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경석 목사의 장편실화
나의 스토리(2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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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경석 목사의 장편실화
나의 스토리(26~29)
  • 동북아신문 기자
  • 승인 2007.04.23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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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 북한에 다녀온 70대 교포노인의 고백

나는 미국에서 지내는 동안 신학적인 면 외에 이념적인 면에서도 큰 변화를 겪었다. 우선 북한에 대한 생각이 크게 바뀌었다.


대학시절 통혁당 사건에 연루되었을 때 나는 북한을 낙원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그 뒤 기독교운동을 할 즈음에는 사회주의에는 긍정적인 생각이었지만, 현존하는 김일성 체제에 대해서는 유보적인 입장을 취했다.
내가 그런 생각을 가졌던 것도 대학 시절에  ‘맑시즘이냐 기독교냐’라는 일본 책을 읽고 나서 교조적 맑시즘의 문제점에 대해서 확연하게 알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교조적 맑시즘에 대해서는 일찍부터 비판적이었다. 교조화된 맑시즘은 인간이 만든 체제나 이념을 우상화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었다. 그리고 나는 기독교와 사회주의를 접목하는 방향의 이념적 지향을 선호하고 있었다.
그러나 열렬한 지지를 보내지는 않았지만 북한에 대한 막연한 동경 같은 것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그래서 나는 미국에 간 뒤에 북한이 어떤 나라인가에 대해 큰 관심을 가지고 그 실상을 알려고 노력했다.


내가 미국에 갔던 1982년도는 미주동포들이 이제 막 북한 방문을 시작하는 시점이었다. 그때부터 약 5~6년 동안 많은 미주동포들이 북한을 방문하고 돌아왔다. 그들 가운데는 한 주일 정도의 짧은 기간 동안 머물면서 북한이 보여주는 부분만 보고 돌아온 사람도 있었지만 간혹 한 달 이상 아들네 집에 머무르면서 북한사회의 실체를 보고 느끼고 온 사람들도 있었다.


그런데 이 두 부류의 사람들이 북한을 바라보는 시각이 서로 너무 달랐다. 북한에서 보여준 부분만 보고 온 사람은 북한에 대해 감동에 가까운 좋은 인상을 갖는 반면 북한 사회에 깊숙이 들어갔다 돌아온 사람들은 북한에 대해 아주 비판적인 태도를 취했다. 그래서 나는 이처럼 현격하게 차이가 나는 두 가지 평가 중 어떤 것이 진실인가를 가리기 위해 미국에 있는 동안 누가 북한에 다녀왔다는 소리만 들리면 기를 쓰고 그 사람을 만나 이것저것 물어 보곤 했다.


이 과정에서 나는 북한사회가 지상낙원이 아니고 우리가 북한에 대해 잘못된 환상을 갖고 있었다는 점을 깨닫게 되었다. 물론 북한 나름대로 좋은 점이 없는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주체적으로 사고를 한다든지, 굉장히 순박하다든지 하는 점은 좋은 점이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북한 경제가 심각한 위기에 빠져 있을 뿐 아니라 인권 문제가 심각해서 일체의 개인의 자유, 언론의 자유, 거주 이전의 자유가 없고, 김일성 유일사상만이 존재하는 사회임을 분명하게 알게 되었다.


특히 북한에 아들을 만나러 가서 한달 동안 머물다가 온 한 교포노인은 내게 북한의 실상을 정확하게 알려 주었다. 그 노인은 황해도 출신으로 6.25동란 때 월남해서 남한에서 결혼했지만, 북한에도 부인과 가족이 있었다. 이 때문에 그 노인은 북한의 아들 집에서 한 달간 머물다가 돌아왔는데, 그 노인이 들려준 북한사회의 실상은 내게는 큰 충격이었다. 그 노인이 말하기를 ‘북한사회에 부정부패가 만연해 있을 뿐 아니라 김일성 체제에 대한 북한 주민들의 반발도 심각한 상태’라는 것이었다. 게다가 북한 체제는 완전히 거짓말로 가득 찬 사회라는 것이었다.


결국 내가 한국에 돌아올 때쯤엔 북한방문을 한 재미동포의 숫자가 3천명까지 육박하였다. 그리고 북한의 실상이 재미동포들에게 있는 그대로 다 노출되었다. 그리고 나 역시 귀국할 즈음에는 북한에 대한 환상을 전부 지워버리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미국에 있는 동안 다른 사회주의국가에 대해서도 관심이 많았는데 그 실상을 알면 알수록 그동안 내 생각이 얼마나 우물 안 개구리였나를 실감하게 되었다. 나는 한국에 있을 때만 해도 ‘모택동주의자’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중국은 ‘홍(혁명)’과 ‘전(전문성)’이 반복해서 등장하는 사회이고 모택동의 문화혁명은 혁명성을 위해 불가피한 것이었다는 식의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래서 4인방이 무너지고 등소평이 등장했을 때 나는 4인방의 붕괴에 대해 매우 서글퍼 했다.  


그러나 내가 미국에 있을 때 만난 중국 유학생들의 생각은 그렇지 않았다. 놀랍게도 나는 모택동과 4인방을 지지하는 유학생을 단 한 사람도 만나지 못했다. 이 사실은 내게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한국에 있을 때만 해도 나는 리영희 교수가 쓴 ‘10억인의 대화’라는 책의 시각으로 중국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미국에 와서야 리영희 교수의 시각이 얼마나 왜곡된 시각인가를 확연히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리영희교수를 내가 열심히 존경했었기 때문에 그만큼 그분에 대해 분노했다.  


더 나아가서 중국에 비교적 개방적인 등소평 체제마저도 반대하고 비판하는 민주화운동이 존재하고 있음을 알게 되었고, 그 반체제인사들이 미국에 지부를 만들어 활동하는 모습을 보면서 과거의 나의 생각이 얼마나 편협하고 한쪽으로 치우친 것인가를 깨달았다.
미국에 6년간 있으면서 공산권국가에 대한 지식을 흡수하려고 애를 썼지만 알면 알수록 사회주의 체제에 대한 회의는 깊어만 갔다. 결국 나는 미국에서 사는 6년 동안 사회주의가 우리 사회의 대안이 될 수 없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27. 사회주의국가 속의 기독교



나는 유니온신학교 석사논문으로 <사회주의국가 속의 기독교>를 썼다.  이 과정에서 나는 흥미로운 한 가지 사실을 발견했다. 내가 논문 주제를 이렇게 정한 이유는 사회주의 국가에서의 기독교가 사회주의적 모순 속에서 어떤 어려움을 겪고 있는가를 살펴보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사회주의 국가에서도 자본주의 국가와 마찬가지로 기독교는 두 가지의 형태로 나타나고 있었다. 하나는 체제를 인정하는 종교, 즉 어용종교였고, 또 다른 하나는 체제에 저항하는 종교였다. 그런데 재미있는 현상은 사회주의 국가에서 사회참여를 주장하는 진보적인 기독교는 어용종교가 되고 복음주의 기독교가 오히려 저항적인 종교였다는 점이다.
중국의 경우에도 진보교회인 ‘삼자교회’는 사회주의 권력과 결탁한 교회였다면 복음주의 교회인 ‘가정교회’는 저항적인 교회였다. 가정교회는 개인 영혼의 구원문제를 강조하는 매우 복음주의적 교회였는데 이런 교회는 사회주의국가 안에서 심한 탄압을 받고 있었다.
비단 중국의 경우뿐만 아니라 루마니아, 니카라과, 큐바 등 다른 사회주의국가의 경우에서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한번은 큐바장로교회의 신앙고백문을 가지고 한 학기 동안 유니온신학교에서 수업을 받았는데, 겉으로 보기엔 굉장히 사회참여를 강조하는 것 같았지만 그 속 내용을 들여다보면 큐바 사회주의 정권과의 결탁 이외의 아무 것도 아니었다. 큐바교회 사람들은 이것이 독자적이고 주체적인 것이라고 하지만, 내가 보기엔 어용노선에 불과했다.
나는 인간주의적 혁명을 달성했다고 하는 니카라과 사례에 대해서도 깊은 관심을 갖고 지켜보았다. 84년 가을에서 86년에 이르는 시기에 유니온신학교의 교수나 학생들의 상당수가 니카라과 혁명을 지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인간적인 얼굴을 하고 있었던 니카라과 정권마저도 얼마 지나지 않아 선거를 통해 혁명세력이 재집권에 실패하고 나중에는 자본주의 세력에게 권력이 넘어가고 말았다. 물론 사회주의 정권이 권력을 잃었다고 해서 곧바로 자본주의가 옳고 혁명세력이 틀렸다고 평할 수는 없다. 그러나 니카라과 혁명세력이 저지른 잘못이 너무 많아 국민의 신임을 잃어버리고 지지도 상실하게 된 것은 변명할 길이 없었다. 물론 미국의 경제봉쇄로 인한 타격이 이런 상황을 좀 더 빨리 오게 만들었겠지만, 사회주의 체제의 모순이 없었다면 이처럼 정권의 붕괴가 빨리 오지는 않았을 것이었다.


이러한 발견은 한국에서의 나의 신앙생활을 되돌아보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자본주의 국가인 한국에서는 기독교가 사회주의 국가와 정반대의 형태로 나타난다. 이를 테면 진보교회가 기독교의 사회참여를 강조하며 독재정권에 저항했다면 복음주의 교회는 그와 반대로 사회참여를 외면한 채 개인구원에만 치중하면서 사실상 독재정권에 협조하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

나는 지나간 70년대에 기독청년운동과 산업선교 운동을 하면서 민중신학의 입장에 서 있었는데, 나와 같은 민중신학 쪽 사람과 복음주의 교회의 사람은 성경의 내용을 이해하는 것에도 큰 차이가 있었다.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의 차이를 둘러싼 논쟁이 대표적이다. 누가복음에는 ‘가난한 자’가 천국의 주인이지만 마태복음에는 ‘심령이 가난한 자’가 천국의 주인이었다. 우리는 누가복음 편이었지만 복음주의 교회 사람들은 천국의 주인은 꼭 가난한 사람이 아니라 마음이 가난한 자라고 주장했다.
사실 마태복음이나 누가복음이나 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증언인데 이  증언들 사이에 대립이 생겨 우리는 그 하나를 선택해야 하게 생긴 것이다. 프린스턴에서 신학을 공부하면서 나는 이 두 가지가 대립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사건을 다른 자리에서 바라보고 있는 것임을 깨닫게 되었다.


내게는 정신박약아인 동생이 하나 있었다. 이름이 현석이였는데, 17살 되던 해 정신박약아 합숙기관에서 집에 가겠다고 혼자 나오다가 중간에서 길을 잃어버리는 바람에 그만 그 애를 잃고 말았다. 그 뒤 우리는 전국을 돌아다니며 몇 달 동안 현석이를 찾았으나, 끝내 찾지 못하고 말았다.
그런데 나는 현석이를 통해 소중한 깨달음 하나를 얻었다. 어머니께서는 현석이가 정신박약아라는 사실을 안 뒤부터는 모든 문제를 현석이 편에 서서 생각하고 행동하셨다. 때문에 우리 네 형제들은 항상 뒷전이었고, 이것이 때로는 섭섭하게 느껴지기도 했었다.
그러나 돌이켜 보면 만약에 그때 어머님이 오로지 막내동생의 편에 서지 않았다면, 그래서 다섯 형제에게 골고루 시간을 나누어 주었다면 그것은 막내 동생을 포기한 것과 다름없었을 것이다. 결국 막내동생의 편에 선 것이 어머니로서는 다섯 형제를 골고루 사랑한 것이었다.


그런 생각을 갖게 되면서 나는 하나님 사랑의 보편성을 강조하는 주류신학과 하나님 사랑의 당파성을 강조하는 민중신학, 해방신학이 서로 대립할 필요가 없음을 깨닫게 되었다.
정통신학은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누구든지 저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다’ 라는 하나님 사랑의 보편성을 강조하고 심령이 가난한 자는 누구나 천국의 주인이 될 수 있다는 입장이지만 반면에 해방신학이나 민중신학은 하나님 사랑의 당파성, 즉 가난한 사람이 천국의 주인이라는 입장을 택하고 있지만 사실은 이 두 입장은 상호보완적인 것이지 택일해야 하는 것은 아니었다.


즉 하나님 사랑의 보편성이 가난한 사람에 대한 특별한 사랑을 통해서 나타난다는 것이 성서의 뜻이지, 오로지 가난한 사람만이 구원받는다는 것이 성서의 뜻은 아니라는 것이 내가 프린스톤과 유니온을 거치면서 갖게 된 결론이었다.
그동안 전통적인 한국교회는 가난하고 소외된 사람들에 대한 관심이 약했고 반면에 그것에 저항한 민중신학 운동은 가난한 사람만이 천국의 주인이라는 당파적인 입장을 취했다. 그러나 이제는 두 생각이 하나로 합쳐져야 한다.



28. ‘엑셀’승용차 미국상륙의 감격



객지에 나가면 고향집 처마 끝도 그립다고 했던가. 내가 미국에 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엑셀자동차’가 미국시장에 상륙했다. 이것은 미국교포들의 자긍심을 높이는 데 엄청난 역할을 했다.


내가 살던 집 아래에 살던 어느 교포는 차를 한대 갖고 있으면서 엑셀자동차를 한 대 더 샀다. 물론 가격이 싸고 성능 면에서도 괜찮았기 때문이었지만, 한국의 눈부신 성장에 대한 감격도 차를 한 대 더 구입한 큰 이유였다. 이런 교포들이 한 둘이 아니었다.
그런데 ‘엑셀 자동차의 미국상륙’은 내게도 큰 충격이었다. 나는 한국에 있을 때만 해도 박현채 선생의 민족경제론의 눈으로 한국경제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한국경제의 경우 대외의존이 너무 심각해 세계 경제체제에 종속될 수밖에 없고, 이로 인해 경제가 왜곡된 형태로 성장할 수밖에 없으며, 당연히 국민의 생활도 갈수록 피폐해질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다.


따라서 세계경제와의 관계를 단절하고 자립적인 경제를 발전시키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한국경제는 마치 브레이크가 고장 난 자전거가 비탈길을 내려가는 것과 마찬가지다. 따라서 어느 때인가 ‘꽝’하고 파국이 올 것이다”라는 생각이 1979년에 내가 갖고 있었던 생각이었다.


그런데 나의 이런 생각은 미국에 온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곧 무너졌다.  나는 프린스턴신학교 졸업논문을 종속이론에 대해 썼는데, 논문을 쓰면서 나는 동남아시아의 네 마리의 용, 즉 한국, 대만, 홍콩, 싱카폴은 종속이론이 적용되지 않는 나라라는 사실을 발견하고는 깜짝 놀랐다. 그리고 내가 ‘곧 파탄사태가 닥칠 것’이라고 예상했던 1979년이 우리나라 경제가 가장 놀랄 만큼 발전했던 해였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충격적인 사례는 이 뿐만이 아니었다. 미국에 간지 얼마 지나지 않아 한국제품들이 미국의 K-mart 등 중저가 상품을 판매하는 백화점을 휩쓸고 있었다. 아무리 보세 가공품이라고 하더라도 후진국인 한국의 상품이 선진국인 미국 시장을 휩쓴다는 것은 처음엔 상상하기 힘들었다.


나는 엑셀차의 미국상륙을 보면서
“현대자동차에 근무하는 젊은이들이 나처럼 종속이론을 신봉하지 않은 것이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가. 현대자동차에서 일하는 젊은이들이 한국 같은 후진국도 미국 같은 선진국에 자동차를 팔 수 있다는 신념을 갖고 그것의 성취를 위해서 불철주야 일해 준 것이 얼마나 고마운 일인갚
라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현대차 노동자들이 나 같은 운동권이 아니었던 것을 진심으로 감사해 했다.


그리고 나는 이렇게 결심했다.
“이제까지 어두운 뒷골목에서 음침한 게토의 일원으로 우물 안 개구리처럼 살아왔지만, 앞으로는 절대로 그렇게 살지 않겠다. 앞마당에 나와 밝은 개명천지에서 대기를 호흡하면서 보통사람들처럼 생각하면서 살겠다”고.

대학시절 이래로 나는 평등사회를 꿈꾸었다. 그리고 급속한 경제성장을 이룩하면서 모두가 평등한 사회를 실현하기 위해서는 혁명이 불가피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물론 혁명의 방식에 대해서는 뚜렷한 그림이 없었지만 혁명이 불가피하다는 생각만은 흔들림이 없었다.
그런데 미국에서 6년간 지내면서 이러한 생각을 포기하게 되었다. 그리고 스웨덴과 같은 북유럽의 민주복지국가나 독일과 같은 사회적 시장경제체제가 우리가 지향할 방향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리고 자본주의 시장경제체제의 효율성과 역동성에 기초하되 자본주의가 가져다주는 빈부의 양극화 현상을 정부가 개입해서 시정함으로써 경제성장과 사회적 형평을 동시에 실현하는 나라가 앞으로 한국이 나아갈 길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다.
또 하나 미국에서 발견한 놀라운 사실은, 한국 사람들의 잠재력에 관한 것이었다. 나는 뉴욕의 한인교포들이 이민 온 지 10년 안팎의 짧은 시간 동안 뉴욕의 청과시장, 드라이클리닝, 수산시장을 완전히 장악한 것을 보고 감탄을 터뜨렸다.


또한 한국인과 미국인의 삶에 대한 자세가 다른 점도 실감했다.  미국인은 인생을 즐기기 위해서 산다면 한국인들은 목표를 성취하기 위해 살아가고 있었다.
나는 이런 점들을 보면서 ‘내가 죽기 전에 우리나라가 미국을 능가하는 날을 반드시 보고 죽을 것’이라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물론 경제학적인 근거가 있는 것은 아니다. 그리고 요즈음 같아서는 이런 생각은 다 부질없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것이 내가 미국에서의 6년 세월 동안 직관을 통해 얻은 확신이었다.


29. 한국 청년, 미국 청년, 그리고 교포 청년



우리 부부는 함께 공부를 했기 때문에 미국에서의 생활은 넉넉하지 못했다. 미국으로 떠날 때 가지고 갔던 돈 2천불 이외의 모든 유학비용은 나와 처가 아르바이트를 해서 충당했다.
내 학비는 이승만 목사님께서 주선해 주신 미연합장로교의 장학금으로 충당했고, 생활비는 내가 한인교회에서 교육전도사로 일하며 받은 사례비와 아내가 한인가게에서 일하거나 교회에서 한글학교 교사를 하며 번 돈으로 메꾸었다.


한편으로 부족한 영어실력을 가지고 신학공부 하느라 고생하고 다른 한편으로 생활비와 학비를 버느라 이리저리 뛰어다녀야 했다. 그러면서도 민주화 투쟁의 길에서 벗어나 도망쳐 왔다는 죄책감이 늘 나를 짓눌렀다.
그래서 시간여유가 생기면 어떻게 교포사회에서 기독학생 운동을 만들어낼 수 있을까를 조금씩 고민하기 시작했다.


나는 교회나 YMCA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다가 교포청년들을 만나는 시간이 많았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그들과 어울리며 교포청년들에게 대해 관심을 갖게 되었는데, 그러다 보니 자연히 교포사회의 현실에 대한 인식이 깊어졌다.
교포사회의 현실은 한국의 현실과 매우 다르다. 이들이 이민을 갈 때는 미국에서 성공하겠다는 것이 목표였다. 그러나 교포 1세는 언어 장벽 때문에 미국사회의 주류가 되지 못하고 결국에는 경제적 안정을 얻는 것만을 목적으로 삼는다. 그리고 이 목적을 위해 열심히 일한 교포1세들은 경제적으로 성공할 수 있었다.


그리고 교포1세들은 자기들은 그렇게 되지 못했지만 2세들만은 미국사회의 주인으로서 대접받으며 살기를 원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세들은 언어문제가 해결되었음에도 불구하고 피부색 때문에 부모와 비슷한 좌절을 겪는다. 미국이 백인중심의 사회이기 때문에 2세들도 유색인종이라는 이유로 미국사회에서 주변화되고 마는 것이다.
나는 뉴욕 부르클린 한인교회의 교육전도사로 있으면서 대학생 청년들과 대화를 통해 교포청년들의 상황과 고민을 이해하게 되었다. 우선 교포청년들의 모습을 보면 교포청년들은 눈빛부터가 한국의 청년과 많이 다르다. 한국의 젊은이들은 상황 탓이기도 하지만 조국을 위해 민주화운동에 뛰어 들었고 눈빛도 맑고 또랑또랑했다. 반면에 미국의 젊은이들은 ‘엔조이’와 ‘물질적 부’가 인생의 목표인 경우가 많았다. 그리고 교포청년들도 이런 미국청년들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다만 그들처럼 그 사회에서 주인으로 대접받고 있지 못할 뿐이었다.


나는 이런 교포청년들에게 민족적 아이덴터티가 얼마나 중요한가를 일깨우려고 노력했다. 그들이 차별과 주변화로 인한 소외감을 극복하고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 좀 더 성숙한 인간이 될 수 있기를 바랐다.
처음엔 많은 교포청년들이 자신이 코리안이라는 것을 매우 싫어했다. 그러다가 나중에는 코리안이라는 민족적 아이덴티티를 찾지 않으면 안 된다는 점을 깨닫고 한국말도 배우고 민족교육도 받고 싶어 했다.
대부분의 2세들은 한국말을 제대로 하지 못하는 것은 물론이고 한국인으로서의 긍지를 느낄 만큼 한국에 대한 정보도 갖고 있지 못했다. 그들이 학교에서 배우는 것은 모두 미국에 관한 것이고 이 때문에 자신이 유색인종으로 미국사회에서 대접받지 못하고 있다는 갈등만 커져갔다.


2세들이 이처럼 혼돈 속에서 지내고 있는데도 부모들은 미국사회에 살아남기 위해 밤낮으로 일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나는 흑인 등 다른 유색인종들과 연대해서 미국사회를 좀 더 다원적인 사회로 만들어 내는 것이 필요하며, 이 일에 한인들이 나서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 일에 앞장설 수 있는 청년단체를 만들었다. 교포청년들의 조직인 청년동우회가 그것인데, 이 모임에 변호사, 대학생 등 20~30세의 교포청년들이 15명가량 가입하였다. 나는 유학생이었기 때문에 직접 회원으로 가입하지는 않고 조직을 만드는 일만 도왔다.


그리고 나는 두 가지 일을 했다. 하나는 교회를 중심으로 흑인과의 대화 프로그램을 기획해서 한인교회 교인들과 할렘가의 흑인교회 교인들이 만나서로 대화를 갖도록 했다. 코리안과 흑인이 서로 연대할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하기 위해서였다.
그 당시엔 흑인과 한인 사이의 분규가 극심했다. 한국인들은 흑인동네에서 가게를 운영하면서도 흑인들을 멸시했다. 그래서 한·흑 충돌이 잦았다. 이 때문에 한인들과 흑인들이 서로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도록 만드는 대화프로그램이 필요했다.
또 한편으로는 미국경찰들의 횡포에 대한 항의운동을 폈다. 미국의 백인 경찰들의 흑인혐의자에 대한 잔혹한 폭력은 흑인폭동을 유발시킬 정도로 극심했고 한국인에게도 종종 그런 일이 발생했다.


한번은 미국경찰이 한국 사람에게 잔인하게 폭력을 휘둘렀다는 소식을 접하고 퀸즈에 있는 경찰서 앞에서 청년동우회가 주최가 되어 규탄데모를 하기도 했다. 이들 청년동우회의 활동은 한인사회에 신선한 충격을 주었는데, 그 전에는 이런 성격의 단체가 없었기 때문이다. 이론적인 연구나 문제인식은 있었지만, 본격적인 청년운동은 처음이었다고 볼 수 있었다.

나는 청년동우회 활동을 도우면서 교포청년들이 민족적 자긍심을 되찾았을 때 얼마나 활기차게 생활할 수 있으며, 결국 이들은 영어를 잘하거나 한국말을 잘하거나에 상관없이 모두가 한민족공동체로 묶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절감했다. 그리고 이때의 경험은 내가 뒤에 경실련 국제부를 통해 세계 각국에 흩어져 있는 교포청년들과 입양아들을 묶어 한민족 공동체운동을 펴는 계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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