도달하기까지 그리 어려운 분석을 요하지는 않게 된다. 20세기 초의 특정한 실존적 인물의 보편적 인식이 도달한 높은 경지에 대한 구체적 표현이 “날개”로 나타났고 그 의미에 대한 복합적인 해석을 다시 집약하여 단도직입적으로 말하자면 다음과 같다.

결국은 단 한마디이다. “박제(剝製)가 되어 버린 천재를 아시오?” 이 한마디의 역설에 대한 거대한 주석이 “날개”의 전부라고 말할 수 도 있다. 그 “날개”를 지어낸 자가 실존적 인물로서의 그 누구였던 간에, 李霜이라고 지칭되는 실로 “사실주의”적인 그러한 인간이라고 안심하고 말할 수 있던 없던 간에, 구조주의적 입장을 충분히 공감한 ‘역점의 이동’을 기본 관점으로 수용하는 입장에서는, 작품 내적 의미의 해석에 우선적인 중요성을 두는 자세가 된다. 그리고 상기 한마디로 그 의미의 전부를 응집시켜 해석할 수 있다.

박제된 천재가 있다면, 천재를 박제시킨 원인에 대한 해석은 좀 더 긴 설명으로 나타난다. 이 또한 “박제(剝製)가 되어 버린 천재를 아시오?”에 대한 질문에 대한 진일보된 설명에 불과하다. 즉, 처음 소설이 시작될 때의 전부의 얼마 길지도 않는 독백이 그것이다. 그 독백에서 ‘위트와 패러독스’를 미리 알려준 것을 분명하게 감안한다면, 너무나 직설적이고 솔직한 고백에 불과한 언설로서 그것을 수용할 수밖에 없음을 또한 알게 된다. 다시 말해, 첫 한마디의 맹렬한 질문에 대한 해석이 독백의 장절4)로 확대되고, 그 장절에 대한 진일보의 해석이 소설 본론으로 될 것이다. 이러한 중층적 구조에 대한 포괄적인 의미론적 해석이 결국 다시 “박제(剝製)가 되어 버린 천재를 아시오?”라는 질문에 대한 해답으로 수렴된다. 그리고 그 해답은 제목으로 명료하게 집약된다. 치열한 천착 끝에, 박제된 천재는 결코 “날개”를 잃지는 않았다는 해답이 얻어지는데서 본 비평이 그 나름대로의 의미를 가질 수 있도록 기대해보도록 한다. 더 강조하여 말한다면, 극단적 실험이 냉철하게 모두 끝나버린 궁극적인 상황에서 오히려 한 ‘인간’이 결코 날개를 잃을 수 없는 의미를 인간 내적으로 확인할 수밖에 없다는 불가피의 수용 의미에서 소설 시작과 함께 던져진 질문에 대해 최종적 해답을 그대로 넘겨받아 전반 의미를 담아보게 된다.5)

따라서 ‘구조주의 비평’은 문학작품을 하나의 총체적 구조로 보고 그 구조를 이루고 있는 요소들을 텍스트 안에서 찾아 문학의 독자적이고 자족적인 존재성을 밝히려는 비평방법으로, 문학텍스트 내에 있는 구조들의 보편적인 현존과 그 구조들 사이의 필연적인 관련을 기본 원리로 삼고 있다6)는 전제를 충분히 존중하여 “날개”에 결부시키는 작업으로, “박제(剝製)가 되어 버린 천재를 아시오?”를 결합축으로, 이 결합축을 위한 수많은 언어적-수사학적-해석적 논의를 선택축으로 하여 논의를 전개해 나갈 것이다7). 선택축에서는 해답을 위한 여러 층위8)가 형성될 것이고, 결국은 “박제가 되어 버린”에 대한 논의, “천재”에 대한 논의로 선택축에서 결합축으로의 거대한 투사가 일어나게 되고, 그 투사로 말미암아 “아시오?9)”에 대한 해답이 있게 된다. 그 해답은 다름 아닌, 작가 스스로가 밝힌 ‘위트와 패러독스’를 걷어내고 그대로 발현시킨 “날개”로 최종 귀착된다.10)

 

2. 박제가 되어 버린, 박제를 자행한 냉혹한 실험

 

박제된 자가, 박제되기 전의 상태에서는 생명의 어떠한 형태를 고스란히 간직했던 생명론적 그 무엇이었음에 틀림이 없다. 말하자면, 생명이라는 전제가 선행하지 않는 경우에 “박제”의 구체적 행위를 실행할 수 없음이 분명하다. 또한, “박제”를 주체의 입장에서 객화된 타자를 향하여 능동적으로 진행하느냐 아니면 역으로 외부적 영향력에 의해 주체 자체가 수동적으로 박제를 당하느냐에 따라서 문제의 초점이 너무나 뚜렷하게 달라진다. 전자의 경우라면 자동사의 자율적 모습으로 타자에 대한 영향력의 행사에 역점을 둘 것이요, 후자의 경우라면 타동사의 담론으로 귀결되는 영역에서 무한증식을 진행할 것이다.11)

“박제”를 둘러싸고 행위의 규정적 의미를 나타내줄 타동사적 술부는 “박제가 되어 버린”의 문구로 뚜렷하게 나타난다. 전경화된 현현이 그 현현을 가능토록 강요한 외부 요인을 다음과 같은 몇 가지로 나열하여 범주화시킨다.

 

육신이 흐느적흐느적하도록 피로했을 때만 정신이 은화(銀貨)처럼 맑소. 니코틴이 내 횟배 앓는 뱃속으로 스미면 머리 속에 으례 백지가 준비되는 법이오.

 

“육신이 흐느적흐느적하도록” 외부가 “나”를 괴롭히는 인간세의 힘을 세 종류로 나열해본다. 먼저는 폭력이요, 다음으로 재력이며 나머지 하나는 매력이다. 폭력은 물리적 강제력이 될 것이고 재력은 경제적 강제력이며 매력은 심리적 강제력이다.

폭력은 제도적 합의에 의한 자연스러운 이행준거로 등장한다. “나”는 나의 그 여자를 “아내”라는 명칭으로 부를 수 있도록 결혼이라는 제도적 힘을 이미 빌렸다. 결혼에 의한 아내로서의 위치 설정에서 얻어 올 수 있는 막강한 힘(Power)에 대해 “나”는 행사의 권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행사할 능력을 괴이할 정도로 상실하였고 “상실한 판단력”에 의해 오히려 스스로를 아내에게 내맡기는 처참한 위치로 상정된다. “만일 내가 그런 좀 적극적인 것을 궁리해 내었을 경우에 나는 반드시 내 아내와 의논하여야 할 것이고, 그러면 반드시 나의 아내에게 꾸지람을 들을 것이고 ― 나는 꾸지람이 무서웠다느니보다는 성가셨다.”고 유감없이 고백한다. 자발적인 포기인지, 아니면 부질없는 짓거리에 의한 소기한 바의, 즉 아내를 아내로서의 자격과 위치로서 인정하고 스스로는 남편으로서 마주하여 교감하는 상황의 연출을 진행해봄직한 과정적 염원의 획득 불가능에 대한 자각인지 자체가 불분명하게, “나”는 무서움을 넘어서 성가심의 경지로 치달아 올라가 아내와의 관계설정이 무조건 타율적이다. 마침내 “나는 내 눈으로는 절대로 보아서는 안 될 것을 그만 딱 보아 버리고 만 것이다. 나는 얼떨결에 그만 냉큼 미닫이를 닫고 그리고 현기증이 나는 것을 진정시키느라고 잠깐 고개를 숙이고 눈을 감고 기둥을 짚고 섰자니까 일 초 여유도 없이 홱 미닫이가 다시 열리더니 매무새를 풀어헤친 아내가 불쑥 내밀면서 내 멱살을 잡는 것이다. 나는 그만 어지러워서 그냥 나둥그러졌다. 그랬더니 아내는 넘어진 내 위에 덮치면서 내 살을 물어뜯는 것이다. 아파 죽겠다. 나는 사실 반항할 의사도, 힘도 없어서 그냥 넙죽 엎드려 있으면서 어떻게 되나 보고 있자니가, 뒤이어 남자가 나오는 것 같더니 아내를 한아름에 덥썩 안아 가지고 방으로 들어가는 것이다. 아내는 아무말없이 다소곳이 그렇게 안겨 들어가는 것이 내 눈에 여간 미운 것이 아니다. 밉다. 아내는 너 밤 새워 가면서 도둑질하러 다니느냐, 계집질하러 다니느냐고 발악이다. 이것은 참 너무 억울하다. 나는 어안이 벙벙하여 도무지 입이 벌어지지를 않았다.”

결국은 “밉다”12). “의논”이라는 지극히 평등한 위치에서의 교감 자체가 불가능한 상황을 역으로 아내가 진일보 파괴시켜 제도적, 윤리적 힘을 “나”에게 부가한다. 따라서 “의논”은 무의미한 것이고 취약한 것의 위상 자체도 확보하지 못하면서 깔끔하게 소멸된다. “이것은 참 너무 억울하다.” 폭력은 혼인을 빙자하여 아내의 입장에서 “나”의 “의논”자세를 무시하고 윤리적 가치판단의 강요를 설득하면서 “내 살을 물어뜯는” 행위로 극대화된다. “박제가 되어 버린” 상황을 폭력의 범주로 구체화시킨 혼인의 관계로 강하게 설득한다.

재력은 아내와의 관계를 유지하는데 있어서 가장 빈번하게 사용되는 강제력이 된다. 物化된, 소외를 넘어 타자화의 영역 극한 밖으로 내쳐진 “나”를 추스르기 위해 아내는 돈으로 보상하는 미약한 반응을 어느 정도 나타낸다. “아내가 무엇이라고 지껄이고 갔는지 귀에 남아 있을 리가 없다. 다만, 내 머리맡에 아내가 놓고 간 은화가 전등불에 흐릿하게 빛나고 있을 뿐이다. 그 금고형 벙어리 속에 고 은화가 얼마큼이나 모였을까. 나는 그러나 그것을 쳐들어 보지 않았다. 그저 아무런 의욕도 기원도 없이 그 단추구멍처럼 생긴 틈바구니로 은화를 들여뜨려 둘 뿐이었다.”

보상의 약속체계는 암묵적으로 재력, 즉 경제적 강제력으로 구속 되고 “나”는 돈의 저력을 “은화를 들어뜨려 둘 뿐인” 행위로 느끼던 초기 단계를 한동안 지속하다가 “내객이 아내에게 돈을 놓고 가는 것이나 아내가 내게 돈을 놓고 가는 것이나 일종의 쾌감 ― 그 외의 다른 아무런 이유도 없는 것이 아닐까 하는 것을 나는 또 이불 속에서 연구하기 시작하였다. 쾌감이라면 어떤 종류의 쾌감일까를 계속하여 연구하였다”는 비약에 이르러, 드디어 “내게는 거의 의식이라는 것이 없었다. 나는 아내 이불 위에 엎드려지면서 바지 포켓 속에서 그 돈 오 원을 꺼내 아내 손에 쥐어 준 것을 간신히 기억할 뿐이다. 이튿날 잠이 깨었을 때 나는 내 아내 방 아내 이불 속에 있었다. 이것이 이 33번지에서 살기 시작한 이래 내가 아내 방에서 잔 맨 처음이었다”는 일부의 성과를 거둔다. 돈의 위력이 아내에게 돈을 쥐어주는 것으로서 아내 방에서 자는 특권까지 유도하는 획기적인 상황을 연출하기에 이르러서야 “나”는 돈의 의미를 특별하게 깨닫는다. 재력 역시 “나”를 “박제가 되어 버린” 상황에서 간신히 구출하기 위해 아내와의 관계설정이 가능할 기능이 있다는 미약한 희망을 던져주면서 착시현상을 잠깐 보여주지만, “나”는 이유가 불분명하게도13) “돈”을 자력으로 확보할만한 능력이 원천적으로 부재하다. 돈은 아내가 “나”에게 건네준 것이요, 그 돈을 나는 다시 아내에게 반납할 뿐이다. 돈을 통한 매개현상은 “나”와 “아내”사이 가장 합리적인 간접 소통방식이었을지도 모른다.

 

이런 여인의 반(半) ― 그것은 온갖 것의 반이오 ― 만을 영수(領收)14)하는 생활을 설계한다는 말이오. 그런 생활 속에 한 발만 들여 놓고 흡사 두개의 태양처럼 마주 쳐다보면서 낄낄거리는 것이오. 나는 아마 어지간히 인생의 제행(諸行)이 싱거워서 견딜 수가 없게끔 되고 그만 둔 모양이요. 굿바이.

 

“나”는 오직 아내를 영수(領水)하는 생활을 설계하고 있을 뿐이고, 그 영수의 대상은 다름 아닌 “아내”이다. 아내는 상식적인 아내로서가 아니라 재력에 의해 매개되는 특별한 상품으로서 “나”에게 위태롭게 영수된다. 그리고 “두개의 태양처럼 마주 쳐다보면서 낄낄거리는” 불안하면서도 익살맞은 생활을 아슬아슬하게 영위한다.

매력은 “나”의 영원한 견지를 표방할만하게 내걸은, 강력한 행사력을 원하는 생명이상의 보존가치로 권장된다. 어설픈 폭력도, 경박한 재력도 “나”의 추구영역이 본질적으로는 아니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나”에게는 “나”를 나타낼만한 매력 자체를 보여줄 근거가 전무하다.

“나는 내 방 이상의 서늘한 방도 또 따뜻한 방도 희망하지는 않았다. 이 이상으로 밝거나 이 이상으로 아늑한 방은 원하지 않았다”고 아무리 강조하여도 그것은 무능에 속하는 범속한 원시욕구로 여겨지는 “나”의 심리 내 사태일 뿐이다. 그리고는 “그냥 그날그날을 그저 까닭없이 펀둥펀둥 게으르고만 있으면 만사는 그만이었던 것이다”고 유치하게 고백한다. “그런 때는 아무 제목으로나 제목을 하나 골라서 연구하였다. 나는 내 좀 축축한 이불 속에서 참 여러 가지 발명도 하였고 논문도 많이 썼다. 시도 많이 지었다”는 어마어마한 정신적 추구가 부질없이 무너지면서 단순한 “나”의 범주에서 모든 것이 깨끗하게 끝나는 정도로 가볍게 일상은 흘러간다. 그래서 결국 “나에게는 인간사회가 스스러웠다. 생활이 스스러웠다. 모두가 서먹서먹할 뿐이었다” 분명하게 호소한다. 아메바와 다를 바가 없는 생활패턴 속에서 “나는 아내의 이름을 속으로만 한 번 불러 모았다. “연심(蓮心)이!”― 하고……”

여기에 “나”의 전부가 있었다. 진정한 한 인간으로서, 한 남자로서 한 여자를 죽도록 사랑하는 것 이상의 기대와 의미가 따로 없었다. 그 사랑은 에로틱도 아니요, 충동도 아니며 단순한 인간 대 인간의 겸허하고 스스로 그러함의 만남이라는 최저한의 요구가 보장된 상태의 소박성에 지나지 않았다. 그것이 전편의 소설을 흐르면서도 전혀 나타나지 못하게 될 때, 조급증과 혐오감, 연민의 눈길과 부질없는 분노가 엉망이 된 정신 상태로 잘 파괴된 “나”에게 강요될 수 없음을 알고 한탄을 금치 못함이 독자에게는 말 못할 혹독한 고문이다.

그러나 상황에 대해 워낙 처음부터 부정하고 바람직한 질서로의 회복을 요하는 강한 설득은 있었다. 그 호통의 강렬함과 지대함이 경악과 조급증을 단숨에 폭파시키는 수준에서 지독하게 터져 나오는 폭발은 정서적 오르가즘을 넘어 모든 것을 압도하는 함성 그 자체이다.

 

19세기는 될 수 있거든 봉쇄하여 버리오. 도스토예프스키 정신이란 자칫하면 낭비일 것 같소. 위고를 불란서의 빵 한 조각 이라고는 누가 그랬는지 지언(至言)인 듯 싶소. 그러나 인생, 혹은 그 모형에 있어서 디테일 때문에 속는다거나 해서야 되겠소? 화(禍)를 보지 마오. 부디 그대께 고(告)하는 것이니......

 

도대체 이것은 또한 무슨 헛소리란 말인가? 헛소리가 아니다. 진정하게 한 사람을 끝까지 사랑해보지 못하게 끝까지 내몰린 “나”의 액면 그대로의 진실한 발로일 뿐이다. “나”는 모든 디테일을 생활의 최저상태에서 절대적으로 체험하고 도발적인 언사를 한번 내지름으로써 가치라고 추구된 어마어마한 모든 집합의 쓰레기에서 오는 졸렬함을 단숨에 파괴해버리는 저력은 담담하게 내보인다. “나”의 매력은 왜 이토록 이상야릇하게도 포장도 아니고, 변명도 아니면서도 액면 그대로가 전달되지 않는 대립현상15)에 함몰되는지, 그러면서도 처음 시작부터 여과 없이 던져지는지 갈수록 무섭게 “나”에게, 그 “나”를 읽어 내려가는 모두에게 공격을 가해오는 형태로 지속되다가 급기야 돌연 스토리가 멈추려고 하는데서 전혀 갈피가 잡히지 않는다16). 그래서 결론적으로 어이없게도 “박제가 되어 버린” 결과만이 그대로 남으면서 해답은 말 그 자체에 전혀 들어있지 않은 것처럼 심하게 공허한 상태를 보여주는 듯이 착각할 정도의 효과를 만들어낸다. 따라서 하지 않는 서술을 서둘러 찾아야 할 충동만 밑바탕에 깔려있는 듯 한 효과가 끝없이 증폭된다17).

기실은 매력의 의미를 극도로 끌어올리기 위해 사용된 두 덩어리의 문장 영역, 고백부분과 소설 본론부분의 극렬한 불협화음이 “나”를 변호하는 최종의 표현방법이다. 말하자면 지극히 온전한 “나”와 지극히 불온전한 “나”의 강제적 결합이 당혹감을 감출 수 없는 형태로 봉합되고자 처절하게 노력되어 지는 것으로 소설이 이루어진다는 데서 모든 “위트와 패러독스”가 성립한다.18)

“박제가 되어 버린”에 대한 구구한 설명이, 폭력, 재력을 소설본론의 “나”의 제반 행위양태에 위임하여 설명을 시도하고, 매력은 독백부분과 소설본론을 동시에 아우르는 범주에서 보다 효과적으로 제시하여 두 차원의 전혀 다른 “나”를 등장시키고 통합시키는 과정에서 해답을 준다.

여기에다 박제를 자행한 냉혹한 실험마저 덧붙여지는데서 극적 효과는 더욱 높은 차원으로 비약한다. 냉혹한 실험은 냉혹한 관찰자가 있을 때만 가능하다. 그 관찰자는 스스로를 유리시켜 “나”를 “나”의 전부에서 따로 분리시켜 관찰하는 큰 용기의 결단으로 보여준다. 작가는 솔직한, 너무나 솔직한 방식으로 “나”의 극단적 실험을 떳떳하게 밝힌다. 스스로를 위조하기 시작한 것이다.

 

그대 자신을 위조(僞造)19)하는 것도 할 만한 일이오. 그대의 작품은 한 번도 본 일이 없는 기성품에 의하여 차라리 경편(輕便)하고 고매(高邁)하리다.

 

작가는 극도로 판단력이 저하된 “나”를 극도로 열악하여 소외가 이루어질 수 밖에 없는 환경 속에 집어넣은 후 냉철한 관찰을 시도한다. 말하자면 스스로가 독백에서 증명해낸 명제에 대해 그 역으로의 불합리성을 부과함으로써 야기된 제반 결과에 대한 부정을 보고 싶어 한다. 그리고 그 결과의 비참함에 의해 증명되는 배제의 논리는 크게 성공한다. 그래서 정면긍정이 아니라 하나하나 부정해 나가는 과정에서 단 하나의 표준 답안이 남는 방법으로 독백의 정확함을 증명한다. 독백 중의 “나”는 그것이 “그대의 작품은 한 번도 본적이 없는 기성품”이라고 미리 자신의 실험을 선언한다. 말하자면 작가는 명백한 “거짓말”을 하고 있으며, 그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자체까지도 떳떳하게 보여준다. 오히려 그러함으로써 “문학적 사실”임을 증명해낸다. 그리고 텍스트의 절대 대부분 비중을 그러한 被실험자인 “나”의 한계상황을 관찰하고 기록하는데 소모한다20). 용기 있게도 작가는 “나”를 철저히 타자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나”의 최고의 가해자이다.

이로부터 얻어내는 효과는 경이적이다. 최대한 비열하게 “나”는 愚者로 전락되고, 한계상황 효용성의 극대화가 그 결과로 드러난다. “나는 그러나 그들의 아무와도 놀지 않는다. 놀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인사도 않는다. 나는 내 아내와 인사하는 외에 누구와도 인사하고 싶지 않았다”던가, “나는 쪼꼬만 ‘돋보기’를 꺼내 가지고 아내만이 사용하는 지리가미(휴지)를 끄실려 가면서 불장난을 하고 논다. 평행광선을 굴절시켜서 한 초점에 모아 가지고 고 초점이 따끈따끈해지다가 마지막에는 종이를 끄실르기 시작하고 가느다란 연기를 내이면서 드디어 구멍을 뚫어 놓는 데까지에 이르는, 고 얼마 안되는 동안의 초조한 맛이 죽고 싶을 만치 내게는 재미있었다”던가를 읊조리듯 엮어감으로써 극도의 단절, 극한의 본능체계를 작동시켜 인간사이 결합과 교감의 자연스러움과 소중함을 극명하게 노출시킨다.

종합하면, “박제가 되어진, 박제를 자행한”이라는 술부가 “나”라는 주어를 이어주며 동시에, 한 치의 양보도 없이 영악하게 달라붙는다. 

 

3. 천재를 어떻게 아시오?

 

나는 내 비범한 발육을 회고하여 세상을 보는 안목을 규정하였소.

 

천재는 기실 천재일 필요가 없다는 부정적 측면으로 “나”는 “나”를 본다. 왜냐하면 그 천재는 보지 말아야 할 것까지도 간파하여, 최소한의 원시적 행복을 느낄 자유마저 스스로에 의해 박탈당했다는 상대적 소외감의 괴로움을 견뎌내기가 어려웠기 때문이다21).

“나는 유쾌하오. 이런 때 연애까지가 유쾌하오.”하고 작가는 소망을 말한다. 그리고 이것은 인간의 인간다움 영역에 당연하게 속하게 될 보장된 권리라고 그 당위를 설명할 필요도 없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것은, 그것을 이룩할 수 없는 깊은 사회적 비애가 개인이자 한 인간으로서의 보편자를 박탈하는 구조적 모순을 “나”는 나의 “우매”한 설정 속에서 필요이상으로 체험하고 만끽하게 된다.

“나는 그 여러 조각의 치마에서 늘 아내의 동(胴)체와 그 동체가 될 수 있는 여러 가지 포우즈를 연상하고 연상하면서 내 마음은 늘 점잖지 못하다”는 본능적 욕구에 대한 천재이자 생물학적 정상인간의 자연스러운 충동, “나날이 눈에 보이듯이 기운이 줄어들어 갔다. 영양 부족으로 하여 몸뚱이 곳곳의 뼈가 불쑥불숙 내밀었다. 하룻밤 사이에도 수십 차를 돌쳐 눕지 않고는 여기저기가 배겨서 나는 배겨내일 수가 없었다”는 육체적 피로에 대한 어린애 같은 호소, “허리를 굽혀서 나는 그저 금붕어나 들여다 보고 있었다. 금붕어는 참 잘들도 생겼다. 작은 놈은 작은 놈대로 큰 놈은 큰 놈대로 다 ― 싱싱하니 보기 좋았다. 내리비치는 오월 햇살에 금붕어들은 그릇 바탕에 그림자를 내려뜨렸다. 지느러미는 하늘하늘 손수건을 흔드는 흉내를 낸다. 나는 이 지느러미 수효를 헤어 보기도 하면서 굽힌 허리를 좀처럼 펴지 않았다. 등허리가 따뜻하다.”는 사고와 추리 제거의 자연 상태를 느끼는 심미성에는 천재의 기미마저도 보이지 않는다. “나”는 정상적인 의미에서의 보통 인간 일뿐이다. 그 보통 인간을 느끼기에 이미 너무나도 급작스럽게 닥친 문명세계의 자아증식은 인간을 인간답지 않은 몰골로 재구조화여 인간 밖 영역으로 끊임없이 밀어내고, “나”의 그 섬세한 감성은 강력하고 거대한 문명의 왜곡된 물줄기에 가장 민감하게 정면으로 관통 당한다. 그것은 차라리 인간심성의 죽음으로 다가온다. 그 정신적 죽음을 미리 설정하고, 천재의 바보성을 선보여 얻어온 세계에서도 그나마 상기 느낌구조는 엄존한다.

 

감정은 어떤 포우즈(그 포우즈의 원소(元素)만을 지적하는 것이 아닌지 나도 모르겠소). 그 포우즈가 부동자세에까지 고도화할 때 감정은 딱 공급을 정지합네다.

 

“부동자세까지 고도화할 때 감정을 딱 공급을 정지”하는 경우는, 실험이 실험으로 냉혹하게 끝나버릴 때 까지다. 그리고 “나”는 일상적인 “나”로 복원된다. 그런 의미에서 “말하자면 일종의 정신분일자(精神奔逸者) 말이오.”라는 변명은 사실 아무런 의미가 없는 말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정신분일자는 정신분일을 하지 않는 잠의 세계에서 일반인으로 화하게 됨이, “한 번도 걷은 일이 없는 내 이부자리는 내 몸뚱이의 일부분처럼 내게는 참 반갑다”는 희한한 쾌락이자 유일한 쾌락을 찾아내는데서 터무니없는 행복에 마구 빠져드는 형태로 나타난다. 따라서 이런 최고의 자세이자 최저의 자세는 차라리 비애마저도 아니다.

여기에서 “천재를 어떻게 아시오?”에 대한 물음의 재복원이 이루어진다. “보통 인간을 어떻게 아시오?”

 

4. 날개는 저절로 돋는 것

 

나는 불현듯이 겨드랑이가 가렵다. 아하, 그것은 내 인공의 날개가 돋았던 자국이다.

오늘은 없는 이 날개, 머리 속에서는 희망과 야심의 말소된 페이지가 딕셔너리 넘어가듯 번뜩였다.

나는 걷던 걸음을 멈추고 그리고 어디 한번 이렇게 외쳐 보고 싶었다.

날개야 다시 돋아라.

날자. 날자. 날자. 한 번만 더 날자꾸나.

한 번만 더 날아 보자꾸나.

 

이 문구는 사실 그토록 소설본론에서 “나”의 모습을 견지하던 그러한 “나”는 전혀 아니다. 그 “나”는 “나”를 벗어던지고 독백부분의 “나”와 결합한다. 아니, 결합보다는 독백부분의 그 “나”와 완전히 일치한 그러한 “나”로 본모습을 드러낸다. 인간 내면의 보편적 욕망과 지성 모두를 아우르는 연속체의 양 극단을 상정하여 그려낸 갈등구조는 궁극적인 지향을 요하는 희망을 그려낸다. 그리고 그것은 “날개”로 상징된다.

 

5. 마무리

 

결론적으로 이러하다. 소설 “날개”를 구조주의적 방법론으로 고찰해본 결과, 단 하나의 문장으로 압축할 수 있다. “박제가 되어 버린 천재를 아시오?”, 이 질문은 다시 이렇게 전환된다. “박제가 되어 버린 보통 인간을 아시오?”, 이 질문은 다시한번 전환된다. “박제가 되어 버린 보통 인간이요”, 이 긍정문은 또 한번의 정제과정을 거치게 된다. “인간은 박제가 되지 않고, 박제가 되더라도 날개라는 생명성을 다시 회복합니다”. 마지막으로 더욱 세련되게 가공해본다.

“인간다움은 날개의 다시 돋아남에 있다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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