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스토리(1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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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스토리(17~18)
  • 서경석 토론자
  • 승인 2007.04.0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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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경석 목사의 장편 실화

17. 다시 하느님에게로

중앙정보부 요원들에게 이끌려 붉은 건물 지하실에 들어서자 여기저기서 몽둥이가 사정없이 날아 왔다. 우락부락한 남자들에 둘려 쌓여 정신없이 맞고 나자 소지품을 전부 다 꺼내 놓으라고 했다.
그러자 헌혈 증서가 나왔다.
“이게 뭐야?”
“헌혈증섭니다. 오늘 낮에 교회에서 헌혈을 했습니다”
“어디 봐”
나는 아직도 주사자국이 선명한 오른 팔을 보여 주었다.
그는 내가 불쌍해 보였는지 더 이상의 몽둥이 찜질을 하지 않았다.
이렇게 해서 나는 정치범들의 첫 수사 때 의례히 행해지는 ‘죽지 않을만큼의 몰매’를 상대적으로 가볍게 넘겼다. 헌혈증서가 내게 행운을 가져다 준 셈이었다.
그렇지만 이미, 약간의 거짓말을 보태어서 얼굴이 두 배로 부풀어 오른 것같았다. 공포의 중앙정보부에 정면으로 걸려든 것이었다. 나는 ‘앞으로 얼마나 더 맞아야 이곳에서 나갈 수 있을까’를 생각했다.
문밖에서 발자국 소리만 들려도 나는 깜짝깜짝 놀랐다.
‘또 무슨 새로운 것이 터졌나? 제발 조사가 없었으면’ 하고 조마조마한 마음이었다.
이렇게 며칠간 수사를 받고 나는 육군본부 영창으로 옮겨졌다.

군 영창의 생활도 참 힘들었다. 감옥에서 바깥사람에게 편지를 쓸 때에는 의연한 척 했지만 실제로는 하나님께 기도할 때 하루빨리 석방시켜달라고 기도드리곤 했다.
제일 힘들 때는 잠에서 막 깨어났을 때다. 꿈에서는 어린 시절로 돌아가 운동장을 뛰어 다니기도 하고, 교회에서 예배를 보고 찬송가도 불렀지만 눈을 뜨는 순간 시커먼 철창이 보였고, 나는 사방이 꽉 막힌 독방 안에 있었다.
아침 열시정도가 지나면 그날은 아무 일도 없는 날이다. 그런데 그 전까지는 언제 불려갈 지 몰라 불안에 떨어야 했다. 그리고 내 수번이 불리는 날에는 ‘오늘은 또 얼마나 당하게 되는 걸까’하는 불안감에 휩싸였다.

군 영창에서의 예배와 설교 경험은 내겐 신선한 체험이었다. 군 영창에 있으면서 한주 일에 두세 차례씩 예배를 드렸는데, 그 때마다 내가 영창에 갇힌 사병들 앞에서 설교를 하곤 했다. 대부분이 탈영병이었지만 개중에는 사형수나 무기수도 있었다. 바깥에서의 나의 설교 주제는 항상 사회적인 것이었지만 근무이탈을 해서 좌절과 절망에 빠져 있는 탈영병, 언제 어떻게 될지 몰라 두려움에 떨고 있는 사형수와 무기수에게는 그런 설교가 필요한 것이 아니었다. 나는 “예수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계십니다. 예수님께서는 버림받고 좌절하고 외로운 사람들의 친구가 되십니다”고 설교했다.


군 영창에 갇혀 있는 약 한 달의 기간 동안 나는 나이가 든 중사 한 분을 전도했다. 그분은 정말로 갈급하게 믿음을 갖고 싶어 했다. 그분은 월남에서 마약을 구입해서 한국으로 갖고 들어왔는데 마약 단속반의 공작에 걸려 마약을 팔려다가 현장에서 체포되었다. 그런데 감옥에서 나를 만나 예수님을 영접하였는데 그러고도 그분에게는 한 가지 큰 고민이 있었다. 아직 마약 반 덩어리가 숨겨져 있는데 이것을 어떻게 할 것인가를 결정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분의 말을 들으면서 그분과 함께 성경을 읽었다. 그때 함께 읽은 성경구절이 재물을 하늘에 쌓아두라는 구절이었다. 그 구절을 읽고 그 분은 결심을 했다. 그리고 얼마 후 면회 온 아내에게 남은 마약을 강에 버리라고 말했다고 환한 얼굴로 나에게 말했다. 몇 년이 지난 후에 그분이 나를 수소문해서 나를 찾아와서 우리는 다시 기쁘게 만났다. 그 분은 시골에서 농사를 지으며 믿음생활 하며 잘 살고 있다고 내게 ‘보고’했다.    


서울구치소로 옮겨간 뒤부터는 예배를 볼 수가 없었다. 긴급조치위반자들은 예배당에 못 가게 했기 때문이다. 안양교도소로 옮겨진 후에도 이점은 마찬가지였다. 그래서 안양교도소에서는 일요일 아침이면 옆방의 긴급조치 위반자와 통방을 하면서 예배를 봤다. 안양교도소에 있을 때에는 이층에 작은 독방이 이어져 있고 여기에 긴급조치 위반자들이 나란히 들어 있어서 통방하기가 좋았다.


일요일이면 우리는 철창을 붙잡고 바깥을 바라보며 예배를 드렸다. 아래  층에 있던 김형기(목사)가 금관의 예수를 열창하면 가슴 벅찬 감동으로 목이 메었다. 다닥다닥 붙은 닭장 같은 독방의 철창문을 부여잡고 우리는 ‘얼어붙은 저 하늘과 저 땅’에 예수가 온 것처럼 이 철창 안에도 예수님이 오시기를 간절하게 기도했다.

나는 감옥생활을 하면서 형제들과 함께 일요일 예배를 볼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큰 하나님의 은총인가를 절감했다. 그리고 ‘우리들 기독교인들은 다 홀로 떨어져서 예배 보도록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함께 예배 볼 수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의 은총입니다.’라고 쓴 디이트리히 본훼퍼 목사님의 옥중서간 말씀이 나의 가슴깊이 와 닿았다. 그리고 함께 예배보지 못하는 고통에 가슴 아파 했고 어느 날 석방되어 새문안교회에서 형제들과 함께 예배 볼 수 있는 그날이 오기를 고대하고 고대했다.


돌이켜 보면 나는 그렇게 신념이 강한 사람이 아니다. 그래서 그런지는 몰라도 나는 감옥생활을 하면서 내가 가지고 있는 진보에 대한 신념이나 사회과학적 지식이나 사회주의의 철학이 감옥생활을 이겨내는데 거의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음을 깨달았다. 영하 15도가 넘는 추운 감옥에서 그것도 병까지 나서 견디기 어려운 상황에 빠졌을 때도 이를 이길 수 있었던 것은  어렸을 때부터 가정교육과 주일학교 교육을 통해 여전히 나의 한구석에 계셨던 하나님께 간절하게 기도드리고 하나님께 매달릴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나는 감옥생활을 하면서 하나님에 대한 신앙 없이는 어떤 것도 할 수 없음을 절실히 체험한 것이었다.  

18. 전나무 같은 여자, 신혜수

나의 첫 수감생활을 말하려면 먼저 나의 아내 신혜수에 대한 이야기부터 해야 한다. 그만큼 민청학련사건으로 감옥에 갇힌 내게 큰 힘이 되어 준 사람이 바로 아내, 신혜수였다.
내가 아내를 처음 만난 때는 진해에서 올라와 서울의 해군본부에 근무할 때였다. 나는 아직도 해군장교이면서도 ‘걸림돌’이라는 모임을 만들었다. 기독교운동을 앞에서 이끌던 청년들의 모임이었는데, 그곳에서 아내를 만났다. 이 모임에는 김동완(前NCC총무), 권호경(前NCC총무), 인명진(갈릴리교회목사), 이창식(YMCA), 김성재(한신대 교수), 이미경(국회의원) 신필균(사회복지공동모금회 사무총장) 등이 멤버였는데 모임을 꾸리다 보니 여성회원이 좀 더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평소 가깝게 지내던 이옥경(조영래변호사 부인)씨에게 걸림돌에서 활동할만한 여성회원을 몇명 추천해달라고 부탁했는데, 이때 소개받은 사람이 바로 신혜수였다.
처음 만났을 때 나는 신혜수에게 이성으로서 호감을 갖지는 않았다. 그런데 어느 날 신혜수가 내게 몇 가지 따끔한 충고의 말을 했다. 자기가 보기엔 모임을 잘 꾸려보려는 내 의욕이 앞서서 다른 회원들을 부담스럽게 만들고 있고, 그것이 오히려 모임의 활성화에 역효과가 되고 있다는 것이었다. 듣고 보니 일리 있는 말이었고, 논리정연하게 나를 설득하는 신혜수의 모습이 매우 신선하게 느껴졌다. 돌이켜 보면 그 날의 대화가 아내와 나를 연인의 관계로 발전시킨 계기가 되었던 것 같다.

그때부터 나는 신혜수에게 이성으로서 호감을 갖게 되었고, 이런 저런 이유를 대고 신혜수를 불러내서 만나곤 했다. 그리고 만난 지 6개월쯤 지난 73년 어느 날 우리 집 근처 다방으로 불러내 처음으로 사랑을 고백했다.
“당신은 참 순수하고 담백한 여자다”고 말하고 아내의 손을 덥석 잡으며 ‘당신을 좋아 한다’고 고백했다. 지금도 내 고백을 듣고 놀라던 아내의 눈이 기억에 남아 있다. 여하튼 그날의 고백이 있은 뒤부터 본격적인 데이트가 시작되었다.

아내를 만날 즈음은 내가 평생을 혁명가로 살아가리라고 결심하고 있던 때였다. 때문에 그 당시 내가 바라던 여성상은 나와 혁명의 길을 함께 가 줄 동지적인 여성이었다.
하지만 사회운동에 관심을 갖는 여학생이 아주 드물었던 그 당시만 해도 이처럼 ‘의식 있는’ 여성을 만나는 것이 매우 어려웠다. 때문에 결혼에 대해 엄두를 잘 내지 못했다. 고생길이 훤한 나 같은 운동권 남자와 결혼할 여자가 있을 것 같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런 고민은 비단 나뿐만 아니라 학생운동권에 몸담은 대부분의 젊은이들의 공통의 고민이었다. 우리보다 윗 세대 선배들의 경우에는 사회운동과 전혀 인연이 없는 부인을 얻은 경우가 많았다. 말하자면 독립운동에 나서는 남편을 삯바느질 하면서 기다리는 아내의 모습이 우리 윗 세대의 부부상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우리 세대부터 운동권 부부가 탄생하기 시작했다. 이화여대에 이효재 교수의 제자들이 중심이 된 진보서클인 ‘새얼’이 생기면서 새얼회원들과 연애를 한 운동가들이 많았다. 새얼모임은 대부분 이효재(여성민우회 고문)선생의 제자들로 구성된 여자들만의 모임으로 이화여대 운동권 서클의 효시라고 볼 수 있다. 새얼 출신 중에는 이옥경(고 조영래변호사 부인), 신혜수(서경석 부인), 이미경(이창식씨 부인), 최영희(장명국씨 부인), 장하진(김홍명 前조선대총장 부인), 김은혜 (신철영씨 부인), 인재근 (김근태씨 부인), 오성숙(김세균교수 부인) 등이 있다. 아내와 나도 이대 새얼모임 커플 가운데 하나인 셈이다.


우리는 뜨겁게 연애를 했다. 정신없이 바쁜 와중에도 열심히 만났다. 아내를 만날 당시 나는 해군중위였기 때문에 데이트라고 해봐야 빡빡하게 잡힌 약속 사이에 잠시 빈 시간을 이용하는 게 고작이었다. 그런데 후배와의 약속이라는 것이 갑자기 생기거나 예상보다 길어지는 경우가 많아 아내 혼자 다방에서 몇 시간씩 나를 기다리는 경우도 많았다. 그리고 아내는 참 무던히도 잘 참아 주었다.


감옥에 갇힌 죄수들 사이에 ‘고무신을 거꾸로 신는다’는 말이 있다. 남자가 감옥 간 후에 아내나 애인이 이혼하거나 헤어지는 것을 말한다. 그러나 신혜수는 내가 20년 형을 받았을 때에는 서로 애인관계였음에도 불구하고 조금도 흔들림이 없었다.
나는 신혜수를 보면서 전나무를 연상하곤 한다. 비틀림 없이 곧게 뻗은 전나무의 모습처럼 아내는 의지가 강하고 굉장히 원칙적인 여자다. 감옥에서 나온 뒤 어머니께서 내게 이런 말을 하시며 감탄하신 적이 있다.
“혜수, 참 대단하더라. ‘경석이가 20년형을 받았다’고 말하니까, 웃으면서 ‘조금 살다가 나올 거예요. 걱정하지 마세요. 그리고 어디 경석 씨만 잡혀갔고, 20년형을 받았나요’라고 말하더구나”


아내는 이런 모습으로 세 번에 걸친 나의 구속을 의연하게 뒷바라지 해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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