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kc663@hanmail.net
서울 서초문인협회 회장
이 세상에서 어머니와 아이 사이처럼 깊은 관계는 없을 것이다. 어머니의 피와 살로 생겨진 아이, 그는 곧 새로 태어난 어머니의 또 하나의 분신인 것이다. 그러므로, 어머니와 아이의 관계는 모든 인간의 세계에서 가장 원초적인 관계인 것이다. 모든 생물도 이 관계가 있음으로 해서 종족 보존이 되고 대를 이어갈 수가 있게 된다. 그래서, 부모와 자녀의 사이를 하늘이 맺어 준 천륜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런데, 생물들은 꼭 천륜대로만 살아가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실제로는 생존의 차원에서 사물을 인지하고 판단하며 사는 것 같다. 특히 자신의 생존 능력이 매우 약한 어린 시절에는 자신을 지켜 주고 위험을 막아 주며 필요한 조치들을 해 주는 대상을 의지하여 살게 마련이다. 대상물이 식물이든 동물이든 무생물이든 상관없이 그것이 자신의 생명을 보호해 주고 유지시켜 준다고 판단되면 그것에 의존하려고 하게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대상이 없을 경우에는 불안과 공포로 어쩔 줄 몰라 하게 된다. 이러한 현상은 사람의 경우에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국제학술대회에 참석차 김포 공항에서 출구로 나설 무렵이었다. 조부모로부터 큰아버지의 품으로 인계된 아이가 울어대면서 막무가내로 도로 할아버지 할머니에게로 가려고 하였다. 큰아버지는 먹을 것을 주면서 갖은 애를 쓰며 달랬지만 아이는 한사코 조부모의 곁을 떠나려 하지 않았다.
출발 시간이 되자 큰아버지는 우는 아이를 억지로 떼어 안고 출구로 나갔다. 아이는 전송하는 조부모의 모습이 보이지도 않는 출구 쪽을 연신 바라보며 울음을 그치지 않았다. 탑승 대기실에서 기다리는 동안 주위의 몇몇 일행들이 여러 가지로 달래 보았지만 아이는 한참을 울고서야 그쳤다. 이러한 모습을 지켜보면서 대부분의 일행들은 그만큼 아이는 조부모와 살며 정이 깊이 들었던 것이라고 생각하였다.
아이는 태어난 지 얼마 안 되어서 오스트리아로 공부하러 떠난 젊은 부모와 헤어져 조부모 밑에서 돌이 되도록 자랐다고 한다. 그러다가, 큰아버지가 독일에서 열리는 학회에 참가하러 가게 되자 그 편에 보고 싶은 친부모의 부탁으로 함께 가게 되었던 것이다. 물론 큰아버지는 이 아이 곧 조카와 함께 산 적은 없었으니 정이 들 상황은 아니었다.
그런데, 그렇게 조부모를 떠나지 않겠다고 울던 그 아이가 얼마 안 되어 큰아버지를 친아버지처럼 따랐다. 큰아버지의 말만 듣고 큰아버지의 품에서만 놀았다. 이러한 상황을 알게 된 일행들이 아이와 친해지려고 가지가지로 꾀어 보았지만 소용이 없었다. 15시간이 넘게 걸린 독일까지의 긴 비행기 안에서도 그 아이는 아무 투정 하나 없이 큰아버지와 잘 지냈다.
한데, 독일 프랑크푸르트 공항에 도착해서 마중 나온 친부모에게 데려다 주자 그 아이는 막무가내로 가려 하지 않았다. ‘내가 엄마야’, ‘아빠다’ 하고 아무리 달래도 소용이 없었다. 아이는 큰아버지의 품에서 떨어지지 않으려고 하였다. 어쩌다가 엄마가 억지로 안으려 하면 마구 울어대며 발버둥을 쳤다. 친자식을 친부모에게 큰아버지가 데려다 주는데 아이는 한사코 친부모에게 가려 하지를 않는 것이다. 난감해 하던 아빠가 장난감을 주어도, 먹을 것을 주어도 효과가 없었다. 아이 엄마는 죽을상이 되어 어쩔 줄을 몰라 하였다. 금방이라도 울음이 터져 나올 것만 같았다.
이들의 관계와 사정을 알고 있는 일행들은 모두가 어이가 없어서 바라보기만 하였다. 몇몇 사람들은 이러한 딱한 사정에 혀만 끌끌 찼다.
“엄마 아빠도 몰라보니 안 가려 하지.”
“큰아버지를 아빠로 아는데 따라가겠어?”
“그러기에 어린 자식과는 떨어져 사는 게 아니야.”
기다리던 일행들은 버스에 올랐고, 젊은 부부와 아이는 우리와 헤어져 오스트리아로 가야만 하였다. 아이는 큰아버지의 품에 안겨 계속해서 떨어지려 하지 않았다. 할 수 없이 큰아버지가 억지로 아이를 애 아빠에게 떠맡겼고 애 아빠는 발버둥치는 자기 아들을 부등켜안기에 애를 먹었다. 서서히 움직이는 차창을 통하여 몸부림치는 아이와 그 부모를 바라보면서 모두들 안타까워하였다.
그런 일이 있은 지 10여일이 지나 오스트리아의 비엔나에 갔을 때 그 젊은 부부가 마중을 나왔다. 물론 그 아이도 데리고 왔다. 큰아버지는 반가운 김에 얼른 아이에게로 다가가 안아 주려 하였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그 아이는 단번에 얼굴을 돌리고 엄마 품을 파고들었다. 큰아버지는 어이가 없어 머리만 긁적였다. 아이 엄마가 무안해서 “큰아빠야, 큰아빠” 하고 안기려 하였지만 아이는 힐끗 쳐다보고는 언제 보았느냐는 듯이 고개를 돌려버렸다. 멋적어하는 형에게 동생이 미안하다는 듯이,
“이 녀석아, 큰아빠도 몰라보니?”
하며 거들어 보았지만 소용이 없었다. 프랑크푸르트 공항에서 큰아버지의 품에서 그렇게 떨어지지 않으려고 울부짖었던 아이가 10여 일만에 만난 큰아버지를 전혀 몰라보는 것이었다. 이제는 이 아이에게 있어서는 부모와 함께 사는 데에 아무런 어려움이 없고 부족함도 없었던 것이었다. 그런데, 이렇게 되기까지에는 겨우 하룻밤밖에 걸리지 않았다는 것이다.
사람도 다른 대부분의 생물들처럼 어릴 때에는 자신을 보호하고 보살펴 주는 보호자에게만 의존하고 집착하게 마련인가 보다. 그런 대상이 아니라면 외면하고, 혹시 강제성을 보이면 본능적으로 불안과 공포를 느껴 강하게 피하고 그를 벗어나려고 몸부림치게 되는가 보다. 여기에 무슨 도리가 관계되고 의리가 연결될 수 있겠는가? 일행들이 이러한 과정들을 보면서 안타까워하고 애처럽게 여기는 것마저도 어떻게 생각하면 한낱 인간다운 느낌이요 사치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