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이 성큼 다가온 있는 가운데, 세계식량기구(WFP) 등 유엔 산하 대북지원 기구들이 잇따라 북한의 대기근을 경고하고 나서 이에 대한 각별한 관심이 요구되고 있다.
연합뉴스가 8일 발표된 유엔 인도지원조정국(OCHA)의 성명을 인용해 보도한 것에 따르면 "올해 유엔 산하 대북 지원기구들의 통합 지원 요청액의 절반을 약간 넘기는 금액만이 모금된 가운데, WFP는 11월 70만명에 이어 이 달부터 220만명 등 거의 300만명에 대한 식량배급을 중단해야 하는 상황에 내몰렸다"는 것이다.
OCHA는 또한 "내년 5월까지 국제사회의 새로운 지원 약속이 나오지 않는다면 380만명에 이르는 북한주민의 식량배급에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있으며, WFP가 지원하는 어린이와 임산부용 음식 생산시설 18곳도 내년 4월까지는 밀가루 부족에 직면하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미국의 워싱턴포스트 역시 11일자 신문에서 WFP가 올해 목표량의 62%에 불과한 30만톤의 식량만을 확보해는데 머물러, 이번 겨울부터 약 220만명의 북한 주민에게 식량지원이 중단될 수 있다고 보도했다. 특히 이 신문은 WFP와 유니세프의 현지 조사 보고서를 인용해, 북한 어린이 가운데 약 41%가 영양실조에 시달리고 있다고 보도해, 국제사회의 식량 지원이 늘어나지 않을 경우 북한 어린이가 최대 희생자가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이러한 이유로 유엔은 내년도 북한을 위한 지원액으로 2억2100만달러를 마련해줄 것을 국제사회에 요청해 놓고 있다. 그러나 핵문제가 장기화되면서 미국, 일본 등의 지원을 기대하기 힘들고 그나마 다른 나라의 인도적 지원이 이라크, 아프가니스탄 등에 집중되고 있어 유엔이 목표액을 달성하기는 힘들 것으로 전망되고 있다.
"전환의 계곡"에서 죽어가는 북한 주민들
1990년대 중후반, 비효율적인 농업체제와 잇따른 자연재해, 그리고 미국 주도의 경제제재 및 봉쇄의 지속으로 최악의 식량난을 경험한 북한은 1990년대 말부터 식량 생산 사정이 조금씩 개선되어 왔다. 특히 본격적인 경제개혁에 돌입한 올해의 식량 생산량은 416만톤으로 9년만에 최대치를 기록하기도 했다. 그러나 여전히 100만톤 이상이 부족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북한이 이처럼 최근 식량 생산이 좋아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또 다시 최악의 식량난에 직면하고 있는 가장 큰 이유는 미국, 일본 등 국제사회의 대북지원이 크게 줄거나 중단되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최근 2년동안 일본은 아예 식량 지원을 중단한 상태이고, 최대 지원국이었던 미국은 부시 행정부 출범이후 식량 지원을 줄여, 현재는 클린턴 행정부 때의 5분의 1 수준까지 줄인 상태이다.
물론 북한이 식량난을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해서는 ▲ 개인영농제 및 시장경제체제 도입 ▲농지소유 및 이용제도 개편 ▲유통체계 개선 ▲농업금융제 확립 ▲농업생산성 향상을 위한 교육프로그램 마련 등 제도적인 개선이 필요하다. 그러나 북한이 동시에 이러한 제도적 개혁에 박차를 가하기 위해서는 미국, 일본과의 관계 정상화라는 근본 문제가 해결되어야 할 상황이다. 그러나 이는 안타깝게도 기약이 없는 일이다.
또 한가지. 북한의 식량난이 악화된 중요한 이유가 "경제개혁의 부작용"에 있다는 점에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즉, 북한이 사회주의 경제에서 시장경제로의 이행과정에서 수많은 절대 빈곤층이 양산되고 있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 영국의 저명한 잡지인 옵저버는 최근호에서 북한에서 활동 중인 유엔 관리들의 말을 인용해, "경제개혁이 긴급구호가 필요한 약 100만명의 가난한 도시 노동자를 새로 만들어 냈다"며, 역설적으로 북한의 경제개혁이 새로운 빈곤층을 만들고 있다고 지적했다.
워싱턴포스트 역시 북한 정부가 경제개선조치로 취한 가격자율제 도입 및 식량배급제의 중단으로 기업 간부와 농업인의 생활 수준은 향상됐지만, 북한 인구의 다수를 차지하는 도시 노동자는 더욱 궁핍해지고 있다고 보도했다.
북한 정권의 생존전략과 국제사회의 요구에 따라 이뤄지고 있는 경제개혁의 과정에서, 역설적으로 국제사회의 대북지원이 급감함에 따라, 수많은 북한 주민들이 "전환의 계곡"에 빠져 굶어죽을 위기에 처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북한 체제의 변화를 돕기 위해서라도 인도적 지원 확충이 절실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핵문제와 북한의 대기근
더욱 우려되는 것은 북한 안팎의 문제가 계속 악순환되면서 북한 주민들의 고통이 줄어들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는 점이다. 나름대로 경제개혁과 국제사회와의 관계 개선을 통해 자구책을 모색하고 있는 북한 정권의 움직임에 대한 외부의 시선은 차갑기만 하다.
"플루토늄을 먹고 살 수는 없다"는 부시 행정부의 북한에 대한 비난에서 잘 알 수 있듯이, 핵문제가 불거진 이후에는 눈에 띄게 대북지원이 줄어들고 있다. 핵문제가 언제 풀릴지 기약이 없는 상태에서 그 고통의 크기는 고스란히 북한 주민들에게 전가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핵문제 때문에 북한의 대기근이 약화되고 있다고 단정하는 것은 신중해질 필요가 있다. 북한의 대기근이 가장 심각했던 1990년대 중후반은 북한의 핵개발 동결과 미국의 대북한 정치적, 경제적 관계 정상화의 교환을 골자로 한 제네바 합의 체결 직후의 일이다. 김일성에서 김정일로의 "불안해 보이던 정권승계"와 북한의 대기근을 보면서, 클린턴 행정부와 김영삼 정부는 "기다리면 북한은 망할 것"이라는 비인도적 기대감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또한 "식량 지원을 무기화하지 않겠다"고 공언해온 부시 행정부는, 2000년도 50만톤이었던 대북 식량지원을 집권 첫해인 2001년에는 30만톤으로, 2002년에는 15만톤으로, 그리고 2003년에는 10만톤으로 줄인 상황이다. 참고로 부시 행정부는 2002년 10월 북핵 문제가 불거지기 전까지, 북한이 제네바 합의를 준수하고 있다며 중유를 제공했었다.
이와 관련해 걸프전 이후 미국 주도의 유엔 경제제재로 어린이를 비롯한 이라크 주민 수십만명에 목숨을 잃으면서 미국에 대한 국제사회의 비판 여론이 일자, 클린턴 행정부 때 국무장관으로 있었던 올브라이트가 "그럴 만한 가치가 있다"고 말한 것을 우리는 유념에 둘 필요가 있다. 즉, 대량살상무기 확산을 막는다는 명분으로 수십만명의 죽음을 방치할 수 있는 것이 미국 정부인 것이다.
물론 북한의 인도적 위기 해소는 물론이고 한반도 주민의 생사가 걸린 핵문제는 반드시 평화적으로 해결되어야 한다. 그러나 이것이 곧 "핵문제가 해결될 때까지 대북지원을 해서는 안 된다"는 근거가 될 수는 없다. 언제 풀릴 지 모르는 핵문제를 이유로 북한 주민의 굶주림을 외면하는 것은 비인도적 처사이기 때문이다.
"굶주린 배는 기다리지 않는다"
최근 북한의 대기근을 볼 때, 우리가 분명 주목해야할 점이 있다. 앞서 언급한 것처럼 전면적이든 부분적이든, 혹은 전략적이든 전술적이든 보는 관점에 따라 다르겠지만, 북한이 변화하는 과정에서 대기근이 발생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를 단순히 체제전환이 수반하는 고통이라고 하기에는 남한과 국제사회의 인도적 노력이 너무나도 부족하다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북한은 점진적으로 시장경제적 요소를 도입하는 것과 함께, 식량 분배의 투명성을 보여주기 위해서도 나름대로 노력하고 있다. 5년만에 처음으로 WFP와 함께 북한의 식량 분배 실태를 취재한 옵저버의 조나단 왓츠 기자는 여전히 북한에 지원된 식량의 분배 투명성을 확보하는 데에는 미흡한 점이 있지만, "최근 3년 사이에 유엔 기구가 감시할 수 있는 지역이 두 배로 늘었다"며 예전보다 접근할 수 있는 지역과 취재할 수 있는 북한 주민들이 많아지고 있다고 전하기도 했다.
유엔 기구 역시 지원된 식량 분배 상황을 확인하기 위해 접근할 수 있는 지역이 90%까지 확대되었다고 밝히고 있다. 또한 최근 북한 당국이 시장에서 유통되는 남한 지원의 쌀에 "대한민국 산(産)"이라고 표시하고 있는 것이나, 남한 대표단의 식량 분배 현장 방문을 허용한 것 등도 작지만 의미있는 변화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상황을 종합해 볼 때, "지원된 식량이 북한 군부나 정권으로 흘러 들어가기 때문에 지원하면 안된다"며 대북지원을 반대하는 주장은 더 이상 설득력을 얻기 힘들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추운 겨울이 다가오면서 유엔 등 국제기구는 수많은 북한 주민이 전환의 계곡에서 굶어죽거나 삶의 터전을 등지고 먹을 것을 찾아 얼어붙은 두만강을 건널 것이라고 전망하고 있다. "전환의 계곡"에서 허덕이고 있는 북한 주민에게 구원의 손길을 뻗치지 않으면, 또 다시 대량 아사자와 탈북자가 발생할 수 있다는 경고인 것이다.
"굶주린 배는 기다리지 않는다"는 어느 시인의 절규가 있듯이, 생존의 벼랑끝에 몰린 북한 주민은 핵문제가 풀릴 때까지도, 북한 체제가 근본적으로 바뀔 때까지도 기다릴 수 없다. 북한의 대기근이 10년 가까이 지속되면서, 주민을 먹여 살리지 못하고 있는 북한 정권이나 50년 넘게 경제봉쇄를 하고 있는 미국에 대한 분노도 커지고 있지만, 이러한 반북감정도, 반미감정도 북한 주민을 먹여 살리는데 현실적으로 도움이 될 수는 없다.
부인할 수 없는 현실은 중국과 남한이외에는 실질적으로 북한 주민을 도울 수 있는 나라는 거의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노무현 정부와 남한 시민사회의 소극적인 인도적 지원은 분명 반성해야 할 대목이다.
노무현 정부는 정부 차원에서 꾸준히 대북지원을 하고 있지만, 미국, 일본 등 우방국들에게 대북지원을 적극적으로 요청하지 않고 있다. 이는 1990년대 후반 "미사일 위기"에도 불구하고 미국과 일본에게 인도적 지원을 요청한 김대중 정부와는 분명 차이가 있는 것이다. 또한 최근 들어 시민사회의 대북지원도 줄어들고 있다는 소식은 안타까운 현실이 아닐 수 없다.
정치적 논리나 계산을 떠나 시민사회가 당당히 인도적 지원에 적극 나설 때, 정부에게 대북지원을 늘리라는 요구를 할 수 있을 것이다. 마찬가지로 노무현 정부가 북한에 인도적 지원을 확충할 때, "식량 지원을 무기화하지 않겠다"는 미국이나 2001년부터 아예 식량 지원을 중단한 일본에게 식량 지원을 재개할 것을 요구할 수 있는 도덕적인 근거가 마련될 수 있을 것이다.
결국 구원의 손길은 남한으로부터 나와야 하고 나올 수밖에 없다. "북-미, 북-일 간의 대결의 늪"과 "체제전환의 계곡" 속에서 북한 주민이 굶어죽거나 얼어붙은 두만강을 넘지 않도록 정부와 시민사회가 구원의 손길을 뻗칠 때인 것이다. 더 늦기 전에.
/정욱식 기자 (civil@peacekorea.or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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