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스토리(34~35)
상태바
나의 스토리(34~35)
  • 동북아신문 기자
  • 승인 2007.05.07 0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서경석 목사의 장편실화>

34. 새벽까지 계속된 아내와의 논쟁

미국 유학시절은 나로 하여금 여러 면으로 눈을 뜨게 해준 소중한 기회였는데, 이 가운데는 여성문제도 포함되었다. 나는 미국에서 보낸 6년 동안 내 처로부터 철저하게 페미니즘 교육을 받았다.


연애시절 내 처는 아주 착한 현모양처 타입의 여성이었다. 내가 기독청년운동을 하느라 연애시절에 약속시간에 늦거나 이런저런 연락 심부름을 많이 시켰는데도 아내는 별로 싫은 내색 한번 내보이지 않은 순종형의 여자였다.
그러나 미국에 가서 여성사회학 공부를 하면서 아내는 그야말로 투사로 변해 버렸다. 적어도 내 눈에 비친 아내의 모습은 그랬다. 그리고 그때부터 가부장제적 문화 위에서 덕을 보며 살던 나의 행복한 남편시절도 사실상 막을 내리고 말았다.


아내는 여성사회학 박사과정을 밟으면서 미국의 급진주의적 여성운동론에 깊이 빠져 든 뒤에는 가부장제적 사회에 대한 반발과 적개심을 자주 토로하였는데, 아내의 눈에 나는 청산되어야 할 가부장제적 문화의 본보기였다. 아내는 내가 하는 모든 행동과 사고방식을 보면서 얼마나 이 사회가 가부장제적인가를 느꼈고, 당연히 내가 하는 행동 하나하나가 불만의 대상이 되었다.
하지만 나로서는 ‘아닌 밤중에 홍두깨’를 만난 격이었다. 나는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로 살아가고 있는데, 그리고 내 또래의 남자치고는 그래도 상당히 페미니스트라고 자부하고 있었는데, 갑자기 아내가 내가 하는 일마다 사사건건 불만을 털어 놓고 싸움을 걸어왔기 때문이다.
두 사람의 생각이 이렇게 팽팽하게 맞서다 보니 가정생활이 대립과 투쟁의 과정으로 변해 버렸다.


특히 미국에 건너 간지 1년 정도 지나고 나서 두 아이를 미국으로 데려오면서 아내는 집안일에, 아르바이트, 아이들 양육까지 겹쳐 공부를 제대로 하지 못하는 지경에 놓이게 되었다. 하지만 나는 나대로 어려운 신학공부에 아르바이트에, 민주화 운동까지 하려다 보니 몸이 열개라도 모자랄 지경이었다.
이러다 보니 사소한 일로 크게 다투는 일도 많았다. 그 때 우리는 뉴저지에 살면서 뉴욕의 부르클린 한인교회에 다녔는데, 자동차가 한 대밖에 없었다. 나는 그때 뉴욕 민주화운동을 이끄느라 주중에는 뉴욕에서 살다시피했는데, 당연히 차를 가져가야 했다. 하지만 아내도 아이들을 학교에 데려다 주고 수퍼에 가서 식품도 사려면 차가 필요했다.


사소한 문제인 것 같지만, 이런 문제가 당시엔 큰 스트레스가 되었다. 한번은 내가 뉴욕으로 차를 가져가는 바람에 아이들이 아침 통학버스를 놓쳐 14불을 내고 택시를 타고 등교를 하기도 했다. 당연히 뉴욕에서 돌아온 뒤 나는 아내가 내는 화를 고스란히 들어야 했다.
이 뿐만이 아니었다. 아내는 같이 공부하는 처지인 만큼 가사노동이나 육아도 똑같이 분담해야 한다고 했지만, 밥 짓는 법도 제대로 모르던 내가 갑자기 가사노동을 아내와 똑같이 분담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이래저래 다툼이 잦을 수밖에 없었고, 대체로 내가 아내에게 지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우리는 하루 밤을 새면서 여성문제에 대해서 토론을 벌였다. ‘남녀의 역할이 다르냐, 같느냐’에 관한 문제였는데, 나나 내 처나 지금까지 공부했던 모든 사회과학 지식을 총동원해서 각각 자기주장이 옳음을 주장했다.
나는 남녀의 역할이 다르다고 주장했고, 처는 가부장제적 질서 속에서 여자들이 그렇게 길들여졌을 뿐 다를 게 없다고 맞섰다.
마지막엔 결국 내가 ‘당신 말이 옳다’며 두 손을 들고 말았다. 그때 시계를 보니 새벽 5시였다.


나는 항복 선언을 하면서 남성이 불평등한 현실 속에서 이득을 누리고 있음을 인정하고, 나 스스로도 이런 불평등한 현실에 안주하고 있는 사람이라는 것에 문제를 느낀다고 털어 놓았다.
그리고 이때부터 우리 부부는 ‘무슨 남자가 이래, 무슨 여자가 이러하는 식의 말은 절대로 사용하지 않는다.
아무튼 이 토론이 있은 뒤 나는 처에게 가사노동을 분담하기로 약속했고, 일주일에 3번의 식사당번을 내가 맡았다.
밥 짓고, 설거지하고, 빨래하는 것은 기본이고, 김치 담그고 아이들 간식 만드는 일도 했다.
하지만 뉴욕에 왔다 갔다 하다 보니 자연히 약속을 못 지킬 때도 많았는데, 그런 날엔 처의 따가운 눈총을 받아야 했다. 나로서도 스트레스가 쌓일 때가 많았다.


한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모처럼 시간여유가 생겨 아내에게 다가가 다정하게 “내가 뭐 도와주면 돼?”하고 묻자 아내가 벌컥 화를 내며 이렇게 말하는 것이 아닌가.
“내가 언제 당신에게 ‘뭐 도와주면 돼?’하고 물으면서 집안 일 하는 거 봤어요? 두 사람 모두가 해야 할 일이니 스스로 알아서 해야지 누가 누구를 도와준다는 거예요”


나로서는 모처럼 아내에게 잃었던 점수를 만회해 보려고 노력해 본 말이었는데 이처럼 무참하게 욕을 먹고 나니 머쓱해졌고 나도 스트레스가 쌓였다.
식사당번 역할을 제대로 해 보려고 ‘미역국 끓이는 법’을 물었다가 ‘나도 혼자서 배워서 했는데, 당신은 왜 혼자서 못해요. 관심이 있으면 옆에서 내가 하는 것을 지켜보면 되잖아요’라고 아내에게 면박을 당하기도 했다.
이런 과정을 거치면서 나는 어찌되었건 ‘남편의 가사노동 분담’에 대해서 확실한 교육을 받았다. 그러나 가사노동을 분담하기로 결정한 뒤에도 뉴욕을 왔다갔다 하다 보니 약속을 어기는 경우가 많았는데 그 때마다 아내의 거센 항의에 시달려야 했다.


당시 아내도 편두통에 시달리는 데다 박사학위 과정도 자꾸 미뤄지게 되어 스트레스가 많았다. 그래서 결국 나는 처와 협정을 맺었다.
‘내가 87년까지 민주화운동을 하는 것을 양해해주면, 그 이후부터는 내가 혼자서 애들을 데리고 귀국하겠다. 그러니 그 뒤 당신 혼자 남아서 박사학위를 끝내라’는 게 협정의 내용이다.


그리고 결국 87년 12월 나 혼자 애들을 데리고 귀국했고, 아내는 2년 동안 혼자 남아서 박사학위를 끝냈다.
아이들을 데리고 혼자 귀국한다는 결심은 그 때 나로서는 그래도 결단에 속하는 일이었다. 그 당시 나는 정말로 아이들을 혼자서 키울 결심을 했었다. 물론 한국에 들어오자마자 나는 또 다시 기사연이다 경실련이다 하며 눈코 뜰 새 없이 바빠져 결국 부모님이 아이들을 다 키워주셨다.



35. 귀국해서 찾아간 새문안교회

새문안교회는 나의 정신적인 고향과도 같은 곳이다.
나의 증조할아버지께서 세우신 이래로 우리 집안 식구들이 주일이면 이곳에 모여 예배를 보았고, 나도 중학교 1학년부터 이 교회를 다녔다. 중고교 시절에는 매주 서너 차례 정도 들르지 않으면 좀이 쑤실 정도로 새문안교회는 내 생활의 일부가 되어 있었다.
하지만 대학에 들어가서 내가 운동권이 된 뒤로는 당회가 열릴 때마다 내 얘기가 나오지 않을 때가 없었을 정도로 나는 새문안교회의 대표적인 문제아가 되었다.


그 당시 내가 새문안교회 대학생회를 의식화시켜 놓았기 때문에 교회의 다른 신도들과 대학생회와의 이질감이 심했었다.
하지만 증조할아버지께서 새문안교회를 세우셨고 할아버지께서 교회원로 장로를 지내시어 사실상 새문안교회의 기둥역할을 한 집안의 아들을 급진적이라고 하여 내 쫓을 수는 없었다. 솔직히 그때 내가 그런 집안배경을 갖고 있지 않았다면 일찌감치 교회에서 쫒겨났을 것이다.


새문안교회 대학생회는 전태일 단식농성을 비롯해 상당히 오랫동안 기독학생 운동의 주류로서 운동을 이끌었다. KSCF 운동의 큰 흐름을 새문안 교회 출신들이 만들어 냈고, 80년대에 들어서는 새문안 교회 출신 가운데 상당수가 노동운동 쪽으로 들어갔다. 80학번부터는 한 학년에 거의 5~6명씩 노동현장으로 갔던 것으로 기억된다. 그러다가 87년 당회에서 새문안교회 대학생회의 문을 닫는 바람에 그 맥이 끊어지고 말았다.


70년대부터 대학생회가 문을 닫을 때까지 대학생회 회원 가운데 거의 1백여 명 이상이 민주화운동을 하다가 구속되었을 정도로 새문안교회는 우리나라 진보적 기독교운동의 한 축을 담당했던 곳이다. 또 그 뒤 나와 함께 교회를 다녔던 새문안교회 대학생회 출신들은 경실련운동의 주력 부대가 되었다. 나를 포함해서 신대균 초대 조직위원장, 유재현 사무총장, 이형모 시민의 신문 사장, 유종성 정책실장, 장신규 지방자치국장 등이 모두 새문안 교회 출신들이다. 나와 신대균, 장신규가 새문안교회 대학생회 회장을 지냈고, 이형모, 유재현은 새문안교회 청년회 회장을 지냈다.


또 대학생회 회원 중에서 십여명의 목사가 배출되었다. 예를 들면 서경석 목사, 이원희 목사, 신대균 준목, 권진관 목사, 김형기 목사, 진방주 목사, 황홍렬 목사. 조영식 목사. 이근복 목사, 유태선 목사 등이 그들이다.

그런데 내가 미국으로 떠나기 전에 새문안교회를 갱신해야겠다는 생각을 가지고 구체적인 행동에 착수한 적이 있었다. 의식있는 장로들이 많이 선출되어야 교회가 갱신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세례교인들을 조직화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몇 년간 노력해서 대학생회와 청년회, 고등부 학생들과 반사들을 다 조직해서 우리 편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표계산을 해보니 내가 좌지우지할 수 있는 조직표가 1백30표에 이르렀다.


그 당시 장로로 선출되려면 대략 2백50표 정도를 얻으면 되었다. 저녁찬양예배에서 투표를 하는데, 그때는 교인이 많지 않아 그 정도의 찬성표만 얻으면 충분했다. 그런데 우리가 1백30표를 쥐고 있으니까 우리가 지지해서 장로를 선출하지는 못하지만 만약 우리가 반대를 하면 절대로 장로가 될 수 없었다.  
그리고 반대로 우리가 밀어주면 웬만큼 자기의 지지자가 있는 사람은  어렵지 않게 장로가 될 수 있었다. 적어도 우리가 누구를 당선시키지는 못해도 적어도 누구를 떨어뜨릴 수는 있었다. 이렇게 해서 내가 미국에 가기 전까지만 해도 대학생회는 장로선거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발휘했었다.

그런데 내가 6년 뒤 미국에서 다시 돌아와 보니 새문안교회 내의 개혁세력은 완전히 무력화되어 있었다. 그 동안 새문안교회 대학생회와 고등부가 탄압을 받아 조직적으로 표 행사를 하던 대학생회 출신들이 모두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기 때문이다.


진보성향의 청년들이 표를 쥐고 좌지우지하니까 교회 안의 보수적인 장로님들이 단결해서 대학생회와 청년회를 조직적으로 파괴한 것이다. 장로가 되기 전까지는 이 쪽 편에 잘 보이려고 애를 쓰지만, 일단 장로가 되고 나면 완전히 돌아서서 이 쪽 편을 탄압하는 데 앞장서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내가 돌아왔을 때 새문안교회는 과거 어느 때보다도 보수적이 되어 있었다. 열심히 조직운동을 한 것이 거꾸로 반작용을 낳은 셈이다.

하지만 나는 진보세력이 새문안교회 내에서 완전히 파괴된 것을 보고 서글퍼한 것이 아니라 거꾸로 하나님께 감사했다. 왜냐하면 그때 우리가 했던 행동은 아주 잘못된 행동이었다는 점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나는 젊은 시절에 교회갱신을 세상적인 방법으로 하려고 했다. 그러나  교회는 영적인 감화 감동을 통해서 갱신되어야지, 조직작업으로 되어서는 안 된다. 성령의 열매로 이뤄야할 교회갱신을 세상적인 방식으로 하려고 한 것은 너무도 잘못된 것이었다.


미국유학에서 귀국한 후에는 나는 교회갱신을 주장해 본 적이 없다. 우리가 교회 갱신을 이야기하기에 앞서서 나 자신이 하나님 앞에 바로 서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을 가져야 하기 때문이다.


지금 나는 서울조선족교회 담임목사이지만 나는 교회갱신을 주장할 자격이 없는 사람이다. 오히려 나는 갱신대상이다. 그런 부끄러움을 가지고 나 자신이 바로 되려고 노력하며 살고 있다.
그리고 내가 목사가 된지 20년이 넘었지만 아직도 새문안교회 강단에 서 본 적이 없다. 내가 아무리 보수로 변해도 새문안교회에서는 서경석은 ‘걸어다니는 다이나마이트’이고 빨갱이이기 때문이다. 나는 그래도 조금도 유감이 없다. 그만큼 나의 잘못이 많았다.


그리고 이 고백은 나의 젊은 날의 참회록 같은 것이다. 그리고 지금 교회갱신을 생각하는 많은 젊은이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말이기도 하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
이슈포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