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나도 기독교운동을 할 수 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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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나도 기독교운동을 할 수 있구나!
  • 동북아신문 기자
  • 승인 2007.03.27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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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실화> 나의 스토리

 엔지니어의 길을 포기하고 사회혁명가로 살겠다는 결심을 하고 난 뒤 나는 먼저 새문안교회 대학생회를 의식화시키는 작업을 시작했다. 휴학 기간 중에 홍성현목사의 부탁으로 대학생회 회장을 맡게 되었던 까닭에 자연스럽게 1학년 후배들에게 사회과학 공부 지도를 할 수 있었다.

그 당시 내가 지도하던 학생들 가운데 원정연(당시 서울법대 1학년, 현재 노동계에 종사), 윤조덕(당시 서울공대 기계과 1학년, 현재 산업안전 연구원 박사), 정인승(서울대 경제학과 1년, 사망) 등이 뛰어난 후배들이었고, 이들 이외에도 4~5명의 학생들이 내게 사회과학 학습을 받았다.

나는 후배들에게 전통적인 기독교에 대한 비판의식을 심어주고 사회과학적 인식을 넣어주려고 애를 썼다. 이런 상황이다 보니 내가 6개월 정도 회장을 맡고 나서 대학생회 회원(대략 26명 정도)들을 대상으로 여론조사를 했더니 그 가운데 신앙을 고백하는 수가 고작 3명밖에 되지 않았다.

 

그 나머지는 모두 ‘하느님이 존재한다는 것을 못 믿겠다’고 대답하는 것이었다. 대학생회가 완전히 무신론에 의해 장악당한 셈이다. 회원의 수도 50여명으로 늘어났다. 학생운동의 불모지였던 교회 안에서 운동권의 싹을 키우기 시작한 셈이었다. 

그 뒤 나는 대학생회 활동을 통해 의식화시킨 후배 원정연, 정인승과 함께 창신동 판자촌으로 들어가 살기 시작했다. 그 당시엔 소위 ‘민중 속으로’라는 구호가 나오기 시작할 때였는데, 나도 민중들의 삶을 직접 체험하고, 싶었다.

 

당시 나는 순교자적인 비장한 심정으로 살던 때라 창신동에 들어간다는 것도 내게는 하나의 결단이었다. 나는 널찍한 문화촌 집에서 나와 창신동 판자촌의 삭월세 단칸방으로 짐을 옮겼다. 겨울방학 기간이어서 문풍지로 겨우 바람만 막은 허술한 단칸방은 몹시도 추웠다.

 

밤에 방에 누워 잠을 청하려면 매서운 겨울바람에 얻어맞은 문풍지가 여우 울음소리를 내며 울었다. 아침에는 공동수도에 가서 길게 줄을 서서 식수를 길어 와야 했다. 평생 처음 물지게를 지고 뒤뚱 뒤뚱 달동네 길을 오르내리면서 나는 비로소 내가 민중이 된 것 같아 마음이 뿌듯해졌다.     당시 가난 때문에 고달픈 삶을 살 수밖에 없었던 사람들의 눈에는 소풍 온 국민학생처럼 고생을 즐기는 내 모습이 틀림없이 사치스럽게 보여졌을 것이다. 그렇지만 나 자신에게는 이 과정이 대단히 필요한 과정이었다.


창신동에서의 밑바닥 서민들의 삶의 체험은 나로 하여금 내 주변의 유복한 환경에 대한 분노를 더욱 깊게 만들었고, 학생운동가로서 살아가겠다는 결심을 더욱 굳게 해 주었다. 

 

일요일마다 새문안교회의 빨간 양탄자와 사치스러운 꽃꽂이를 보면서, 그런 분위기 속에서 아무 문제의식 없이 해피하게 살아가는 기독교인들을 보면서 나는 만일 예수님이 다시 오신다면 새문안교회가 아니라 창신동 판자촌 산꼭대기로 올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 당시 내게 큰 고민이 있었다면 그것은 기독교를 부정하지 않으면서 사회운동을 하는 방법을 찾는 것이었다. 한 때 무신론자를 자처하며 교회조차 나가지 않은 적도 있었지만 이제까지의 나의 삶이 워낙 깊게 기독교 안에 있었기 때문에 나는 결코 완전한 무신론자가 될 수는 없었다. 입으로는 무신론자라고 말하면서도 항상 나도 모르게 하느님을 찾았다. 당시 나는 박성준 선배와 기독교와 사회주의에 대한 토론을 많이 했었다. 당시 박성준 선배는 사회주의 이론 가운데 변증법만 받아들이고 유물론은 인정하지 않는다는 입장을 취하면서 기독교인이면서 동시에 사회주의자가 되는 것이 가능하다는 입장을 취했다. 하지만 나는 내가 어떻게 기독교인이면서 동시에 사회주의자가 될 수 있는지의 문제를 가지고 계속 고민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새문안교회 대학생회 헌신예배에 초청 설교자로 온 오재식 선생(前 참여연대 공동대표)을 만나면서 진보적인 기독교와 처음 만나게 되었다. 

 

그날 오재식 선생은 설교를 통해 성서의 창조이야기가 천지창조에 대한 과학적인 설명이 아니라 이스라엘 민족이 바벨론에 포로로 가게 되었을 때 하나님이 창조주라는 신앙고백을 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이러한 설명은 전통적인 성서해석과는 전혀 다른 것이었지만 내게는 너무도 설득력이 있었다. 그리고 이러한 시각을 가진 기독교인으로 살 수 있다면 나는 훨씬 편한 마음으로 기독교인이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오선생의 설교를 듣는 순간 ‘아, 내가 지금까지 찾았던 분이 바로 저 분이구나’하는 생각과 함께 온 몸에 전율을 느꼈다. 그리고 설교가 끝난 뒤 나는 오재식 선생을 찾아가 ‘나를 지도해 달라’고 간청했다. 오재식 선생은 내게 한국기독학생회총연맹(KSCF: Korea Student Christian Federation)에서 활동할 것을 권했고, 이 권유가 계기가 되어 기독학생운동에 참여하게 되었다. 

 

KSCF는 KSCM(Korean Student Christian Movement)과 YMCA가 합쳐서 만들어진 단체로 그 뒤 진보적 기독학생운동의 모체가 되었고 민청학련 사건이 터졌을 때에는 나를 포함해 26명의 KSCF 회원들이 감옥에 갔었다.

 

내가 KSCF 운동에 참여한 첫해 겨울에 있었던 KSCF겨울대회에 가서 나는 그 뒤 우리나라 진보적 기독교운동을 이끌었던 사람들과 만나게 되었다. 당시 프린스턴신학교 박사과정을 밟고 있었던 김용복박사(前 전주한일신학교 총장)를 만났고, 또 나와 같은 학생이었던 박종렬(기장 목사), 이시재(환경운동연합 간부, 성신여대 사회학과교수), 이종오(명지대 교수) 등을 만났다.

 

이 중에서도 김용복 박사(당시 나이 32세)는 내게 진보적 기독교 신학을 처음 소개해준 분이었다. 그리고 그의 가르침은 기독교 신앙과 사회주의운동 사이에서 갈등하고 있던 내게는 너무도 좋은 길잡이가 되었다. 

 

‘아! 나도 사회참여를 하면서도 하느님을 부정하지 않을 수 있겠구나. 내가 그토록 찾았던 진리가 바로 진보적인 기독교 운동이었구나...’

그리고 이러한 신앙적 입장은 오랜 시간이 흐른 뒤 내가 다시 복음주의 신앙으로 되돌아올 때까지 나를 지탱해 준 큰 정신적인 기둥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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