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아! 전태일
60년대에 학생운동을 한 사람치고 ‘전태일’이라는 이름을 목이 메어 불러보지 않은 사람은 아마 없었을 것이다. 80년대 운동권의 죄책감의 근원이 광주사태였다면 60년대에는 전태일의 죽음이 그것이었다.
‘노동자 전태일’의 죽음은 내게도 큰 영향을 끼쳤다. 대학교 4학년 가을 어느 날 갑자기 원정연에게서 연락이 왔다. 조영래형이 나를 급하게 찾는다는 것이었다. 원정연은 새문안교회에서 내가 지도를 했던 후배이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서울법대 사회법학회(동숭학회의 후신)에 속해 있었다. 서둘러서 가보니 영래형이 나와 있었다. 영래형은 나를 보자 아무 말 없이 동아일보에 난 전태일의 일기를 요약한 기사를 보여 주었다.
일기를 보자 왈칵 눈물이 쏟아 졌다. 일기의 한 구절 한 구절이 송곳처럼 내 가슴을 찌르는 것 같았다. 나는 만사를 제쳐두고 영래형을 돕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서울법대 교정에서 전태일 추모식을 가지려고 계획 했는데, 정부의 무자비한 탄압으로 이 계획이 무산되고 말았다.
당시 임종률 형의 집을 아지트로 삼아 최고 지도부는 영래형이 맡고 일반 학생운동 쪽은 장기표형이, 기독학생 운동 쪽은 내가 맡아 추모식을 준비했는데 정부의 탄압이 심해 이 일이 제대로 될 수 없었다.
모든 것이 무산된 뒤 낙심한 마음으로 영래형과 택시를 타고 가다가 새문안교회 앞을 지나게 되었는데, 그때 갑자기 내 머리에 새문안교회에서 일을 벌이면 어떨까 하는 생각이 스쳐갔다. 나는 즉시 영래형에게 택시에서 내리자고 하여 다방에 가서 나의 생각을 말했더니 그 형도 내 생각을 적극 찬성해주었다.
당시에는 교회에서 데모를 한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 때문에 나는 은밀하게 데모를 준비했다. 우선 당시 산업은행에 근무하던 박세일을 불러내어 “오늘 밤 모든 준비를 해야 하니 아지트를 마련해달라”고 부탁하고, 새문안교회에 가서 대학생회 회원들을 10여명쯤 데리고 나왔다.
그리고는 세일이가 마련해 둔 서울법대 선배(이 선배는 훗날 경실련을 함께 한 정성철변호사였다)의 집에 가서 밤새워 전단과 플랑카드를 만들었다. 그리고 그 집에서 밤을 꼬박 새우며 농성준비를 한 뒤 세수도 변변히 하지 못한 채 다음날 아침 교회에 갔다.
전날 밤 이미 대학생회 지도목사인 김종렬 목사님께 ‘어떤 일이 벌어질 것이라는 점을 귀띔해 드리고 목사님은 뒤로 빠지시라’고 말씀드렸건만 목사님은 그 자리에 남아 설교를 비장한 어조로 하셔서 우리에게 많은 감동을 주셨다. 대학생예배가 끝난 후 나는 대학생 전체를 모아놓고 선동을 하기 시작했다.
“나는 새문안교회 세례교인입니다. 그런데 나는 전태일 같은 노동자가 분신을 하는 이런 상황을 외면하고서는 도저히 기독교인으로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내가 정말로 새문안교회 세례교인답게 살아가려면 행동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나는 나의 이 행동으로 앞으로 엄청난 불이익을 당하겠지만 그 불이익이 두렵지 않습니다. 그리고 여러분들도 나와 함께 농성의 대열에 참여하시기를 간절하게 호소합니다”
혼신의 힘을 다해 격정적인 목소리로 말하고 나서 대학생들의 반응을 지켜보았다. 반대가 심하면 모든 일이 허사가 될 수밖에 없다. 그런데 그때 뜻하지 않은 사건이 일어났다.
그 당시 새문안교회 대학생회에 서울상대 학생으로 박현이라는 친구가 있었는데 그 친구는 말하자면 대학생회 안에서 나의 지도노선에 대해 가장 반기를 들었던 친구였다. 그런데 그 친구가 갑자기 앞으로 뚜벅뚜벅 걸어나와 마이크를 쥐었다. 나는 크게 당황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그 친구가 의외의 말을 하기 시작했다.
“나는 여태까지 새문안교회 대학생회에서 가장 말썽꾸러기였다. 가장 말썽꾸러기인 내가 이 농성에 참여하기로 결심했다. 그러니까 나보다 훌륭한 다른 모든 분들은 기꺼이 이 집회에 참여해주실 것으로 믿는다”
박현군의 발언으로 인해 사실상 모든 선동이 완전히 끝나버렸다. 그곳에 있던 1백20명의 예배 참석자 중에서 대학생회 활동을 하지 않던 40여명만 돌아가고 나머지 80명이 농성에 참여했다. 우리는 새문안교회 교육관 4층으로 올라가 4층 예배실을 점거하고 4층으로 올라오는 모든 층계를 책상으로 봉쇄했다. 그리고 교회 건물 바깥에 ‘참여와 호소의 금식기도회’란 제목의 플랑카드를 내걸고 단식농성에 들어갔다. 광화문 거리를 향해 스피커를 들이대고는 전태일 분신사건의 진상을 알리고 시민들의 각성을 호소하는 방송을 시작했다.
당연히 교회가 발칵 뒤집어 졌다. 강신명목사님을 위시한 당회원들이 전부 우리를 만류했지만 우리는 교회의 말을 듣지 않고 집회를 강행했다. 그러나 마지막에는 당회의 간곡한 권유를 받아들여 교회 본당 1층 기도실로 농성장소를 옮겼다. 다음날 아침에 눈을 떠보니 담임목사이신 강신명 목사님이 단에 엎드려 무릎을 꿇고 간곡하게 기도를 하고 계셨다. 목사님의 그런 모습에 감동이 되어 도저히 목사님의 호소를 외면할 수 없었다. 결국 다음 날 낮에 우리는 폐회예배를 보고 농성을 풀었고 나는 종로서에 연행되어 조사를 받고 풀려 나왔다. 그리고 교회의 노력으로 아무도 피해를 입지 않았다. 그 후 이 사건은 사회에 널리 알려졌고 지금도 기독학생운동의 효시로 기록되고 있다.
그리고 나도 이 사건으로 기독학생운동 지도자로 사람들에게 알려지게 되었다. 실제로 그 뒤부터 나는 새문안교회 학생들과 함께 KSCF 활동에 더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되고, 새문안교회 대학생회 뿐만 아니라 다른 교회 기독학생들까지 포괄하는 전체 기독학생운동을 지도하는 일에 본격적으로 나서게 되었다.
이 사건은 내 개인에게도 중요한 의미가 있다. 나는 이때 처음 대중 앞에서 선동하는 경험을 가졌는데 이것은 지난날 내가 일기장에 썼던 결심을 실천에 옮긴 것이기도 했다. 통혁당 사건으로 수사를 받고 나온 뒤 비굴했던 나의 모습에 수치심을 느끼면서 ‘언젠가는 반드시 나를 희생하는 과감한 모습을 보여 마음의 빚을 갚겠다’고 썼었는데 전태일 추모기도회를 통해 나는 지난날의 마음의 빚을 청산할 수 있었다.
14. 71년 대통령선거와 십자가 데모
71년 초 우리사회는 3선개헌을 강행한 박정희대통령과 야당의 김대중 후보가 맞붙은 대통령선거의 열기로 한껏 들떠 있었다. 당연히 학생운동 진영도 선거에 적극 관여했다.
나는 71년 2월 졸업을 앞두고 있었으나, 엔지니어의 삶을 일찌감치 포기한 탓에 졸업은 하는 둥 마는 둥 여기고 선거참관운동에 적극 참여했다.
당시 사회운동의 최고 지도부 역할은 조영래 선배가 맡았고, 학생운동을 총괄하는 일은 장기표 선배가 맡았으며, 기독학생 운동의 책임은 내가 맡았었다. 그리고 그 외에 일선에서의 현장지휘는 김근태, 이신범, 신재권 같은 이들이 맡았다.
당시 선거참여를 위해 어른들을 중심으로 민주수호국민협의회가 만들어졌고 그 아래 청년학생조직으로 민주수호전국청년학생총연맹과 민주수호기독청년협의회가 만들어졌는데, 민주수호기독청년협의회의 지도는 내가 하고 있었다. 그리고 민주수호기독청년협의회는 기독학생회총연맹, 교회청년연합회, 전국신학생연합회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때 이 운동에 함께 참여했던 사람으로는 기장 한신대 쪽에서 추요한목사, 황주석 총무, 예장 통합측에서는 인명진목사, 홍길복목사, 임신영목사, 조성기목사, 감리교에서는 김동완목사, 김홍기목사, 정명기목사 등이 활동하고 있었다. 그리고 교회청년연합회에서는 이광일목사, 기독학생회총연맹에서는 나상기씨, 성해용목사 등이 지도적인 역할을 하였다.
그 당시 선거참관운동은 선거참관인단을 만들어서 선거 당일 개표 부정을 막는 일을 하는 것이었다. 그러다 보니 각 단체에 가해지는 정부의 탄압이 극에 달했고, 결국 상대적으로 탄압을 적게 받은 기독청년협의회를 제외하고는 모든 단체가 탄압으로 조직이 마비되다시피 되었다.
이 때문에 선거참관인단을 조직하고 파견하는 일은 내가 책임을 맡고 있는 민주수호기독청년협의회에서 주도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우리 측에서 대략 4천3백명 정도의 참관인단을 전국으로 파송했다. 그 당시 외부에는 비밀에 부쳤지만, 새문안교회 대학생회 사무실이 바로 기독청년협의회의 사무실이었다. 따라서 목사님과 장로님들도 모르는 가운데 새문안교회 대학생회 사무실을 통해 수천 명의 선거참관인단이 전국 각지로 내려가고 있었던 것이다.
이런 노력에도 불구하고 선거는 박정희후보가 1백만 표차로 승리하는 것으로 끝을 맺었다. 우리는 개표과정에서의 부정을 막기 위해 대규모의 야당참관인단을 보냈지만 실제로 부정은 선거인 명부 조작에서 저질러졌다.
이 때문에 선거가 끝난 뒤에도 선거부정을 고발하는 집회가 계속 열렸다. 민주수호기독청년협의회도 선거부정을 고발하는 집회를 갖고 십자가 데모를 강행했다.
데모가 있기 전 날 밤 10여명이 둘러앉아 데모를 모의했다. 각자가 맡아야할 역할을 다 분담하고 나자 두려움이 엄습해왔다. 당시 2m가 넘는 십자가를 만드는 일은 서울법대생이었던 박동현(현 장신대 교수)이 맡고, 현장 진두지휘는 성해용(기장목사)과 김동완전도사(前 NCC총무)가 맡았고 나는 전체를 총괄하는 임무를 맡았다.
모두가 자기가 해야 할 일을 되새기며 비장한 각오를 다졌지만, 마음 깊숙한 곳에서부터 두려움이 솟는 것은 어쩔 수 없다. 그때 누군가가 ‘우리 모두 기도하자’고 제안을 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자리에서 불을 끄고 한 사람씩 돌아가면서 기도를 했다. 그때 나는 ‘내일의 시위를 성공적으로 치를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힘을 주십시오’라고 기도했다.
그날의 기도경험은 오랫동안 내 가슴에 남았던 종교적 체험이었다. 말하자면 그날 나는 처음으로 종교와 사회운동이 하나로 만나는 경험을 했다. ‘두려움 없이 운동을 할 수 있도록 하느님으로부터 용기와 확신을 얻는 것이 진정한 기독교’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나는 그날의 기도 덕분에 두려움 없이 십자가 데모에 임할 수 있었다.
그리고 데모는 성공적으로 이루어졌고 나는 현장에서 김경재선배(당시 KSCF 간사, 민주당 전의원)와 함께 체포되었고 도로교통법 위반죄로 즉결재판에 회부되었으나 도로에 나간 적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김경재 선배와 함께 무죄석방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