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비록 서울공대에 대해 불만이 많았지만 서울공대생이었기에 가질 수 있었던 소중한 경험 하나를 갖고 있다. 서울공대 학생회 선거를 정화시켰던 경험이 그것이다.
공대에 처음 입학했을 때 나는 학생회장 선거가 너무나 부정선거로 얼룩져 있는 것을 보고 크게 실망을 했었다. 학생회장에 출마하려면 집을 팔아야 한다는 얘기가 나올 정도로 선거가 돈으로 얼룩져 있었다. 그리고 학연과 지연에 의한 후보 간 대결도 심각했다. 대개의 경우 경기고출신과 호남지역 학생들이 손을 잡고, 서울고, 경복고 출신과 영남지역 학생들이 손을 잡고 서로 대결을 하였다. 그 과정에서 상대방 그룹에 간부 자리를 주는 대신 표를 얻고, 금품향응을 제공해 표를 사는 행위가 공공연하게 이루어졌다. 그것을 보면서 나는 내가 대학을 졸업하기 전에 반드시 부정선거의 관행을 뿌리 뽑겠다는 결심을 했다.
그리고 드디어 이러한 일을 할 수 있는 3학년이 되었다. 나는 선거가 본격적으로 시작될 즈음 기숙사에 가서 각 고등학교 동창회 회장을 불러 모은 뒤 ‘고질적인 선거부정을 근절하기 위해 선거 정화위원회를 구성하자’고 간절히 호소했다. 그랬더니 의외로 많은 학생들이 나의 호소를 받아 들여, ‘서울공대 선거정화위원회’가 구성되게 되었다. 선거정화위원회를 구성한 뒤 우리는 매표행위와 표와 간부자리를 교환하는 행위를 일체 하지 않기로 결의했다. 그런 다음 양쪽 후보자들에게 선거정화위원회에 3천 원씩 공탁금을 걸도록 요구했다.
그러나 두 후보자들은 선거정화위원회의 이런 방침에 콧방귀를 뀌면서 공탁금을 걸 기색을 보이지 않았다. 그러자 처음에는 선거정화위원회 활동을 신선하게 바라보던 학교의 분위기가 바뀌고 ‘자기네들이 무슨 힘이 있다고 선거정화네 뭐네 하면서 설치느냐’는 식의 비아냥 분위기가 학내에 퍼졌다. 결국 나 혼자 잘난 체한 셈이 되었다.
나는 한참동안 이 문제를 가지고 고민했다. 그리고는 비장한 심경으로 서울공대 기독학생회를 찾아갔다. 그리고 평소에 안면이 있는 기독학생회 간부들에게 본관 게시판과 기숙사 게시판에 방을 좀 붙여 달라고 요청을 했다. 방의 내용은 ‘서울공대 기독학생회 회원 40명은 선거정화 대책위원회의 결정사항을 전폭적으로 지지하며, 어느 후보든지 위원회의 결정사항을 위반할 경우 반대 편에 몰표를 던지겠다’는 것이었다. 당시 40명이 한쪽에 몰표를 던지는 것은 후보의 당락을 결정짓는 엄청난 파워였다. 당시의 선거상황은 경기고 출신과 경복고 출신의 대결이었는데 경복고 출신 후보는 돈을 쌓아 놓고 선거운동을 했고, 경기고 출신은 돈이 없었다. 사실 나는 서울고 출신이었기 때문에 구태여 편을 가르자면 경복고의 편을 들어야 했지만, 실제로는 ‘돈을 쓸 만반의 태세를 갖추고 있던 경북고 후보’보다 경기고 후보를 더 지지하고 있었다.
기독학생회가 그런 방을 붙이고 나자 선거분위기가 확 달라졌다. 그리고 양쪽 후보자들이 다음 날 즉각 공탁금을 냈다. 게다가 서로 상대방의 부정선거를 적발하느라 눈을 부라린 탓에 돈을 쓴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었다. 결국 경북고 후보는 돈을 쌓아 두고도 돈을 쓸 수 없었고, 돈이 없었던 경기고 후보가 압승을 하고 말았다.
이 선거 이후 서울공대에는 공명선거의 분위기가 완전히 뿌리내리게 되었다. 그리고 그 이듬해 선거에서도 선거정화위원회가 만들어졌지만 이미 어느 후보도 부정선거, 금권선거를 꿈꿀 수 없도록 정화 분위기가 정착되어 이 위원회는 특별히 할 일이 없었다.
내가 이 경험을 지금도 쉽게 잊지 못하는 것은 이 경험이 내 인생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학문적 관심, 지적인 호기심으로 사회주의에 대해 공부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회운동에 자신의 몸을 던지는 것은 아니다. 사회운동에 자신을 헌신하는 결단을 하려면 아무리 작은 경험이라고 하더라도 불의와 부정, 잘못된 것과 싸워서 승리하는 ‘승리의 경험’이 있어야 한다. 나는 서울공대 선거정화위원회의 경험을 통해 이런 승리의 경험을 맛보았다. 이 승리의 경험은 내 자신에 대한 자신감을 키워주었고 이 자신감 때문에 훗날 오로지 신념과 정의감만을 가지고 과감하게 사회운동에 뛰어드는 결단을 할 수 있었다.
그래서 나는 지금도 젊은이들에게 이런 이야기를 한다. ‘사회과학 공부도 중요하고 역사에 대한 인식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은 구체적인 실천을 통해 잘못된 것을 고쳐보는 승리의 경험이다. 이것이 인간의 삶을 바꾸어 주는 중요한 체험이다.’
4학년이 된 후 나는 학생운동의 불모지대인 서울공대에 <산업사회연구회>라는 최초의 운동권 써클을 만들었다.
그 당시 나는 학내 데모가 있을 때면 현장에 나가 앞에서 선동하는 학생들을 유심히 봐두곤 했다. 그리고는 데모가 끝난 뒤 눈여겨 봐둔 후배를 찾아가 대화를 나누며 그가 얼마나 진실한 마음으로 데모에 참여했는지, 민중에 대한 사랑이 얼마나 있는지를 관찰하면서 사람들을 모으기 시작했다.
당시 <산업사회연구회>에 참여했던 멤버 중에는 신철영(전 경실련 사무총장), 유재현(전 경실련 사무총장), 윤조덕(산업안전학 박사), 조중래(명지대 교수) 이종원(일본 릿교대 교수) 등이 있었다. 서울공대 학생운동의 효시가 된 멤버들이다.
이러한 활동 덕분에 나는 민주화 이후 서울공대 민주동문회의 초대회장이 되기도 했다. 서울공대 학생운동의 원조임을 공인받은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