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9월, 중국 광동 심수(深圳)시 조선족기업인 허영섭씨는 한국인 김씨를 횡령죄로 고소했다. 인증,물증이 명백한 사실 앞에서도 지난해 7월 4일 피고의 무죄판결이 내려지고 말았다.서울북부지법의 1심판결에 불복한 허씨는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정의의 심판을 받아내고야 말리라'고 다짐하고 사연을 본지에 고발(지난해 8월 10일 '법률의 잣대는 둔갑했는가'란 제목의 기사 게재) 하여 한겨레 사회에서 여론을 조성한 동시 새로운 도전에 나섰다.
반년여 동안의 고전 끝에 금년 1월 26일, 공정성을 되찾은 한국의 법은 2심 판결에서 마침내 피고 김씨를 징역 8월,집행유예 2년에 선고했다.
배신자의 행적 회고
2002년 말의 어느날, 허영섭 씨와 오랫동안 친형제처럼 지내던 한국인 파트너 기씨가 자기 외사촌 동생 김씨를 허사장의 사무실로 데려와 '동생처럼 여기고 잘 도와 주라' 부탁하자 친구간 의리를 무엇보다 소중히 여기는 허씨는 흔쾌히 대답했다. 그 후 김씨 내외는 의류수입건으로 매달 한 두번씩 심천을 드나들었다. 현지 사정은 물론 중국어 한 마디도 모르는 상황이라 허씨는 매번 그들이 오는 날부터 수하 직원들을 시켜 일을 거들어 주게 하였다.
김씨가 제시한 견본 수십장을 광동 불산시 의류공장에 맡기고 거기서 주는 단가에 한푼도 얹지 않고 그대로 김씨에게 넘겨 주다보니 이 과정에 발생하는 비용 그리고 거기에 수십차례 같이 다니던 직원들의 임금도 전부 허씨가 부담하였다.
김씨가 물건대금을 제때에 지불하지 못하면 허씨는 자기 돈으로 먼저 공장, 또는 다른 가게에 지급하기도 하였다.
일찍 한국인 김모 사장이 심수 일에대서 사업을 벌이다 처지가 어렵게 되자 허씨는 그에게 돈을 빌려 주었다. 그는 이를 갚지 못하고 한국에서 팔다 남은 목도리를 빚 대신에 허씨 앞으로 넘겼다. 허씨는 한국의 친구들을 통해 2004년 10월경 이 목도리를 처분하여 한화3500만원이란 돈을 마련하게 되었다. 중국의 외화거래 법상 만불 이상의 금액이 개인구좌로 입금되기란 절차가 까다롭고 여간 번거로운 일이 아니었다. 바로 이 무렵 김씨가 “형님, 며칠 후 제가 심수 가는 길에 그 돈을 가져다 드리지요.” 라고 전화를 걸어오자 허씨는 감사한 마음으로 그에게 부탁하였다.
몇해간 친동생처럼 도와줬던 김씨였으니 그로선 의심할 리가 없었다.
그런데 돈을 넘겨받은 김씨는 갖은 핑게를 대며 차일피일 미루면서 심수에 나타나지 않았다.근 일년간 기다리던 허씨가 한국에 들어가 김씨를 만나자 그는 처음 '형님, 돈이 급해 먼저 써 버렸으니 후에 벌어서 갚겠다'는 식으로 말했다. 그 자리에는 그의 사촌형인 기씨 외 다른 한국 친구도 두명 있었다.
그런데 이날 저녁 허씨의 호텔로 따라온 김씨는 종전의 태도를 일변했다. 돈은 한푼도 없으니 될대로 돼라는 식으로 얼토당토 않은 얘기를 꺼내다 아무런 기약없이 나가버렸다.
이튿날 만난 김씨의 친형은 '동생 일은 나와 상관 없으나 내가 법대 출신인 만큼 후배검사들이 많으니 송사는 겁나지 않다'며 허씨에게 으름장을 놓았다.
극도의 배신감에 가슴이 끓어오른 허씨는 2005년 9월 5일 김씨를 횡령죄로 서울 도봉경찰서에 고소하였다. 그러자 김씨는 피고인으로 경찰서에 와서 '이 목도리는 내 것이다. 목도리 값은 2003년에 이미 허씨에게 다 보냈다.'며 오리발을 내밀었다. 의류거래대금으로 전에 받은 돈이 목도리 값으로 둔갑할 줄이야!
허씨는 2003년 송금으로 받은 돈이 의류 대금임을 증명하는 서류와 목도리가 자기의 것이라는 당시 원본서류를 98장이나 찾아내어 경찰서에 올렸다. 기씨를 포함한 사건 숙지자 5명도 모두 김씨의 배신행위에 대해 증언하였다. 도봉경찰서는 김씨의 횡령죄가 성립된다고 판단하여 서류를 서울북부지방검찰청에 상정, 북부지검은 이 서류를 공판검사인 진혜원 검사(32) 한테 맡겨 북부지방법원에 공소를 제기하였다.
그런데 진 검사가 법정 증거인으로 기씨를 부르자 이번에는 기씨의 태도가 일변하여 김씨의 악행을 감추고 거꾸로 허영섭의 잘못이란 위증을 했다. 예상치 못했던 ‘복병’에 일격을 당한 셈이었다.
서울북부지방법원은 진상확인 절차 없이 위증자의 진술을 믿고 무작정 피고인의 손을 들어주어 김씨의 '무죄'를 선고했던 것이다.
진혜원 녀검사와 량심있는 증인들
법정판결이 어처구니 없이 전도되자 서울 북부지검 형사2부 진혜원 검사는 항소를 제출하였고 다시 면밀한 조사에 들어가 더욱 많은 증거물을 수집하였다.
진 검사는 얼마 후 수사 부서로 발령이 났지만 허씨의 진술이 사실임을 확신하고 진실을 밝히기 위해 항소심 재판까지 공판 검사역을 맡겠다고 고집했고, 북부지검은 진 검사의 열정을 이례적으로 수용했다.항소심이 진행되는 동안 진 검사는 낮에는 부서사건을 수사하고 밤에는 사무실에 남아 재판을 준비하기에 여념이 없었다.
진 검사는 엄청난 량의 통관서류를 뒤져 추가 증거를 찾는 한편 중국령사관과 외교통상부를 오가며 허씨의 진실을 밝혀줄 중국증인의 입국비자수속을 밟아주고, 50여쪽에 달하는 장문의 항소리유서를 2심 재판부에 제출하였다.
진혜원 검사의 확고한 신념과 강한 의지는 많은 사람을 감동시켰다. 법정공방에서 피고인은 삿대질을 하고 인격모욕에 가까운 언사를 써가며 악랄하게 굴었지만 진 검사는 흔들림이 없었다.
중국에 주재하며 무역을 하고 있는 한국인 Z사장은 현지 어느 공장에 물건을 맡겨 완성된 물건을 검품해야 하는 시간인데 진 검사로부터 증인으로 참석해 줄 수 있느냐는 문의가 들어 왔다. Z사장은 검품작업을 뒤로 미루고 자기 돈으로 왕복 비행기표를 사서 급히 한국으로 들어가서 증인석에 올랐다.
피고 김씨의 어머니가 한국인 G모의 사무실로 찾아 와 ' 높은 사람을 내가 많이 알고 있는데 누가 증인으로 나서면 가만 놔 두지 않을 것이다 '라고 협박을 하였다.하지만 G모는 사실 내막을 알고 있는데 어찌 량심을 저버릴 수 있겠는가 하며 법정증인을 서주었다.
병약한 몸으로 비리에 도전해 나선 진혜원 녀검사, 량심을 지켜준 여러 증인 그리고 철같은 사실 앞에서 항소심 재판부인 서울북부지법 형사11부는 금년 1월 26일 검찰측 주장을 받아들여 김씨에게 징역 8월,집행유예 2년을 선고했다.
하지만 '정의의 화신'인 진 검사는 그토록 바랐던 승소 판결을 법정에서 들을 수 없었다. 공판을 불과 3일 앞두고 뇌종양 수술을 받았기 때문이다. 7시간에 걸친 대수술을 거뜬히 이겨낸 진 검사에게 손꼽아 기다렸던 승소 소식이 마침내 전해졌다.
엄청난 대가와 인격의 설욕
2005년 9월 5일 도봉경찰서에 첫 고소장을 올려서부터 제2심 판결이 선고된 2007년 1월 26일까지 1년4개월이란 시간이 걸렸다.그간 허영섭 씨는 이 사건으로 한국을 선후 9번 드나들었으며 이로하여 회사에 끼친 손실은 금액으로 따질 수가 없다.
공장 로동자까지 합쳐 약 200명 직원을 거느리는 허씨가 매일 손님 만나는 일도 몇시부터 몇시까지 누구라는 스케줄을 짜놓는 형편에 예고없이 한국법정에 출두하기도 일쑤였다.손님과 상담날자를 약속해 놓고 시간을 지키지 못해 이미 다 만들어 놓았던 주문이 깨지는 일도 두번이나 있었으며 심지어 이미 결정 되었던 주문 12만불짜리가 취소된 경우도 있었다.
'한국의 법에 의하면 저의 경우, 제1심에서 피고의 무죄가 선포되면서 원고가 제출한 배상명령신청서가 기각이 되어 버립니다.제 2심에서 제가 다시 배상명령신청서를 제출하였으나 한국 법상 이미 기각이 된 상황에서 이는 무효라고 합니다.그러니 다시 민사로 배상청구소송을 해야 합니다.그런데 피고 김씨한테 정말 돈이 없다면 한푼도 받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하지만 배상을 받는 것은 둘째의 문제입니다. 기울어진 법률의 천평을 바로 잡은 것만으로도 저는 만족합니다.'
그동안 엄청난 대가를 치렀으나 진실을 되찾고 인격적으로 받은 치욕을 씻어 버렸다는 허영섭은 자신이 경주한 노력이 결코 헛되지 않았음에 차분한 자세를 보였다.
지난해 1심에서 엉터리 판결이 나오고 '흑룡강신문'에서 이를 비중있게 다루자 사이트를 통해 기사를 읽은 적지 않은 중국동포와 한국인들의 관심을 끌었으며 잣대를 잃은 한국의 법에 불평을 토로했다. 특히 한국의 한 목사는 허씨를 통해 신문을 받아 보고 이런 기사를 많이 실어 우리 법조계의 병폐를 꼬집고 정의를 살려야 한다고 주장하였으며 대법원 원장 앞으로 보낸 탄원서에 이 신문을 동봉하여 2심의 공정한 판결에 일조했다고 덧붙였다.
/김명환 기자 j_mh8@hot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