들어가는 글
이청준의 단편소설 “눈길”을 제목 그대로 떠올려보면, 두 영역을 차지한 자연스러운 이미지가 떠오른다. 그 하나는, 앞과 뒤로 뻗어 흘러갈 그것들을 섭렵할 길에 희고 맑고 차갑게 덮인 눈을 마저 연상하는 것으로 뚜렷하게 안겨오는 형상이요, 그 다른 하나는, 이 세상을 관찰할 끊임없는 세계인식이 되는 창이며 느낌구조의 지속적인 형성 통로로서의 구실로 통하는 눈길이다.
그렇다고 하여도 상기 두 이미지 영역이 동시에 관통된 하나의 구체적 판단으로 선뜻 합쳐지지 못하는 것은, 작가의 의도된 모호해지기가 독자들에게 그대로 당분간 수용되는 정도에서 끝나기 때문일 것이다.
전자의 분리된 실체를 눈길로서의 빙판으로 파악하고 상상을 더 밀고 나가면, 험난한 세상살기의 확장된 뜻이 안겨오게 되는 것은 상식의 범주에서도 가능한 구현이다. 후자의 형상을 전자의 이미지에 마저 얹어 그려보면, 빙판길을 바라보는 눈길은 그 세상살기의 감수를 사람 몸에 체화시키는 과정이 될 것이다. 그래서 그 전자의 ‘눈길’이나 후자의 ‘눈길’이나 완전 분리된 이미지로 보기만을 할 수 없는 소이연(所以然)이 결국 있게 되는 셈이다. 말하자면, 두 ‘눈길’은 어딘가에서 꾸준하게 합쳐지게 되는 영역을 자연스럽고 확보한다.
본고는 바로 이 두 ‘눈길’이 어디에서 어떻게 합쳐지는가에 초점을 맞춘 풀이가 될 것이다. 텍스트 자체에 대한 충실한 분석을 꼭 필요로 할 경우, 언어맥락의 중층적 구조를 존중하는 입장이 되며, 복합적 느낌을 일반론적 언어체계의 선에서 충실이 뒤쫓는 작업이 된다. 그러자면 형식주의의 근간이 되는 하나의 예정된 약속, 보편적 인식구조의 총체성에 대한 언어의 적용타당성에 대한 검증이 확실히 가능하다는 전제를 미리 깔아야만 한다. 본고는 이러한 약속체계를 그대로 따른다.
그리고 도출하는 두 ‘눈길’ 사이의 핵심 중첩 영역, 사라질 수 없는 ‘정’을 제련해내는 것으로 작품 ‘눈길’의 요체를 귀결하고 그 ‘정’이 뒤틀린 그 무엇으로만 남을 수 없는 당위성을 역설하게 될 것이다.
낯설어진 상징체계들 - 노인, 빚 문서, 옷궤
“내일 아침 올라가야겠어요.”
점심상을 물러나 앉으면서 나는 마침내 입 속에서 별러 오던 소리를 내뱉어 버렸다.
노인과 아내가 동시에 밥숟가락을 멈추며 나의 얼굴을 멀거니 건너다본다.
3자구도의 인물이 ‘나’를 중심으로 두 여성이 연동되어 나오면서 세상에서 가장 가까워야만 하는 보편적 위치로서 그 하나는 어머니로, 다른 하나는 아내로서 자리매김되게 소설이 시작된다. 그러나 어머니는 낯설어져 ‘노인’으로 타자화 된다. 정감의 속성을 뿌리 그대로 박제당한 채 어머니는 이질적 존재로 강하게 부담을 주는 호칭만을 부여받는다. 거기에 비하여 아내는 ‘그 여자’라는 냉혹한 부름 속에서의 역할로 끝까지 내몰리지는 않는다. 단 하나의 ‘노인’이라는 단어로 모자 사이에는 이미 넘을 수 없는 단절의 경계를 넘어버린 듯한 비뚤어진 관계가 그대로 노출되는 셈이다.
‘노인’으로의 그 ‘어머니’는 끝까지 ‘나’의 주관 속에서 다른 상징성을 획득하지 못한다. 일관된 고집과 철저성으로 말미암아 ‘노인’은 그 역할 속에서나마 당신의 체념을 ‘나’와의 상대적 규정 속에서 찾아보려 지속적으로 노력하는 동시에 유출되지 않을 수 없는 또 다른 진실을 전달하기에 이른다.
모자사이에는 어떤 중대한 사건이 발생했고, 그 사건이 모자사이를 그토록 냉혹하게 냉동처리 할 만큼 강력한 것이었던가? 커다란 물음은 해결하기에는 사건이 그렇게까지 설득력 있게 제시되지 않았고, 또한 제시될 이유가 없다는 것이 아마 중론이라고 보아도 별 무리가 없을 것이다. 기껏해야 맏아들의 도박으로 말미암은 가산탕진과 맏이의 책무를 허무하게 떠맡기게 된 형의 죽음, 그 이상으로 ‘나’는 ‘노인’과 정감·혈육의 내재적 단절을 운운할 강력한 이유를 더 내보이지도 않는다. 결국은 ‘나’의 그러하고자 ‘노인’을 바라보는 눈길로서 집요하게도 ‘나’를 주장하는 터무니없는 견지밖에 남는 것이 없다. 초라한 변명과 자기 당위적 피해의식이 ‘노인’에게부터 부과되었다는 정력적 소모논리가 만들어낸 무서운 자의적 결과일 뿐이었다.
나는 금세 어디서 묵은 빚문서라도 불쑥 불거져 나올 것 같은 조마조마한 기분이었다.
사실 ‘묵은 빚문서’따위는 애초에 없었다. 형의 도박으로 인한 가산탕진이 뜰이 널찍하고 방이 탁 트인 집을 팔아버리는 것으로 충당이 되었고, 빚이 없는 대신 물려줄 재산이 없는 정도로 집이 몰락해가는 과정, 그것은 ‘나’의 추억 속에서 결정적 단서로 작용하는 터이지만, 그렇다고 할지라도 진정한 ‘묵은 빚문서’로까지 비화된 사건을 애초부터 없었다.
‘나’의 ‘빚문서’ 정서는 ‘노인’을 향한 심적 부담의 추상적인 그 무엇이었다. 이성적 자기 판단으로서 ‘나’와 ‘노인’ 사이 냉정한 현실규정을 강력하게 스스로 주장하면서도 엄습하는 괴로움이 ‘빚문서’로 유령화되어 ‘나’를 피폐하게 만들어버리는 내면적 세계에 대한 성찰을 ‘나’는 그대로 뿌려치기에만 급급했던 그 자체가 가장 큰 딜레마였던 것이다. 그렇다고 하여도, 결코 튀어나올 수 없는 ‘묵은 빚문서’를 끝까지 물질화시키려는 집요함이 처절하도록 가증스러운 ‘나’의 정신적 전이현상에서 결코 해소되지는 못하고 있었다. 그렇게 길지도 않은 편폭에 서너번이나 등장하는 ‘묵은 빚문서’로 ‘나’는 ‘나’의 아집과 이유 불충분한, ‘노인’을 향한 증오색채의 情調를 뇌까릴 뿐이었다.
‘나’는 반환해야 할, 치러야 할 ‘노인’에게의 ‘빚문서’를 사실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에, 차라리 그러하기에 그때까지의 냉소적 견지가 무너지는 괴멸의 내면세계가 무서워 뒤틀린 지속으로 일관성 있게 밀고나갈 무자비한 용기만 달랑 남겨두고 있었다.
떠돌이 살림에 다른 가재도구가 없어서도 그랬겠지만, 이 20년 가까이를 노인이 한사코 함께 간직해 온 옷궤였다. 그 만큼 또 나를 언제나 불편스럽게 만들어 온 물건이었다. 노인에게 빚이 없음을 몇 번씩 스스로 다짐하고 있다가도 그 옷궤만 보면 무슨 액면가 없는 빚문서를 만난 듯 기분이 새삼 꺼림칙스러워지곤 하던 물건이었다.
옷궤는 옷궤이상의 의미로 ‘나’를 괴롭히는 자기현현의 마력을 근저에서부터 확보하고 있었다. 거기에 부여된 ‘노인’의 정서묶음이 ‘나’를 괴롭히는 원인이었던 것이다. 떠돌아도, 자식이 멀리 떠나버리고 딴살림을 차리면서 정말 우발적인 사태에서나 ‘노인’을 찾을 만큼 상식 이하여도, 단칸방의 비좁은 곳에 그 물건하나로 발을 펴기조차 어려운 형편에서도 옷궤는 ‘노인’과 항상 함께였다.
그 옷궤가 ‘나’의 모든 변명을 눌러버리고 최고의 하중으로 압도하고 있을 만한 심상의 기저로 등장한 사건이라는 것도, 알고 보면 소박하기 그지없는 단 하나의 사항에 불과하다. 팔린 집을 그대로 지키면서 새로 집주인이 될 사람에게 부탁하여, 단 하루라도 아들을 마지막으로 고향에서 만나 이미 팔려간 집에서 재우고, 따뜻한 밥 한끼 먹여서 다시 학교에 보낼 ‘노인’의 염원이 ‘나’를 괴롭히는 묘한 파괴력의 근원이었던 것이다. 모든 가장집물을 다 내다팔고 집마저 팔았지만 끝까지 ‘노인’을 떠나지 못한, 아니 떠나지 않은 옷궤, 그것은 다 비워진 집안의 속절없는 사연과 공허를 메워볼 상징으로서, 근거로서 마지막으로 원래 집을 찾아온 ‘나’를 동반하였고 또 20년 후에도 끝까지 보아야만 했던 그 상징체었다.
갔다가도 돌아올 자식이나, 옷궤에서 나와 몸을 감쌌다 다시 원위치로 되돌아가는 갖가지 옷이나, 갔다 온다는 의미에서는 완벽하게 일치되는 기운이 있다. 그 기운이 ‘나’를 타격하고 무력화시키는 공포로 환원되는 것을 ‘노친’의 옷궤집착과 결부시키면 ‘나’ 또한 무서움과 자책감, 그리고 분명한 분노를 느끼기에 족하게 된다. 사라지지 않고 끝까지 남을 그 옷궤에 그 어떤 설명과 해석을 곁들여도 하룻밤, 한끼 식사, 집에서의 마지막 복합추억이 저며 놓은 강력한 혈육의 정을 결코 초월할 수가 없었던 패러독스를 너무나 깊게 ‘나’는 자각한다. ‘나’를 재정립하기에까지 20년이 걸렸다면, 옷궤는 실존 이상의 부담이며 공격력의 원초적 핵이 되는 셈이다.
노인, 빚문서, 옷궤, 그리고 ‘나’, ‘나’는 ‘빚문서’와 ‘옷궤’ 사이 단절과 연속된 복합과 갈등의 심연 속에서 ‘노인’을 깊게 느끼고 있었다. ‘노인’은 ‘옷궤’ 하나만의 20년 동반으로 ‘나’를 느끼기를 초월하여 껴안고 있었다. 이러한 낯설음과 일그러짐, 거기에는 정답이 따로 없었다. 과정의 흐름만이 증명을 대신하고 있었다.
전경화된 아내, 후경에서 만나는 ‘나’와 ‘노인’
“어머님도 이젠 돌아갈 거처가 없으셨던 거지요”
한동안 조용히 입을 다물고 있던 아내가 이제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어진 듯 갑자기 노인을 추궁하고 나섰다. 그녀의 목소리는 이제 울먹임 때문에 떨리고 있었다. 나 역시도 이젠 노인을 참을 수가 없었다. 이제나마 노인을 가로막고 싶었다. 아내의 추궁에 대한 그 노인의 대꾸가 너무도 두려웠다. 하지만 그 역시도 불가능한 일이었다. 나는 아직도 눈을 뜰 수가 없었다. ... 사지가 마비된 듯 가라앉아 있는 때문만이 아니었다. ... 눈꺼풀 밑으로 뜨겁게 차오르는 것을 아내와 노인 앞에 보일 수가 없었다. ... “여보, 이젠 좀 일어나 보세요. 일어나서 당신도 말을 좀 해보세요.” ...
‘나’는 사건을 기술하고, 추억을 떠올리며 설득력 없는 ‘노인’ 소외를 경이롭도록 견지한 장본인에 불과하다. 거기에 비해 ‘아내’는 ‘나’와 ‘노인’ 사이의 관계 불합리를 끝까지 추궁해나간 전향적인 자세의 여인이었다. 따라서 어느 시골집에 다다른 후 실제적 행위에 있어서 전면에 등장하는 비율이 압도적으로 ‘아내’에게 집중된 것은 예고된 수순일지도 모른다. ‘나’의 침묵 속 20년 저항, ‘노인’의 20년 체념 속 견지는 언어로 풀어질 수 없는 심각하면서도 원융의 형질로서의 그 무엇이었다. 정을 포괄적으로 논하기에 앞서, 혈육의 그것에만 국한시켜도 정상회복의 해답이 자명해지는 마당에, 하필이면 단절과 분절의 세월을 모자사이에서 지속시킨다는 것은, ‘나’에게 있어서는 보상받지 못한 부분에 대한 대가의 부여라는 자가당착의 살벌함이요, ‘노인’에게 있어서는 ‘나’를 그토록 지켜보고 다가서고자 한 기다림의 미학이었다.
전경화, 그것은 ‘아내’의 역할이 정확하고 바람직하게 정립되었을 경우, 반드시 행해야할 최소한의 의무에 속하는 영역에서의 입장에서는 저절로 그렇게 되는 위치로서 정합성을 인정받을 만 하다. 많이 드러나서 생동할 듯 하면서도 밑바닥부터 회복되는 흐름을 마련하기에만 국한된 작용, 그것은 전경화를 통해 돌출된 ‘아내’의 위치였던 셈이다. 그 ‘아내’는 연결고리 이상을 행할 수 있는 입장도 아니고, 또 그러해서도 될 수 없는 제3자, 모름지기 그래야만 내면에서부터 흘러넘치는 나의 공격과 반항의 성향이 무마되고 생기를 회복하여 인간적인 윤리도덕 전의 세계로 진입할 토대와 변명의 場으로서의 구실로 충분하게 형성된다.
후경화에 갇힌 ‘노인’은 섣부른 손짓과 눈길로서 ‘나’와의 정상관계를 원하지도, 또 그렇게 해서도 어쩌할 수 없는, 부질없는 몸짓을 충분히 자각하고 있었다. 남은 것은 어머니로서의 ‘정’ 하나뿐이었다.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닌, 남편과 맏아들과 청춘을 보내고 마지막으로 부여잡은 한 가닥의 소망, ‘나’와의 해후를 물리적 영역이 아닌 심적 구조에서 통합되기를 바라는 간절한 소망 하나뿐이었다.
그래서 ‘눈길’은 ‘눈길’을 만나게 된다. 그리고 또한 ‘눈길’은 ‘눈길’을 만날 수밖에 없는 것, 거기에 반전되는 올바름의 쾌감이 있다. 쾌감을 초월한 짜릿한 감동이 있다.
이야기를 듣고 있는 나의 머릿속에도 마침내 그날의 정경이 손에 닿을 듯이 역력히 떠올랐다. 어린 자식놈의 처지가 너무도 딱해서였을까. 아니 어쩌면 노인 자신의 처지까지도 그 밖엔 달리 도리가 없을 노릇이었는지도 모른다. 동구 밖까지만 바래다 주겠다던 노인은 다시 마을 뒷산의 잿길까지만 나를 좀더 바래 주마 우겼고, 그 잿길을 올라선 다음에는 새 신작로가 나설 때까지만 산길을 함께 넘어가자 우겼다. ... 노인의 말마따나 미끄러지고 넘어지면 노인이 나를 부축해 일으키고, 노인이 넘어지면 내가 당신을 부축해 가면서, 그렇게 말없이 신작로까지 나섰다.
“... 산사람 목숨데 설마 그때라고 누구네 문간방 한 칸이라도 산 몸뚱이 깃들일 데 마련이 안 됐겄냐. 갈데가 없어서가 아니라 아침 햇살이 활짝 퍼져 들어 있는디, 눈에 덮인 그 우리집 지붕까지도 햇살 때문에 볼 수가 없더구나. ... 그놈의 말간 햇살이 부끄러워서 그럴 엄두가 안 생기나더구나. 시린 눈이라도 좀 가라앉히자고 그래 그러고 앉아 있었더니라... ...”
‘눈길’ 속에서 ‘나’의 미끄러짐이 있었다면 ‘노인’이 ‘나’를 부축하고, 당신이 미끄러지면 ‘나’의 부축이 있었던 그 정경이야말로 더 이상의 해석이 필요없는 모든 정의 압축이다. 그것 말고는 따로 할 수 있는 것도 없었던 것이다.
그러한 노인의 ‘눈길’이 말간 햇살을 부끄러워하는 모습에 미래는 정녕 조화롭고 바람직하게 마련되었는지도 모른다. 그 햇살 속에서 ‘노인’과 ‘나’의 부축임이 일체가 되어 앞날의 해빙을 예고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건져 올린 역력한 기억을 그때까지 지우지 못하였기에, 잊고자 했던 모든 노력이 허무하게 되게끔 약동하는 내면의 바램이 있었기에, ‘눈길’과 ‘눈길’은 강한 흡인력을 내장하고 주위의 그 무엇이라도 품어 안고 용해시켜 버릴 원초적 힘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으로 정은 혈육 사이에서, 어머니와 아들 사이에서 20년을 넘어 맥을 다시 이어나가게 되었다. 그것으로 후경화의 빛 바랜 ‘노인’은 햇살에 눈이 부시게 되고, ‘나’는 눈꺼풀 아래의 뜨거운 것을 주체 못하게 된다.
마무리
이청준의 단편 “눈길”은 언어적 맥락 속에서 시대를 벗어난 문학적 힘을 보존하는데 성공하였다. 지극히 단순하고도 에누리 없는 ‘情 “의 본능적 세계는 그래서 오히려 언어표현 이상으로 위대한 것이다.
끊임없는 생경화, 이질화, 비틀림이 있었기에 가장 단순했던 진실의 제 측면이 ‘눈이 부시게 햇살’의 감미로움을 부여받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눈길’과 ‘눈길’은 ‘노인’, ‘빚문서’, ‘옷궤’를 섭렵하며 전경화된 ‘아내’를 내세워 후경에서 ‘나’와 ‘노인’을 내재적 맥락 속에서 파악하며 커다란 세계를 그리는데 성공하고 있다.
그러하기에, 현실적으로 그러함의 그 세계를 문학의 세계로 넘겨오는데 필요한 긴장된 조화감이 ‘눈길’을 성공시킨 큰 힘으로 보탬이 된 것이다.
형식주의적 고찰에서 얻은 ‘눈길’의 단초적 고찰은 향후 보다 복합적인 분석 속에서 중층적 의미를 확보하게 되는 후속 작업이 필요함을 역설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