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 별명이 된 ‘대학가 동향’
71년 대통령선거가 끝나고 몇달 지나지 않아 우리 집에서는 해군장교 후보생으로 입대하는 나를 환송하기 위한 모처럼의 자리가 마련되었다. 보통때에는 이런 모임을 절대로 하지 않는데 그동안 서경석이 너무 수고했다고 해서 특별히 모인 자리였다.
조영래, 장기표, 이신범, 김근태, 심재권 등 학생운동 지도자들이 전부 참석했는데, 그 자리에서 우리는 농담처럼 이신범씨는 중앙정보부장이 되는 것이 좋겠고 하는 식의 말을 주고받았다. 그런데 내가 군대에 간 뒤 그 자리에 참석했던 조영래, 이신범, 장기표, 김근태 등이 모두 ‘내란예비음모죄’로 잡혀가고 말았다. 자기들끼리는 무수히 만났지만, 다 같이 만난 자리는 환송연 때 밖에 없었으므로 만난 횟수를 줄이기 위해 모든 것을 환송연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진술하였고 그러다 보니 그 자리가 갑자기 중요한 자리가 되어 버렸다.
나도 그 자리에 있었으므로 평소 같았으면 그들과 함께 감옥에 갔어야 했는데 그들이 군인 신분인 나를 보호해주느라 애써준 덕에 가까스로 화를 모면했다. 하지만 입대한 후 얼마동안은 나도 언제 잡혀갈지 모른다는 초조한 마음을 갖고 지냈다.
당시 대학가에서는 교련교육 반대라는 새로운 이슈를 걸고 5.25 총선을 전후해서 치열한 시위를 벌이고 있었다. 그러자 박정권은 71년 10월 15일 서울지역에 위수령을 내리고 주요대학에 휴교령을 내린 뒤 학생운동 지도부들을 속속 잡아 들였다.
이런 상황이다 보니 해군장교로 입대한 뒤에도 나의 관심은 온통 대학가의 동향에 쏠려 있었다. 특교대에서 훈련을 받는 동안에는 바깥세상의 뉴스를 들을 수 있는 길은 휴식시간에 훈련소대장에게 묻는 길밖에 없었다. 때문에 동료들 가운데 누가 잡혀갔는지가 너무 궁금했던 나는 틈만 나면 소대장에게 ‘대학가의 동향은 어떻습니까?’하고 질문했다. 내가 이 질문을 자주했던지 얼마 후부터 동료들은 아예 나를 “어이, 대학가 동향”하고 불렀다.
교련반대 데모 이후 대부분의 학생운동가들이 제적당하거나 군대에 끌려가게 되어 지도부의 공백상태를 맞았다. 이 때문에 나는 장교가 되고나서도 기독학생운동을 배후지도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 되었다. 나와 함께 기독학생운동을 했던 후배들은 나상기, 황인성, 정명기, 서창석, 이광일, 성해용, 김경남 등이었는데, 나는 진해 해군시설창에 소위로 근무하면서 두 주일에 한 번씩 반드시 서울로 올라가 학생운동을 배후지도 했다. 진해에서 토요일 낮 12시에 기차를 타고 삼량진에 가서 경부선을 타면 밤 11시께 서울역에 도착한다. 그러면 다음날 밤 11시까지 적어도 6~7명의 후배들을 만날 수 있다. 그리고 다시 밤기차를 타고 삼량진에 내려와 역전 식당에서 잠시 눈을 붙인 뒤 진해행 기차를 타고 돌아오면 월요일 아침에 출근할 수 있었다.
한편으로 해군장교 시절 나는 절친한 친구 한 명을 사귀었다. 당시 해군장교 가운데는 나 말고도 운동권 출신으로 이각범(前청와대 정책기획수석, 현 한국정보통신대 교수)이 있었다. 훈련병 시절 각범이나 나나 서로 운동권 출신이 누가 있나하고 찾다가 서로를 발견하고서는 의기투합해서 함께 하숙생활을 같이 했다.
각범이는 그 당시 배를 탔고 나는 시설장교로 육상근무를 했는데, 각범이는 배를 탄 덕분에 수당이 나와서 나보다 월급 액수가 많았다. 우리 두 사람은 월급을 받아서 생활비를 같이 썼는데 나는 두 주일에 한 번씩 서울을 오르내리다 보니 늘 돈이 부족했고 각범이는 사흘에 한 번씩 배에서 보초를 서야하는 탓에 돈쓸 시간이 없어 늘 돈이 남았다. 그래서 각범이가 벌어온 돈을 내가 쓰곤 했는데 각범이는 전혀 개의하지 않았다. 그 덕에 나는 집에 손을 벌리지 않고도 기독학생운동을 지도할 수 있었다. 각범이는 그 후에도 계속 평생 친구가 되어 경실련도 함께 만들고 선진화국민회의 활동도 같이 하고 있다.
1년이 지난 후 나는 해군본부로 올라와 서울 근무를 시작했다. 그때 나는 독신장교 숙소에서 지냈다. 집에서 대방동 해군본부까지 출퇴근하는 것이 너무 멀었기 때문이다. 그 당시 나는 다섯시에 퇴근하면 곧 바로 숙소에 가서 사복으로 갈아입은 뒤 퇴근버스를 타고 시내로 나와 후배들을 만나고 밤늦게 숙소로 돌아와 아침에 출근하는 생활을 계속 했다. 그러나 해군장교의 신분과 기독학생운동의 실질적 리더역할을 동시에 해나가던 이중생활은 내가 민청학련사건에 연루되면서 하루아침에 막을 내리고 말았다.
16. 민청학련 사건과 이등병 강등
1972년 10월17일 박정희정권의 유신조치가 내려진지 1년여 만인 1973년 10월2일, 서울 문리대생 2백50여명이 교내 4.19기념탑 앞에 모여 비상총회를 열고 자유민주체제 확립을 요구하는 선언문을 낭독한 뒤 시위를 벌였다. 박정권의 폭압적인 긴급조치에 눌려 사회전체가 숨소리조차 죽이고 있을 때 학생들이 처음으로 ‘유신체제 비판 불허’라는 금기를 깨고 시위에 나선 것이다. 이 시위는 기독학생 운동 후배인 황인성을 포함해 나병식, 강영원 등이 주동이 되었다.
이를 계기로 같은 해 12월24일 함석헌, 장준하, 천관우, 계훈제, 백기완 등 민주인사들이 서울YMCA에서 개헌청원운동본부를 발족시키고 유신헌법철폐를 위한 개헌청원운동을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해가 바뀌어 1974년이 되어서도 유신헌법 철폐와 민주회복을 요구하는 국민의 소리는 더욱 거세게 확산되었고, 대학가의 시위도 갈수록 거세어져 갔다.
그러자 박 정권은 74년 1월8일 긴급조치 제1,2호를 내렸고 그 때부터 10.26사건으로 박 정권이 무너질 때까지 5년11개월 동안 무시무시한 긴급조치 시대가 열리게 되었다.
그리고 1974년 4월25일, 나에게 첫 구속의 시련을 안겨준 전국민주청년학생총연맹(약칭:민청학련)사건이 터지게 된다.
당시 중앙정보부장 신직수는 민청학련의 배후 주동인물로 前 인혁당수 도예종과 여정남 등 불순세력, 재일조총련 비밀조직원인 곽동의와 곽의 조종을 받은 일본공산당원 등 일본인 2명, 기독학생회총연맹(KSCF) 간부진, 이철·유인태 등 주모급 학생운동자와 유근일 등을 꼽았다. 내가 배후에서 지도해 온 KSCF도 민청학련 주동단체에 포함된 것이다.
기독학생운동이 이처럼 핵심 지도부로 등장하게 된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71년 위수령사건으로 학생운동 지도부가 대거 구속됨에 따라 당시 학내 운동권은 거의 괴멸될 정도로 큰 타격을 받았다.
이 때문에 많은 운동권 학생들이 교회로 운동의 터전을 옮기게 되었는데 그 이유는 교회의 경우 ‘종교탄압’ 시비로 비교적 탄압이 약했기 때문이었다. 이런 이유로 새문안교회와 서울제일교회(담임목사 박형규)가 학생운동의 중요한 거점기지로 부상하게 되었다.
그 당시 학생운동을 이끌었던 두 그룹이 있다면 하나는 서울대 문리대를 중심으로 한 학내운동권이었고, 또 하나는 KSCF로 대표되는 기독학생운동권이었다.
긴급조치 1호 위반자들이 감옥에 가고난 뒤 KSCF 쪽에서 유신반대를 위한 기도회를 열었는데, 나상기, 이광일, 황인성, 서창석, 정명기 등이 이러한 집회를 주동했다. 당시 KSCF 회장은 내동생 서창석이 맡고 있었는데, 형 서경석의 도움을 받기가 용이할 것이라는 점이 크게 작용했다. 물론 KSCF 회장이 되면 얼마 지나지 않아 학교에서 제적되고 구속되는 게 관례여서 회장을 맡겠다는 사람이 없었던 것도 하나의 이유였다.
결국 민청학련이 터진 뒤 KSCF의 지도부들은 전부 다 구속되었다. 황인성이 무기를 선고받았고, 동생 서창석을 비롯해 나상기, 이광일이 20년형을, 정명기가 10년형을 선고받았다.
나는 KSCF후배 지도 이외에 유신반대운동을 펼치던 재야단체와 문리대 학생운동권과 긴밀한 협조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내가 맡은 역할은 주로 국제관계와 재정문제, 그리고 기독운동권과의 연결이었다.
우선 나는 일본에 가 있던 김용복 박사를 통해 한국의 민주화운동을 세계에 알리고, 외국의 정보를 학생운동권에 전달하는 역할을 맡았다. 내가 유신반대운동에 대한 자료를 일본의 김용복 박사에게 보내면 그것이 일본에서 보도되고, 이어 미국의 뉴욕타임즈나 워싱턴포스트에도 보도되곤 했다.
그리고 외국에서 국내 운동권에 들어오는 각종 정보의 창구역할도 맡았다. 예컨대 한일각료회담 반대운동을 할 때 일본관련 정보가 오면 내가 이것을 민청학련 지도부에 전달하고 그것을 참고해서 성명서가 작성되었다. .
특히 서중석(성균관대 역사학과 교수)은 나와 문리대 학생운동권을 연결해주는 고리역할을 했다. 서중석이 문리대 쪽에서 자금이 필요하다고 하면 나는 김관석 NCC총무에게 부탁해서 돈을 구해 가져다주곤 했다. 말하자면 민청학련사건 지도부에 자금을 대준 셈인데, 다행히 이 연락선은 수사과정에서 발각되지 않았다. 서중석이 끝까지 비밀을 지켰기 때문인데,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나는 물론 NCC총무인 김관석 목사까지 구속될 뻔했다.
그 당시 박형규 목사와 지학순 주교 등 종교지도자들이 모두 민청학련 사건에 재정지원을 했다는 이유로 구속되었는데, 유독 김관석 목사만이 무사했던 이유가 이 때문이었다. 가까스로 화를 면한 김관석 목사는 그 뒤 민청학련사건 관련 구속자들의 석방운동을 대대적으로 전개하였다.
또한 내 동생 창석이가 군인 신분인 나를 보호하기 위해 내가 한 일은 전부 자기가 한 것처럼 뒤집어 썼다. 그바람에 창석이는 징역 20년형을 받았고 나는 수사망을 피할 수 있었다. 그런데 얼마 지나지 않아 뜻하지 않은 사건으로 민청학련사건 관련자로 구속되고 말았다.
74년 4월 긴급조치 4호가 발동되고 이철, 유인태, 나병식, 김병곤 등이 민청학련사건 주모자로 줄줄이 잡혀갈 당시 나는 KSCF 후배인 황인성의 도피를 도와주었다.
평소에 잘 아는 린다 존스라는 선교사의 집에 황인성이를 숨겨주었는데, 그 선교사가 중앙정보부 직원의 거짓말에 속아 실수를 하는 바람에 그만 인성이가 잡혀가고 말았다. 물론 내가 도피를 도왔다는 사실도 모두 드러나고 말았다.
황인성이 잡힌 직후 나는 이 사실을 린다 존스 선교사에게서 들었다. 그 당시 나는 제대를 3개월 남겨둔 해군중위의 신분이었던 까닭에 중앙정보부 요원에 의해 곧 잡힐 것이라는 사실을 알고도 도피할 수가 없었다.
중앙정보부에 잡혀가기 이틀 전날 밤 나는 사랑을 한창 키워가고 있던 지금의 아내 신혜수와 마지막 밤을 함께 보냈다. 전쟁터로 떠나는 연인들이 애태우며 함께 보낸 밤이라고 해도 어찌 이보다 더 간절하고 안타까왔을까.
나는 스무네살 고운 아가씨였던 신혜수에게 말했다.
“오늘 밤 헤어지면 언제쯤 다시 만날 수 있을까. 10년 뒤에 만나도 우리 이런 마음으로 다시 만날 수 있을까?”
하지만 신혜수는 참 의연했다.
“많은 사람들이 잡혀갔는걸요, 뭐. 열심히 면회 갈 테니 힘내요”
그리고 다음 날 밤, 자정이 넘은 시각에 중앙정보부 요원들이 우리 집을 둘러싸고는 갑자기 들이닥쳤다. 나는 엉겁결에 벽장 안에 숨었다. 조금 시간이 지났을까, 갑자기 벽장문이 열리며 손전등이 내 얼굴을 비쳤다.
“서 중위 맞지?”
사회변혁을 위한 운동가가 되겠다고 마음은 먹었지만 그래도 서울공대를 졸업하고 장미 빛 미래를 향해 나아갈 가능성이 없지는 않았는데 그 남은 가능성이 한꺼번에 무너져 내린 순간이었다.
나는 다시 중앙정보부 요원에 의해 남산의 붉은 건물로 끌려갔고, 그 뒤 내란선동죄로 20년형이라는 중형을 선고받았다. 나보다 먼저 구속된 동생 서창석도 20년형을 선고받았으니 형제가 합쳐서 40년형을 선고받은 셈이다.
수배자를 숨겨준 사실과 민청학련 주모자들과 몇 차례 만난 적이 있다는 사실만으로 20년형을 선고받았으니 그 당시 내가 한 일들이 다 드러났더라면 더 중형이 선고되었을 것이다.
결국 나는 제대 3개월을 앞두고 이등병으로 강등당하고 기약 없는 감옥생활을 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