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의 내용은 안타까운 제 아버지의 사연입니다.
저의 고향은 길림성 연길이고, 부모님은 보통 사람들보다 건강이 안 좋은 편이었습니다. 게다가 안정 된 직장이 없다보니 생활의 넉넉함이 없는 것은 불 보듯 번한 일입니다. 생계에 어려움을 겪다보니 가정의 따스함이나 행복이라는 말은 저의 가정에서 만큼은 어울리지 않는 사치입니다. 가정의 잦은 불화로 인하여 불행하게도 부모님은 극단적인 선택, 2003년 7월에 이혼을 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아버지와 함께 살게 된 저는 지금 어머니의 행방조차도 알 길이 없어졌습니다.
성품이 착한 아버지는 대학을 다니고 있는 저의 뒷바라지를 하느라 마음고생이 이만 저만 아닙니다. 이런 사연을 보다 못한 고모님 부부가 저의 집으로 이사를 하여 함께 살게 되었습니다. 그 덕분에 저는 북경사범대학에 입학하게 되었습니다. 아버님의 혼자 힘으로 중국에서 대학을 다니고 있는 저의 대학등록금을 마련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입니다.
급기야 살고 있던 20평 남짓 되는 집을 팔 수 밖에 없는 처지에까지 이르게 되었습니다. 작은 보금자리마저 내어놓고 난 아버지는 고심 끝에 한국으로 가려고 높은 이자를 조건으로 돈을 빌렸습니다. 하여 2004년10월 기쁜 마음으로 출국하게 되었는데 도착한 곳은 한국이 아니라 한국인이 운영하는 아프리카의 한 나라인 가나였습니다.
음식은 물론이고, 견디기 어려운 무더운 날씨, 수용소로 착각할 정도의 군인들의 경비, 이런 환경을 적응하기엔 아버지로서는 불가능 했습니다. 게다가 월 800불을 받기로 한 약속도 지켜지지 않았습니다. 아버지는 차츰 안달아 나기 시작하였습니다. 출국 할 당시 저에게 돈을 보내 줄 것이라며 예금통장의 계좌번호까지 가지고 간 아버지였습니다. 아버지는 흔치 않는 기회에 북경에 있는 저에게 전화를 하여 돈이 입금 되었는지를 확인하였지만 통장으로 입금 된 돈은 한 푼도 없었습니다. 월급날이 10일 지났지만 아무런 소식이 없었습니다. 하여 아버지는 계약서를 가지고 사장과 면담을 하며 따졌지만 돌아온 것은 폭행과 계약서를 빼앗기는 결과였습니다. 아버님은 공포감을 느끼게 되었고, 계약서를 되찾으려고 다시 사장을 찾아갔지만 전 번과 마찬가지로 폭행을 당하여 이번에는 허리마저 움직이기 힘들 게 되었습니다.
회사의 규정상 식사를 할 때에도 말을 못하게 하였고, 전화를 하여도 총을 든 군인 경비가 따라다니며 감시하였습니다. 감옥이 따로 없었습니다. 이곳에서 인권을 논한다는 것은 곳 죽음을 상징하듯 살벌했습니다. 죄인도 아닌 아버지가 이처럼 구속 된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에 한심스러웠고, 밤잠은 물론이고 눈물마저도 흐르지 않았습니다. 분명 사기당한 것이었습니다. 하여 아버님은 고심 끝에 사장을 찾아가 중국으로 돌려보내 줄 것을 요구하였으나 사장은 협박으로 일관하였습니다. 상황이 이 지경에 이르게 되자 아버지는 생명에 위협을 느끼게 되었고, 공포와 정서적인 불안으로 심각한 정신적인 충격을 입었습니다.
아버지는 고심 끝에 탈출을 결심하게 되었고, 경비가 없는 틈을 타서 어렵게 회사 담장을 뛰어 넘었습니다. 허겁지겁 급하게 찾아간 곳은 가나주재 중화인민공화국 대사관이었습니다. 아버지의 사연을 다 듣고 난 대사관의 직원들은 동정하는 기색은 있었으나 사건을 해결할 의사는 없는 눈치였습니다. 무일푼 아버지에게 대사관에서 돈을 주어 어렵게 지옥과도 같은 곳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연변으로 돌아 온 아버지는 너무도 억울하여 시 공안국, 주 공안국, 심지어 북경까지 찾아가 신고를 하였지만 3년이 되어가는 지금까지 아무런 소득도 없습니다. 아버지는 지금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많이 피폐해져 있습니다. 인민폐로 7만원을 사기 당한 것이 짐이 되어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칠흑 같은 어둠속에서 집도 절도 없이 하루하루를 지내고 있습니다. 저는 어쩔 수 없이 ‘국가 신용대출’ 1만8천원을 빌려다가 공부를 하였지만 다른 학생들처럼 필수과목인 연구생공부는 꿈도 꾸지 못하고 있습니다. 저도 더 이상은 버틸 수 없습니다.
얼마 전 아버지는 저의 뒷바라지할 겸 빌린 돈 이자라도 갚을 생각에 청도로 갔습니다. 그런데 운명의 장난일까요? 아픈 다리 침질이라고, 엎친 데 덮친 격이었습니다. 그 곳에서도 아버지는 사기당하여 헛고생만하다 돌아왔습니다. 아버지를 바라보는 저의 마음은 찢어질 것만 같은데 부모 입장인 아버지의 마음은 오죽하시겠습니까?…
어려운 지금의 이 현실을 우리父子 견디기엔 숨이 턱까지 차오르는 버거운 일입니다.
아무런 연고가 없는 저의 아버님이 한국으로 갈 길은 없을까요?
좋은 소식 기다리겠습니다.
(당신의 따뜻한 손길을 기다리겠습니다. 동북아신문으로 연락 바랍니다.--편집자.)
서울조선족교회 인권센터 김명수 간사 정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