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스토리(첫번째 글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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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스토리(첫번째 글4~7)
  • 동북아신문 기자
  • 승인 2007.03.20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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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새문안교회에서 만난 첫사랑

돌이켜 보면 나는 누구 못지않게 행복할 수 있는 조건 속에서 학창 시절을 보냈다. 아버지가 해군준장이셨으니 가난을 모르고 자랐고 수재들이 모인다는 서울 중고등학교를 다녔으니 말이다.

그러나 나의 학창시절은 그다지 행복하지 못했다. 163센티미터의 작달막한 키, 잘생기지 못한 얼굴 등이 당시 내게는 열등감의 원천이었다. 특히 이런 열등감은 중학교 2학년 때 새문안교회에서 만난 한 여학생을 짝사랑하면서부터 더욱 커져 갔다. 이화여중 2학년에 다니던 김상숙이라는 여학생을 나는 끔찍하게 좋아 했었다.

내 눈에 그 여학생이 어찌나 예쁘고 똑똑해 보이는지, 그 애 앞에만 가면 내 모습이 너무도 초라해지곤 했다. 게다가 그 여학생은 중학생인데도 가슴이 봉긋하게 나와서 나이에 비해 육체적으로 조숙했었다. 반면 나는 아직 발육이 덜되어 솜털이 보송보송한 애송이 소년이었다.

더군다나 당시 새문안교회 중등부를 함께 다니던 내 친구들은 왜 그렇게 다들 키가 크고 멋있었던지. 지금 생각하면 참 우스운 일이지만 중학교 2학년인 당시의 나에겐 매우 절망적이고 고통스러운 일이었다.

시간이 지나갈수록 그녀에 대한 사랑은 깊어만 갔고, 나의 열등감도 커져 갔다. 중3 때는 하루의 생활리듬 자체가 그 여학생을 만나는 일요일이 며칠 남았느냐에 따라 좌지우지되었다. 목요일부터 서서히 긴장하기 시작해 일요일이면 그 여학생을 만난다는 기대 때문에 온 몸이 뻣뻣하게 굳어졌다. 하지만 정작 교회에 가서는 말 한 번도 걸어보지 못했다. 그냥 옆 눈길로 훔쳐보는 게 고작이었는데, 그나마 그렇게라도 하지 못한 날엔 아쉬운 마음을 가지고 다시 한 주일을 기다려야 했다.

상숙이에 대한 짝사랑은 공부에도 영향을 미쳐서 일요일이 가까워 올수록 정신집중이 되지 않았다. 게다가 들리는 소문에는 상숙이가 다른 남학생을 좋아한다는 것이 아닌가. 그러니 나의 절망감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또 어쩌다가 상숙이가 내게 친절하게 한마디를 건네면 나는 기뻐서 어쩔 줄을 몰라 했다. 참으로 딱한 일이었다.  
고등학생이 된 후에도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짝사랑의 감정이 얼마나 컸던지 나는 음치임에도 불구하고 새문안교회 고등부 성가대원이 되었다. 그 이유는 전적으로 상숙이가 성가대원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고등학교 2학년 여름방학을 앞둔 어느 날 충격적인 소식을 들었다. 상숙이가 갑자기 미국으로 이민을 떠난다는 것이 아닌가. 그 순간 나는 온 몸이 마비되는 것 같았다.
한참동안의 충격을 추스린 후에 나는 용기를 내어 그 애한테 사랑을 고백하기로 했다. 사랑을 고백하다 딱지를 맞더라도 그렇게 하지 않으면 지난 3년이 너무도 허망할 것 같았다. 그 애에게 처음 데이트 신청을 하여 ‘무조건 한번 만나자’고 했다. 그런데 상숙이도 선선히 그러자고 하는 게 아닌가. 그런데 무슨 불행의 장난인지 일이 꼬여 나는 결국 그 애와 만나지 못했고 그 애는 미국으로 가버리고 말았다.


상숙이가 미국으로 간 후 나는 한동안 넋 나간 사람처럼 지냈다. 외국여행이 자유롭지 못했던 당시에는 미국이민이란 평생 못 만나는 먼 길을 떠나는 것과 다름없었다.  
그러나 그녀가 미국으로 가지 않았다면 아마도 나는 대학입시에 실패했을지 모른다. 그녀가 나의 시야에서 완전히 사라진 다음에야 비로소 학업에 전념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점에서 보면 차라리 다행스러운 일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또 한가지, 고등학교 시절의 열등의식이 당시에는 매우 고통스러웠지만 그 열등감 때문에 나는 인생의 쾌락을 좇는 일보다는 보다 인생의 근본적인 문제를 추구하는 일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래서 종교적인 문제, 철학적인 문제를 가지고 씨름하는 일에 많은 시간을 소비했다. 이러한 고교시절의 나의 모습은 그 후 대학시절까지 이어졌고 그렇게 해서 나의 인생이 형성되어 갔다. 이점은 상숙이가 내게 끼친 긍정적인 영향이기도 하다.

그 후 나는 대학에 들어가서 운동권 학생으로 변신하게 되었는데, 대학 2학년 시절에 그녀와의 놀라운 해후를 하게 되었다.

어느 날 밤 어느 여자가 내게 전화를 했다. 낯선 목소리여서 누구인지 전혀 추측이 되지 않았다.
"서경석씨가 계신가요?"
"예 바로 전데요."
“혹시 고등학교 시절에 만났던 김상숙이라는 여자를 기억하시나요?”
“김상숙씨요? 아 그 여자를 알다 뿐인가요? 그 여자는 제가 중학교 2학년 때부터 고등학교 2학년까지 죽도록 짝사랑한 여자이지요. 혹시 김상숙씨와 잘 아는 분인가요?”
그러자 상대편 여자는 흥분해서 소리쳤다.
“제가 바로 김상숙이예요.”
“엑!”
나는 나의 귀를 의심했다. 그러나 영락없는 김상숙이었다. 물론 우리는 즉시 만나기로 약속했다. 그녀가 가르쳐 주는 대로 불광동에 있는 그녀의 집으로 찾아가기로 했다. 설레는 마음으로 집을 찾아가고 있었는데 길에서 어느 아줌마가 내 앞에 멈춰 서서 웃고 있었다. 무심코 쳐다봤는데 놀랍게도 그녀가 바로 김상숙이었다. 집에서 기다리다 못해 상숙이가 마중 나왔던 것이다.  


고등학교 2학년 교복차림의 김상숙을 본 이후로 3년이 지난 지금 그녀는 몰라보게 변해 있었다. 립스틱에 마스카라까지 진하게 하고 있었고, 귀고리까지 했다. 게다가 살도 많이 찌고, 옛날과 달리 말도 많아져 있었다.


그녀는 내가 꿈에 그리던 소녀 같은 이미지와는 너무나 딴판으로 변해 있었다. 나는 그 애의 변화가 믿어지지 않았다. 그래서 오히려 상숙이에게 옛날 고등학교시절 사진을 보고 싶다고 했다. 그 애는 그때 미국으로 가서 어느 대학에서 저널리즘을 전공했었는데 미국사회에 잘 적응하지 못하고 몸도 좋지 않아 잠시 휴학을 하고 한국에 나와 있던 중이었다.  
그 후, 몇 차례 상숙이와 데이트를 했다. 그리고 그제야 그 애도 고등학교시절에 내게 관심이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렇지만 이제 와서 그런 이야기를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나의 지나간 고통이 보상되는 것도 아니지 않는가?


그러나 상숙이와의 만남이 그리 흡족하지 않았다. 만날수록 서로가 잘 맞지 않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이미 순진한 고등학생이 아니었고 어떻게 하면 나의 삶을 바쳐서 혁명을 이룰 것인가에 몰두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 애의 개인주의적인 성향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상숙이에게는 사랑이 제일 중요했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라면 모든 것을 희생할 수 있다는 생각이 그 애의 생각이었다. 민주화운동이나 이데올로기는 그 애의 관심 밖의 일이었다. 그렇지만 나는 이념을 함께 공유하면서 함께 고난의 길을 걸어갈 수 있는 동반자적인 여성을 원하고 있었다. 결국 나는 혁명을 위해 그 애와의 관계를 끊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을 했고 어느 날 그녀에게서 전화가 왔을 때 이제 그만 만나자는 말을 하고 말았다. 그 애는 대단히 실망스러워 했지만 나로서는 다른 선택의 길이 없었다. 몇 년간 짝사랑했던 여인과의 감격적인 해후였지만 다시 안타깝게 종언을 고한 셈이다.  


그러나 그때 그녀를 다시 만날 수 있었기 때문에 내 마음 속의 첫사랑의 환상이 깨질 수 있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아마도 나는 그 환상에 매여 다른 여자를 진심으로 사랑하기가 어려웠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지금 돌이켜 보면 그 당시 내 자신이 얼마나 이념의 늪 속에, 그리고 순교자적인 자세에 깊이 빠져 마음의 여유 없이 지내었던가를 반성하게 된다. 그 애는 당시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했었는데 나는 그만 그 애를 박절하게 대하고 만 것이었다. 그 애를 감싸줄 만큼 당시 나와 내 주위의 친구들, 그리고 일을 함께 하는 동지들의 사고방식이 폭넓지 못했던 것이다. 돌이켜보면 당시 우리는 사랑도 제대로 할 수 없었던 시대의 희생자들이었다.



이제는 상숙이도 환갑의 나이가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나는 그 애가 어디 살고 있는지 모르고 있다. 한번쯤 만나 나의 바보스러움을 탓해 보고 싶지만 그녀는 아마 이 세상을 먼저 떠났는지도 모르겠다.  



5. 고교시절에 만난 친구들



열등감과 실연의 아픔으로 우울했던 고등학교 시절에 내게 가장 큰 위안이 되었던 것은 좋은 친구들과의 만남이었다. 나는 서울중고등학교를 다니면서 평생의 친구라고 부를만한 소중한 친구들을 많이 만났다.


서울중학교 2학년 때 같은 반을 한 것을 계기로 나는 박세일(서울대 교수), 박종안(워싱튼 연방준비은행 경제자문관), 한성민(사업가) 등 세 명과 단짝 친구가 되었다. 우리 넷은 다 같이 학급에서 10번 안에 드는 키가 작은 학생들이었고, 성적도 좋아서 비슷한 점이 많았었다.
이 친구들과는 고등학교에 진학한 뒤에도 함께 YMCA 서울高 지부인 <태백클럽>이라는 모임을 만들었다. 18명이 멤버였는데, 대부분 공부를 잘했다. 사람들에게 많이 알려진 친구는 박세일교수, 김영삼정부 초기에 서울시장을 잠깐 지냈던 김상철 변호사, 임성준 전 청와대 외교안보수석 등이 있다. 이들과는 나이가 든 지금도 가깝다.


태백클럽은 산과 바다로 놀러 다니고 멤버들끼리 만나 친목을 다지고 머리도 식히는 그런 특별활동 모임이었다. 또 태백클럽 멤버들은 토론을 벌이기를 좋아 했다. 특히 나랑 박세일은 인생문제에 관한 토론을 즐겨 벌이곤 했다. 박세일은 여승이 된 이모를 둔 탓이기도 했지만 일찍부터 독실한 불교신자였고, 불교에 대한 지식도 매우 깊었다. 그래서 나도 그 친구 덕택에 불교에 깊이 들어가 보기도 했다. 그리고 종교가 다른 것이 인생에 관해 토론하는 데에는 서로 도움이 되었다. 그리고 사회문제 등 다양한 주제에 대해 토론에 열을 올리곤 했다.



세일이 덕분에 절에서 보낸 시간이 꽤 많았다. 세일이와 함께 절에 가서 하루에 10시간 씩 공부하다가 새벽녘이면 절 마당에 나와 함께 인생을 이야기하던 순간이 지금도 기억난다. 물론 당시의 생각이 잘못된 사회체제에 대한 비판으로까지 나아가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고등학교시절의 진지한 고민과 토론, 순수한 열정과 애국심이 없었더라면 나중에 불의에 항거하여 온몸을 던지는 치열한 삶을 살지 못했을 것이다.



학창 시절을 떠올릴 때 잊을 수 없는 사건이 무전여행이었다. 당시 고등학생 사이에는 무전여행이 유행이었는데, 나도 고등학교 2학년 여름방학에 친구들과 무전여행을 떠났다.
비상금 3천원(지금은 20만원은 됐음직하다.)만 몸에 지니고 10여일 동안 문전걸식을 하며 전국을 돌아 다녔는데, 나라가 어떻게 생겼는지를 처음 돌아본 귀중한 시간이었다. 그리고 그때의 무전여행과 같은 낭만을 요즈음 젊은이들이 누리지 못하는 것이 안 되었기도 하다.
무전여행은 내게 잊을 수 없는 소중한 경험이었다. 기차에 무임승차했다가 한성민이가 표 검사를 피해 기차지붕 위로 올라갔는데 그만 기차가 터널로 들어가 버려서 학생모를 날려 버렸다. 김유환은 기차가 역에 진입하자 표 검사를 피해 기차에서 뛰어내렸는데 알고 보니 뛰어내린 곳이 똥통이었다. 대전역에서는 전부 무임승차로 걸려서 역전 청소를 한참 하고 나서야 풀려 나올 수 있었다. 지금도 생각하면 절로 웃음이 나오는 추억들이다. 집  떠난 지 열흘 후에 부산에 도착했을 때에는 전부 돈이 떨어져 절망적이었는데 야무진 성격의 세일이가 비상금을 내놓아서 그 돈으로 서울행 완행열차를 탈 수 있었다.


그러나 친구들과 어울려서 놀러 다니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공부도 친구들과 함께 어울려서 했다. 나는 고등학교 시절 성적이 자꾸 나빠져 2학년말에는 전교 석차가 100등 밖으로 밀려나 있었다. 이렇게 되면 어려서부터 가기를 원했던 서울공대 기계학과는 꿈도 꾸지 못하게 된다. 2학년 여름방학에 무전여행을 다녀온 다음에는 결심을 단단히 하고 공부에 전념했고 고3 직전의 겨울방학에는 박세일, 김유환, 양남선과 산골의 작은 암자에 가서 죽어라하고 공부를 했다. 이때의 공부가 도움이 되어 고3이 되면서 단번에 좋은 성적을 회복할 수 있었고 좋은 성적 탓에 ‘즐거운’ 고3시절을 보낼 수 있었다. 또 좋은 성적으로 원하던 학과에 진학할 수 있었다.  


돌이켜보면 고등학교 시절, 아픔도 많았지만 좋은 친구들이 있어서 이 시절을 아름답게 지낼 수 있었다. 그래서 짝사랑의 아픔이나 열등의식을 보다 차원 높은 삶으로 승화시킬 수 있지 않았나 싶다.  




6. 공대가 싫다



나는 어릴 적부터 품어왔던 엔지니어의 꿈을 안고 대학에 진학했다. 서울공대 기계과에 진학했으니 일단 인생의 목표 하나를 달성한 셈이었다. 그러나 공대에 진학하고 난 후부터 공대가 싫어지기 시작했다. 대학 신입생 시절 내 눈앞에 비친 공대생들의 모습은 시간만 나면 미팅하고 연애하고 당구치고 카드 놀이하는 그런 모습이었다. 역사의식이나 민족의식은 전혀 없는 개인주의자들로만 보였다.

반면에 가까운 친구인 박세일은 서울법대로 진학하고 박종안은 서울상대 경제학과 학생이 되었는데 이 친구들과 만나면 나누는 이야기 주제부터 완전히 달랐다. 내가 공대에서 미적분을 푸느라 골머리를 썩이고 있는 동안 그 친구들은 ‘민족주의’니, ‘사회주의’니, ‘매판자본’이니 하는 어려운 사회과학 용어를 써가며 마치 혁명투사나 된 것처럼 열띤 토론을 하곤 했다. 실제로 세일이는 이념서클인 <동숭학회>에, 종안이는 <경우회>에 가입해서 하루가 다르게 변화하고 있었다. 당시 동숭학회에는 이영희 인하대 교수, 이협 전 국회의원, 고 조영래 변호사 등 쟁쟁한 선배들이 활동하고 있었고, 동기로는 박세일, 장기표, 양건 교수 등이 멤버로 가입해 있었다.

순진한 공대생이었던 나는 또 다시 공대생 컴플렉스에 시달리기 시작했다. 공대 안에서는 나를 감동시키는 것이 아무 것도 없었다. 나는 대학 1학년 시절을 인생의 방향을 탐구하기 위한 독서에 몰두하면서 보내는 것이 좋겠다고 판단했다. 그래서 입학 직후부터 전기물, 사회과학 서적, 그리고 주요 추천서적들을 닥치는 대로 읽기 시작했다. 쓸데없는 시간낭비를 줄이고 책읽기에만 전념하기 위해 아예 거처도 집에서 기숙사로 옮겨 버렸다.
1학년 여름방학 때는 선배들을 찾아다니며 추천을 받아 작성한 도서목록에 따라 책을 구입해서는 세일이와 함께 그 책을 싸가지고 절에 들어가 한 달 동안 추천받은 철학서, 사회과학서적, 신학서적, 역사서를 닥치는 대로 읽었다. 당시 특히 안병욱 교수의 엣세이집들, 에릭 프롬의 철학서, 그리고 역사책들이 나의 마음을 사로잡았던 기억이 지금까지 남아 있다.  
한 달 후 절에서 내려올 때는 나는 애벌레가 허물을 벗은 것처럼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변해 있었다. 방학 전에는 아무 것도 몰랐는데 방학을 지나고 나니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집중적인 독서가 얼마나 사람을 변화시키는가를 절감했고 그러면서 조금씩 운동권 젊은이로 변모하고 있었다.  


다른 한편으로 나는 대학에 입학한 후부터 고등학교 시절까지 한 번도 의심해 본 적이 없는 기독교 신앙에 대해 회의하기 시작했다. 신학 책도 많이 읽었지만 그럴수록 내가 확신 없이 습관적으로 교회에 나가고 있음을 깨달았다. 비록 내가 태어나면서부터 믿은 모태신앙이었지만 또 그랬기 때문에 나는 어떤 절실함도 뜨거움도 없는 뜨뜻미지근한 신앙인이었다. 그러나 오랫동안 기독교 안에서 살아왔기 때문에 신앙에 대해 회의를 한다는 것은 나의 삶의 근거를 부정하는 것을 의미했다. 물론 나는 종교적인 고민을 해소하기 위해 새문안교회 대학생모임에도 열심히 나가고 또 신학 책도 열심히 읽었다. 그러나 공부를 하면 할수록, 생각을 깊이 하면 할수록 신앙적인 회의는 더욱 커져 갔다.


그 뒤 우연히 CCC에서 주관하는 입석 여름수련회에 참석했다가 박성준이라는 선배가 흔들리고 있는 나를 위해 눈물을 흘리면서 기도하는 것을 보고 감동한 나머지 잠시 열정적인 신앙을 회복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 후 그 선배의 행동이 작위적인 것이었다는 느낌을 갖고 나서 다시 신앙적 갈등이 증폭되었다. 그러면서 내가 고등학교 시절까지 견지해 왔던 삶의 계획과 신앙 자세가 뿌리에서부터 흔들리고 있었다. 그리고 얼마 뒤 CCC 안에 있던 <경제복지회>라는 운동권모임에 참여하면서 본격적인 운동권 학생이 되었다.




7. 경제복지회와의 만남



‘경제복지회’는 공대생 컴플렉스에 시달리고 있던 내게 운동권 학생의 길을 안내한 최초의 모임이었다. CCC 입석수양관에서 나를 위해 눈물을 흘리던 박성준 선배가 ‘경제복지회’의 회장을 맡고 있었던 것이 계기가 되어 그 단체에 참석하게 되었다.  


‘경제복지회’는 당시 경제학과 학생들이 핵심회원들이었는데 나는 이 단체의 유일한 공대생이었다. 거기서 나는 내 대학시절에 많은 영향을 미친 훌륭한 선배들을 무더기로 만났다. 회장이었던 박성준씨를 포함해 강철규, 김근태, 이창식, 김국주, 홍용찬씨 등을 ‘경제복지회’에서 처음 만났다. 특히 박성준씨는 당시 공대 1학년 학생이었던 내가 보기에는 너무도 훌륭하고 모든 면에서 완벽한 존경스러운 선배였다. 카리스마도 대단해서 박성준씨를 만나는 것만으로도 큰 긴장과 자극이 되었다. 박성준씨는 당시 나보다 9년 위인 서울상대 경제학과 4학년 휴학생이었는데, 인간에 대한 사랑이 너무 깊고 철저해서 나뿐만 아니라 다른 후배들도 그 선배 앞에서는 존경심과 열등감에 시달려야 했다.

후에 박성준 선배의 부인이 된 한명숙(열린우리당 국회의원, 국무총리)씨는 당시 CCC 부회장이었는데, 운동권 여학생이 거의 없던 당시로는 보기 드물게 사회운동에 헌신하고 있는 여성이었다. 그 때문에 많은 후배 남학생들이 한명숙씨를 자신의 미래 배우자감 모델로 삼곤 했는데 나도 한명숙씨를 보면서 ‘나도 언젠가는 저런 여자와 결혼 해야겠다’고 는 생각을 했다.


결국 나는 박성준 선배에게 개인지도를 부탁하게 되고, 얼마 뒤 몇몇 친구들과 함께 본격적인 비밀과외를 받기 시작했다.
우리는 그 당시엔 몰랐지만, 뒤에 알고 보니 박성준씨는 그때 이미 신영복(통일혁명당 사건 장기수,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저자)씨로부터 공산주의지도를 받아 이미 사회주의자가 되어 있었던 것 같다. 그래서 우리의 비밀과외도 말하자면 사회주의 학습이었던 셈이다. 고등학교 친구들 5명이 모여 거의 1년간 자본론, 맑스주의 정치학 등 사회주의에 관한 비밀지도를 받았는데, 그 과정이 끝날 즈음에는 우리 모두 다 사회주의자가 되어 있었다. 공부를 할수록 사회주의가 그 당시의 사회모순을 가장 적나라하게 설명해주는 과학적이고 합리적인 이론이라고 생각했고 모든 의문을 속 시원히 설명하는 논리적인 근거를 찾았다는 기쁨을 느낄 수 있었다.


사회주의에 심취한 나는 사회과학 공부를 더 열심히 하기 위해 대학 2학년 여름방학 때 부모님과 상의 없이 휴학을 결정했다. 사실 기계과 2학년은 공부할 분량이 아주 많은 학년이다. 서울공대 안에서도 기계과 2학년과 화공과 3학년은 공부할 것이 많은 것으로 정평이 나 있었다. 기계과의 경우 동역학, 유체역학, 고체역학, 열역학 등 어려운 역학을 네 개나 해야 한다. 그런 상태에서 사회과학 공부와 전공 공부를 병행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웠다. 학교를 제대로 다니려면 다른 문제에 대한 관심은 포기해야 했다. 그때 세일이가 내게 아예 1년을 휴학하고 사회과학 공부를 본격적으로 해보라고 설득했다. 고민이 안 될 수 없었다. 기계공학 공부는 사회적으로 촉망받는 엔지니어의 길이었지만 사회주의 등 사회과학 공부를 한다는 것은 사회혁명을 위해 몸을 던지는 결과를 빚게 될 것이었다. 고뇌를 하다가 결국은 휴학을 결심했다. 전공 공부에 대한 회의도 컸지만 사회과학 공부에 대한 갈증이 워낙 강했던 탓이었다. 그리고 학교에 휴학계를 냈다. 며칠 뒤 내가 휴학계를 냈다는 말씀을 드리자 아버지께서는 굉장히 노하셨다. 아버지는 너무도 착한 분이셔서 평소에 화를 낸 적이 없는 분이다. 그런데 그날은 내 평생 아버지가 그렇게 화를 내시는 것을 처음 보았다. 그날 아버지는 화를 억누르지 못하고 눈물을 흘리면서 내 뺨을 처음 한 대 때리셨다. 아버지는 탄식하듯이 “지금 내 나이가 몇 인줄 아느냐. 어떻게 그런 일을 덜컥 저지르느냐. 네가 빨리 대학을 졸업해서 동생도 거두고 해야지, 어찌 그리 철이 없느냐”고 말씀하셨다. 당시 아버지는 환갑이 지나셔서 더 연로하기 전에 자식들을 빨리 키워 자리 잡게 해야 된다는 부담이 많으셨다. 그런데 가장 기대를 모으던 둘째 아들이 휴학계를 내버렸으니 어찌 화가 나지 않으셨겠는가? 나도 평생 처음 아버지로부터 뺨을 맞고 아버지의 눈물까지 보면서 마음이 무척 아팠지만 또 한편으로는 뜻한 바를 이루기 위해서는 집안과의 관계를 단절할 수 있어야 한다는 비장한 각오를 하고 있었다.


그 뒤 나는 집에서 나와 독서실에서 숙식하면서 1년 동안 사회과학 공부와 신학공부에 몰두하였다. 앞으로 10여 년간 계속되는 운동권 투사로서의 소양을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쌓기 시작한 것이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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