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내복 솔기에 넣어서 교환한 연애편지
감옥에 갇히는 것이 좋을 리 없는 일이지만 평생에 잊을 수 없는 몇 가지 추억을 만들어주기도 한다.
아내와 연애편지를 내복 귀퉁이에 숨겨서 주고받았던 경험은 지금 생각해도 가슴 뭉클한 아름답고 소중한 추억이다.
지금은 면회가 금지되는 법이 없지만 당시 긴급조치위반자의 경우에는 면회도 편지 왕래도 다 불가능했다.
따라서 당시 정치범들은 내복 귀퉁이 솔기를 이용해 비밀편지를 교환하였다. 감방 안에서 쓰는 누런 화장지에 어렵게 구한 볼펜으로 빽빽하게 편지를 써서 겨울 내복 밑단이나 팬티의 오줌 구멍 밑단을 뜯어 편지를 집어넣고 다시 바늘로 꿰매어 밖으로 내보내는 식이었다. 나와 아내도 이 방법을 이용해 편지를 교환했다. 이 가운데 10개월만에 처음으로 아내를 특별면회로 잠시 만나고 그리움과 안타까움으로 쓴 편지는 지금 봐도 가슴이 뭉클하다.
“당신을 접견한 후 며칠 간 당신의 영상이 사라지질 않더니 꿈도 계속 꾸었소. 오랜 만에 본 당신의 모습이 얼마나 아름다웠던지 모르겠소. 요즈음 와서 더욱더 당신이 얼마나 내게 소중한 존재인가를 절실하게 느끼오. 당신은 나를 위해 할 일이 많고 베풀 일이 많지만, 나는 당신을 위해 베풀 일이 없구려.
내가 언제나 다시 당신의 손의 감촉을 느낄 수 있게 될까? 그러나 나는 지금 이 순간에도 당신을 만나고 있소. 그리고 사랑하는 대상을 가지고 있다는 것으로 충분히 행복한 것 같소. ---- “
남자가 감옥에 갇혀 있을 때 애인이나 부인이 있는 경우와 없는 경우는 하늘과 땅 차이다. 특히 시국사범들은 감옥에서 많은 책을 읽는데, ‘책 뒷바라지’를 제대로 받으려면 애인이나 부인이 꼭 있어야 한다.
내 경우에도 3차례 감옥에 있는 동안 평소에 읽지 못한 철학서, 역사서를 비롯해 일어, 영어 등 어학서적들을 집중적으로 읽었다. 그리고 그 뒷바라지를 한 사람이 바로 아내였다. 특히 민청학련사건 때는 결혼하기 전이었지만 신혜수는 내가 석방될 때까지 서울구치소와 안양교도소로 일주일에 세 차례씩 꼬박꼬박 찾아와 면회는 하지 못한 채 빨래와 책 뒷바라지를 했다. 또 감옥에 갇힌 상황에서도 바깥 일이 궁금하고, 정인승, 원정연, 황주석 등 밖에 있는 후배들에게 전할 말들도 많았다. 그러면 나는 화장지에 빽빽이 글을 써서 내보냈다.
석방되기 두 달 전에는 안양교도소에 있던 정치범 13명이 합방을 했다. 구속자 가족들이 중심이 된 석방운동이 갈수록 거세어지자 박정권이 유화정책을 쓴 것이다. 그때 함께 지냈던 사람들은 김동길교수, 안재웅선생, 나, 김병곤(사망), 이원희, 나상기, 이광일 등이었다.
사방이 꽉 막힌 독방에서 혼자 지내다가 뜻이 맞는 사람들과 함께 지내니 비록 감방이라고는 해도 너무 좋았다. 우리는 함께 공부도 하고, 토론도 하고, 우리 자신과 우리사회의 미래에 대해서 많은 꿈을 꾸기도 했다. 게다가 김동길 교수는 과일 등 영치물도 엄청 많았다.
저녁 점호가 끝나고 8시 취침이 시작되면 김동길 교수가 서양세계사 강의를 했다. 김교수는 낭랑한 목소리로 영시를 암송하기도 했다. 마지막 두 달 간의 안양교도소 생활은 감옥 안이라는 생각이 전혀 들지 않았던 정말로 환상적인 생활이었다.
그리고 우리는 1975년 2월 대부분 석방되었다. 안양교도소를 나오는 날 부모님과 함께 신혜수도 마중 나왔다. 나는 혜수에게 뜨겁게 키스하고 싶었는데 여러 사람들의 눈 때문에 차마 하지 못했다. 그때 용기부족으로 키스를 하지 못한 것이 지금도 후회스럽다.
그리고 1975년 12월 7일 우리는 새문안교회에서 강신명 목사님의 주례 하에 결혼식을 올렸다. 그러나 결혼식까지의 과정은 매우 험난했다. 어찌 장인어른이 앞길이 창창한 딸을 나같이 앞길이 꽉 막힌 사람에게 주는 것이 쉽겠는가 말이다. 그래서 내처는 집안의 극심한 반대에 부딪쳐야 했다. 그러나 우리의 관계는 처가의 반대 때문에 좌절을 겪을 관계가 아니었다. 반대를 견디다 못해 혜수는 아버지에게 “이제는 내가 내 길을 갈 수 있도록 허락해 달라”는 편지를 썼다. 장인어른은 그 편지를 읽고 술에 취해 귀가하셔서 딸의 결혼을 허락하셨다고 한다. 이런 내용도 모르고 그때 나를 감시하던 중앙정보부 직원은 해군제독의 아들과 노동청 노정국장의 딸이 결혼을 하니 격에 맞는다는 말을 했지만 말이다.
그렇지만 결혼한 지 32년이 되는 지금 돌이켜보면 과연 내가 신혜수의 좋은 남편이었는지는 잘 모르겠다. 아내에게 나는 참 부족한 남편임을 솔직히 고백하지 않을 수 없다.
20. 세계를 울린 어머니의 기도
나의 어머니는 금년 나이 여든여덟살이시다. 어머니는 젊은 시절에 중국 남경의 금릉대학(지금의 남경대학) 사회사업학과를 졸업하신 재원이었지만 다섯 아들을 낳아 키우느라고 가정을 위해 자신의 삶을 희생하신 분이다. 어머니가 사회에 나와 일하셨다면 큰일을 하셨을 분이다. 그리고 나도 아버지보다 어머니의 기질을 더 닮았다고 생각해 왔다.
어머니는 막내 동생 현석이를 낳기 전만 해도 무척 자존심이 강한 여성이었는데 현석이가 정신박약아임을 알게 되고 현석이를 특수학교에 보내면서 굉장히 겸손해지셨고 또 신앙심이 깊어지셨다. 또 현석이가 17살 되던 해에 현석이를 잃어버린 후에도 어머니는 정신박약아 부모운동을 열심히 하셨다.
그런데 어머니는 내가 운동권이 된 후에도 나를 이해하시려고 애쓰셨다. 중국 금릉대학 시절의 친구들 중에 공산주의자가 꽤 있었던 것도 어머니가 자식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었던 것 같다.
그런데 어머니는 나와 내 동생 창석이가 민청학련 사건으로 구속되어 각각 20년형을 선고받고 복역할 때 옥바라지로 고생이 많으셨다. 그리고 신혜수와 함께 구속자 가족들 모임에도 열심히 참여하셨다.
그 즈음 명당성당에서 개신교와 천주교가 함께 한 연합기도회에서 구속자 가족 대표로 어머니가 기도를 드렸다가 그 내용이 너무 감동적이어서 그 기도문이 세계 20여개 나라 말로 번역되기도 했다.
감옥에 있는 사람들에게 <새가정>책은 반입이 허용되었는데 그 책에 어머니의 기도문이 실려서 나도 감옥에서 어머니의 기도를 읽었다. 감옥 안에서도 많은 사람들이 그 기도문을 읽고 큰 감동을 받았다. 석방이 된 후에 많은 사람들이 내게 와서 <어머니의 기도>가 우리 모두를 석방시켰다는 말을 했다. ‘어머니의 기도’ 전문을 소개한다.
“하나님께서는 저희들을 지극히 사랑하셔서 독생자 예수 그리스도로 하여금 당신의 자녀로 삼아 주셨고, 또한 저희들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 기도할 수 있는 특권 주신 것을 진심으로 감사하옵나이다.
이 자리에 많은 구속당한 사랑하는 아들들의 어머니들과 이 슬픔을 같이 나누는 많은 어머니들의 마음과 정성을 합하여 기도하오니 이 기도가 옛날의 솔로몬 왕과 같이 참으로 하나님의 마음에 합하는 기도로 삼아 주시옵소서.
그리하여 구하지 않은 것까지도 넘치는 축복을 내려 주시옵기를 간절히 바라옵고 바라옵나이다.
하나님 아버지시여. 저의 사랑하는 아들들이 옥에 갇힌 지 어느덧 봄이 지나고 여름철이 지나 쌀쌀한 가을을 맞이하여 추석을 며칠 앞둔 저의 어머니들은 슬픈 마음과 눈물을 금할 길이 없습니다.
이 답답한 마음을 가눌 길이 없어서 때로는 높은 산을 헤매여 하나님 앞에 통곡하여 부르짖었습니다. 또 철야기도로서 하나님 앞에 매달려 눈물의 호소를 하였습니다. 이제는 더 이상 지체하지 마옵시고 저희들을 불쌍히 여겨 주옵시고 저의 기도를 응답하여 주옵소서.
하나님 아버지시여. 저의 아들들의 중심을 보살펴주시옵소서. 그들은 자기의 안일과 행복을 염두에 두지 않았고 그들은 진정코 이웃을 사랑하였습니다.
이들 중에는 연희동 빈민의 아이들에게 야학으로 봉사하였습니다. 또한 소외된 구두닦이와 신문팔이 아이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였고 위로하였으며 또한 그들은 불쌍한 고아들의 벗이 되어 즐기기를 자원하였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쫒아 정직하며 불의를 싫어하며 참과 거짓을 구별하며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사랑을 깨닫게 하며 사랑을 실천하기를 노력하였습니다. 지금도 저의 아들들은 옥중에서 믿지 않는 형제들에게 그리스도의 말씀을 전하며 빵 한 조각이라도 나누어 먹는 소식을 전해 들을 때 하나님 앞에 감사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나님 아버지시여. 그들을 긍휼히 여기시옵소서. 그들이 잘못이 있사옵거든 일곱번 일흔번이나 용서하여 주시는 하나님. 그들로 하여금 회개하며 용서를 빌어 소원의 그날이 속히 오기를 간절히 바라옵나이다.
황인성의 어머니를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그는 시골에서 빨갱이 집이라는 오해를 받아 낙심하여 자살을 기도하였아오니 그를 위로하여 주시옵소서. 김경남 어머니를 불쌍히 여겨주시옵소서. 품팔이를 하면서 아들의 뒷바라지를 하고 있사오니 그에게 도움의 손길을 주시옵소서.
김영준의 어머니는 아들을 보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 아들은 눈물을 흘리면서 닷새 동안 금식을 하였답니다. 그의 유족들을 위로하여 주시옵소서. 그 외에도 많은 어머니들이 고통을 겪고 있습니다. 이들을 위하여 기도하여 주시옵소서. 저의 어머니들은 숱한 밤을 뜬 눈으로 새웠습니다.
바람이 불고 비가 올 때 아들을 생각하며 잠을 못 이룹니다. 길을 갈 때 그들의 친우를 만날 때는 목이 메어 말을 못합니다. 또한 매일 식탁을 대할 때 음식을 보고 어찌 아들 생각을 잊을 길이 있겠습니까?
주님이시여. 저희의 가슴 아픔을 어찌 다 표현하겠습니까.
하나님 아버지시여. 저희가 진심으로 하나님 앞에 회개합니다.
이 나라 이 민족을 불쌍히 여겨 주시옵소서. 과거에 내 자식만 잘 먹고 잘 입히겠다는 죄를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참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고난을 깨닫지 못하고 내 자식이 세상에서 다 바라는 출세를 기대했던 죄를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많은 가난한 이웃을 보면서도 그들의 이웃되기를 꺼려한 것을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또한 이 나라에 불우한 과부들과 고아들의 고통을 외면하는 모든 사치를 좋아하는 어머니들의 죄를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이제는 저희들은 사랑하는 아들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저의 어머니들에게 무엇을 원하는가를 깨달았습니다. 남의 자식을 내 자식처럼 사랑하라는 것입니다.
하나님 아버지시여. 저희들에게 믿음을 허락하시사 이 어려운 시련을 능히 이기고도 내 이웃을 위하여 헌신 봉사할 수 있게 도와주시옵소서. 고난을 통하여 하나님의 은혜가 얼마나 풍성한가를 깨달으며 저의 모든 성도들이 더욱 합심하여 하늘나라가 이 땅위에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바라와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