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연길에서 사는 동안 나는 길거리시장을 자주 찾았다. 특히, 내가 사는 연변대학 교원숙사 앞의 큰거리에는 저녁때마다 장이 서는데, 길이가 300~400미터나 된다. 넓은 인도에 통로만 좁다랗게 남겨놓고는 난전들이 양쪽으로 늘어선다.
이 난전은, 간혹 작은 화물차를 받치고는 뒤짝이나 옆짝을 내리고 짐칸 바닥에 늘어놓은 것도 있지만, 손수레나 깔개를 길바닥에 펴고 물건들을 진설한 것이 대부분이다. 과일이나 채소 같은 것은 상자째 놓고도 판다.
이 길거리시장에는 없는 것이 없는 지경이다. 감자며 당근․오이에, 마늘과 풋고추, 열무와 배추에, 가지며 양파․대파․골파 등 밭에서 나는 온갖 채소가 다 있다. 다시마․미역․멸치 같은 것이 있는가 하면, 냉동 물고기에 건어물들도 있다. 쇠고기․돼지고기․닭고기에 양고기도 있고, 커다란 프라스틱 그릇에는 미꾸라지가 요동치고, 팔뚝만한 잉어와 가물치들이 통 안에서 꿈틀거리기도 한다. 김이 무럭무럭 나는 찐빵과 만두들이 시각을 자극하고, 지글지글 구워내고 지져대는 삼겹살에 각종 꼬치구이들이 코를 들썩이게 한다. 자작자작 부쳐내는 전들은 보기만 해도 식욕이 돋는다.
과일도 여러 가지가 있다. 사과와 배, 감귤과 오렌지에 방울 도마도도 있고, 남방에서 온 바나나와 야자에 이름 모를 열매들도 갖가지 쌓여 있다. 이 중에 가장 눈에 띄는 것은 파인애플이다. 겉을 다 깎고서는 가시마디를 따라 나사못 골처럼 돌려가며 파낸 모양은 신기할 정도로 멋지고 보기가 좋다.
좀 더 떨어져서 덜 복잡하다 싶은 곳에는 각종 액세서리와 옷들이 널려 있다. 티셔츠․바지․치마에, 메리야스와 양말과 스카프가 있고, 운동화와 혁띠․모자에, 지갑이며 단추며 바늘․실까지 없는 것이 없는 지경이다.
이보다 더 떨어진 곳에는 싸구려 녹음기와 라디오, 휴대 전화기와 여러 장난감들이 놓여 있다. 한 쪽에는 헌책들도 널려 있고, 필통과 연필깎개, 확대경과 집게, 필기구 같은 학용품들도 있다. 이런 갖가지 모습들은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재미가 있다.
그런데, 길거리 시장의 난전에서는 값이 일정하지가 않다. 물건이 다르고 근량(斤量)이 차이가 있으니 살 적마다 값이 다르다. 웃으면서 한번쯤 값을 내려 부르면 조금 덜해 주거나 한두 개를 더 얹어주기도 하고, 안 된다고 잡아떼면 달라는 대로 다 주기도 한다. 한국인인 줄 알아보고 값을 되게 부르다가 옷섶에 달린 연변대학 뺏지를 보고는 계면쩍어하면서 내려주기도 한다. 차림새가 초라한 할머니 보따리 장수는 잔돈을 가지라 하면 고마워하면서도 미안한 표정을 짓는다. 흥정하고 덤을 받고 잔돈을 사양하는 삶이 마음을 푸근하게 한다.
그래서 이 길거리 시장은 내 단골 장터가 되었다. 대담 방송한 테이프를 들으려고 채널이 고정된 라디오도 여기서 샀고, 담뱃갑만한 충전용 휴대전지도 이곳에서 구했다. 지금도 가끔 신는 중국식 구두 한 켤레도 그곳에서 산 것이다.
그 중에서 가장 내 마음을 끌고 있는 것이 필통이다. 지금도 내 책상 위에 놓여 있는 이 필통은 손바닥만한 양철 필통이다. 먼지가 묻은 채 30~40여 개가 아무렇게나 널려 있는 가운데서 이것이 눈에 띄었다. 대부분이 폭이 좁았는데 이것은 손바닥만하게 넓어서 마음에 들었다. 안정감이 있고 또 여러 가지를 넣을 수가 있기에 이동식 앉은뱅이 책상을 쓰고 있던 나에게는 안성맞춤이었다.
돌아와 물걸레로 닦고 보니 흠도 별로 없었다. 만화 주인공인 미키 마우스가 공놀이를 하는 그림과 친구랑 과자에 음료수를 먹으며 노는 모습이 그려져 있어 손주에게 물려주어도 좋을 듯 싶었다. 뚜껑 안쪽에는 구구단이 긴 삼각형 모양으로 인쇄되어 있었다. 좋은 착상이며 재미있어 보여 마음에 들었다.
나는 이 필통을 중국에서 거의 5개월이나 매일 사용하였다. 볼펜과 연필에 칼이며 지우개는 물론, 서류철 핀이랑 풀이랑 족집게와 안경테를 조이는 작은 드라이버까지 넣어두고는 필요할 적마다 꺼내어 썼다. 귀국할 때 프린터와 탁상용 소형 라디오, 음악 CD 같은 것은 다 놓아두면서도 이 양철 필통은 가지고 왔다. 내가 가장 많이 사용했고, 그만큼 손길이 갔었기에 그냥 놓고 오기가 싫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 양철 필통은 그것으로 역할이 끝나지 않았다. 뚜껑을 열면 나는 잠시 초등학생이 되어 구구단을 뇌어 본다. 하얀 바탕에 파란 글씨로 된 세모진 구구단 표가 나를 끌어당기는 것이다.
1×1=1
1×2=2 2×2=4
1×3=3 2×3=6 3×3=9
1×4=4 2×4=8 3×4=12 4×4=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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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내게 있어 이 양철 필통은 두 시공(時空)을 추억하게 한다. 초등학교 시절과 고향을, 그리고 잠시 살았던 중국 연길의 시간과 공간을 함께 떠오르게 하는 것이다. 즐거움과 정겨움이 담긴 것은, 좋고 나쁘거나 싸고 비싼 것이 상관없이 언제나 가슴을 따뜻하게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