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 글은 공학도이었던 내가 어떻게 해서 목사가 되었으며, 어떻게 운동권 인사가 온건한 시민단체인 경실련(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을 창립했으며, 또 그 후에 왜 정치에 나섰다가 다시 나눔운동을 하게 되고 나중에는 서울조선족교회까지 세웠는가? 그리고 지금은 왜 또다시 보수라는 소리를 들어가면서 애국운동을 하고 있는가를 설명한 나의 인생이야기이다.
사실 나는 11년전에 <꿈꾸는 자만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제목의 책을 냈었다. 그 책은 내가 경실련 사무총장을 그만두면서 집필 작업을 시작했지만 결국은 다음해인 1996년 3월에 출판했었던 책이다. 11년 전에 책을 쓸 때에는 두 가지 목적이 있었다. 하나는 경실련 운동을 설명하기 위해서였다. 당시 경실련은 짧은 5-6년의 기간 동안에 한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단체가 되었었다. 그랬기 때문에 사람들은 경실련에 대한 많은 글과 논문에도 불구하고 그런 학술논문이 전해주지 않는 경실련 내부의 생생한 이야기들을 무척이나 듣고 싶어 했다. 더구나 경실련을 이해하는 일은 경실련을 창설하고 주도한 나의 삶과 따로 떼어서 생각할 수 없는 것이었다. 그래서 경실련 이해를 위해서도 창립자인 내의 입을 통한 경실련 이야기가 꼭 필요했다. 그리고 또 하나는 나의 신앙적 편력에 대한 기술이었다. 나는 우리나라 초대 기독교집안에서 태어났고 착실한 학생으로 성장했지만 젊은 시절에는 무신론자임을 자처했었고, 한때 사회주의 사상에도 심취했었으며 민중신학의 추종자로서 오랫동안 진보적 기독교운동에 속해 있었다. 그 후에는 복음주의 기독교인으로 살아가고 있다. 이러한 나의 신앙편력이 파란만장했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내게 나의 신앙이야기를 책으로 내주기를 바라왔었다.
그러나 막상 책을 내게 된 것은 한참의 시간이 지난 후 내가 전혀 예상치 못했던 정치참여 결단을 하면서였다. 목동에서 출마하면서 나를 모르는 유권자들에게 나를 알릴 필요가 있어 바쁜 일정에도 책 내는 작업을 계속하여 결국 96년 3월에 책을 내게 되었다. 만일 그 책이 선거와 관련이 없었더라면 상당히 많은 출판 부수를 기록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 책이 선거용으로 출판되다보니 낯 뜨거운 자기자랑도 들어갔고 또 책을 홍보할 수도 없었다. 그러다 보니 선거가 끝난 후에도 좀처럼 그 책의 再版을 찍을 결심을 하지 못했다. 그러다 보니 11년이 지나고 말았다.
지난 11년 동안에도 <꿈꾸는 자만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책을 수정보완해서 재출판하자는 제안은 여러 번 있었다. 그리고 나도 몇 차례 글을 쓰려고 시도했었지만 번번이 중도에서 포기했다. 나의 바쁜 일정에서 책을 쓰기가 너무 힘들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번에 다시 서울조선족교회가 조선족동포를 위해 발행하고 있는 동북아신문의 인터넷 판에서 나의 이야기를 연재하고 싶다는 요청을 해 왔다. 그리고 이번에는 내가 단단히 각오를 하고 이 작업을 하기로 결심했다. 게다가 기왕에 쓰는 것이라면 신문에 연재를 해야 중도포기를 안하게 될 것이라는 생각을 했다.
이번에 내가 이 연재를 꼭 해야겠다고 생각한 이유는 너무도 많은 사람들이 과거에 좌파였던 내가 어떻게 우파가 되었는지를 매우 궁금해 하였고 나도 젊은이들을 향해 나의 인생이야기를 통해 들려주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11년 전 책을 쓸 때의 목적은 과거 암울했던 군사독재시절을 모르고 자란 20대 젊은이들에게 그 시절을 겪은 40대 후반의 지식인이 그때의 이야기를 들려주기 위함이었지만 지금에 와서는 환갑이 다된 중늙은이가 다시 오늘의 젊은이들에게 왜 지금 나라 살리기를 위한 애국운동, 선진화운동이 필요한지를 설명하는 내용이 추가되었다. 이 파란만장한 이야기를 들려주기 위해 옛날 책을 다시 손질하고 새 내용을 보완해서 긴 連載를 시작하고자 한다.
2007년 3월
첫 연재를 시작하면서 서경석 목사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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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세 가지의 집안 전통
우리 집안에는 세 가지 전통이 있다. 첫 번째는 기독교 신앙전통이다. 사람들은 흔히 우리 집안을 ‘한국의 아브라함 집안’이라고 부른다. 우리 집안의 내력을 훑다 보면 ‘한국 교회 최초’라는 말이 적어도 일곱 번은 나온다. 우선 나의 증조할아버지인 서경조 목사님은 우리나라 최초의 신학교인 평양신학교를 1회로 졸업하셨고, 한국 최초의 목사가 되셔서 한국 최초의 교회인 소래교회를 황해도 장연군 대구면 소래마을에 세우신 분이다. 서경조 목사님은 그 뒤에 남한 최초의 교회인 새문안교회를 언더우드목사님과 함께 세우셨다. 그래서 우리집안은 지금도 새문안교회 교인이고 나도 젊은 시절을 새문안교회에서 보냈다.
증조할아버지의 형님인 서상륜 할아버지는 우리나라 최초로 중국에서 성경책을 우리말로 번역해서 한국에 들여와 보급하신 분이고, 조부되시는 서병호 장로님은 한국 최초로 유아세례를 받으신 분이다. 8년 전에 93세로 돌아가신 아버지 서재현 장로님도 독실한 장로님이셨고 지금은 88세가 되신 어머니 김명진 권사님도 새문안교회의 은퇴권사이다. 나보다 한살 위인 형님 서원석 장로는 지금 새문안교회 시무장로이시고 우리 집안의 서경조, 서병호, 서재현에 이은 4대째 장로가 되셨다. 서경조 할아버지는 목사가 되시기 전에 장로이셨기 때문이다.
4대째 이어져 내려오는 기독교 전통 때문에 나는 태어날 때부터 지금까지 교회를 떠나서는 나를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기독교 세계 속에서 살아왔다. 태어나자마자 교회에서 유아세례를 받았고 어린 시절부터 부모님의 품에 안겨 교회를 다녔다.
이러한 기독교 집안전통은 마땅히 자랑스럽고 부러움을 살 일이지만 젊은 시절의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이런 말을 하면 사람들이 잘 안 믿겠지만 당시 한창 사회주의에 빠져 있었던 나는 내가 왜 프로레타리아 집안에서 태어나지 않고 보수 반동의 집안에서 태어났나 하는 안타까움을 가지고 있었다. 그렇지만 젊은 시절의 나의 발버둥도 나를 기독교 집안전통에서 분리시키지 못했고 결국 지금 나는 기독교 목사로 살아가고 있다.
우리 집안의 또 다른 전통은 민족운동 전통이다. 실제로 서병호 할아버지께서는 김구, 여운형 등과 함께 신한청년당을 조직해 당수로 활동하셨고 상해대한민국 임시정부 의정의원 겸 내무위원을 지내셨다. 그리고 미국의 윌슨대통령이 민족자결주의를 제창했을 때 서병호 할아버지는 이 사실을 국내에 전하기 위해 비밀리에 서울로 잠입했었고 그래서 3.1운동이 일어나도록 하는 촉매역할을 하셨다. 아버지 서재현장로도 상해임시정부 시절에 상해 한인독립운동, 상해 한인청년당, 민족혁명당 활동 등의 공훈으로 할아버지 서병호장로와 마찬가지로 건국훈장 애국장을 받으셨다. 그 바람에 우리와 우리 자식들은 독립유공자 자녀로 등록금을 면제 받으며 학교를 다녔고 지금도 아버님은 대전 국립묘지에 모셔져 있다.
특별히 아버지는 상해 동제대학 기계학부와 대학원을 졸업하시고 중경의 철공장의 공장장으로 일하셨기 때문에 당시 한국인들 중에서는 봉급을 제일 많이 받는 편이셨다. 그래서 경제적으로 안정이 된 우리 집은 지방에서 독립운동을 하는 분들이 상해에 오게 되면 의례히 그분들에게 숙식을 제공했다.
친할머니인 김구례 할머니의 친정집안도 독립운동 집안이다. 김구례 할머니의 가장 큰 오빠인 김윤방 할아버지의 막내딸은 애국부인회 사건으로 유명한 김마리아이다. 내게 오촌아주머니가 되는 김마리아는 나중에 다시 신사참배를 거부하다 투옥되었고 끝내 고문으로 얻은 지병으로 순국하셨다. 김구례 할머니의 바로 위 오빠인 김필순 할아버지도 세브란스 1회 졸업생인 의사로 105인 사건에 연루되어 수배를 받다가 만주로 피신, 흑룡강성 치치하얼에서 이상촌 건설을 꿈꾸다가 타계하신 독립운동가다. 또 김필순 할아버지의 둘째아들인 김덕린 아저씨는 중국에서 영화 황제로 널리 알려진 김염(金燄)씨이다. 그 분은 영화배우로 유명하지만 돌아가실 때까지 민족의식을 굳게 간직하신 분이었다. 또 김구례 할머니의 동생인 김순애 할머니는 상해임시정부 부주석을 역임하신 김규식 박사의 부인으로 역시 독립운동으로 일생을 보내셨다. 그 밑의 동생인 김필례 할머니는 정신여학교 1회 졸업생으로 정신여학교 초대교장이 되어 기독교교육에 전념하신 교육자이고 또한 한국에서 YWCA를 창립한 분이기도 하다.
친할머니인 김구례 할머니는 6.25동란 때 돌아가셔서 기억이 거의 없지만 그 동생 되시는 김순애 할머니는 오래 사셨고 또 나를 무척 아껴주셨다. 특히 내가 민청학련사건으로 징역 20년형을 받고 감옥에 갇혔을 때 김순애 할머니는 병석에 누워서도 털양말을 여러 개 짜서 감옥에 넣어 주셨다. 그 양말 덕에 나는 온기가 하나도 없는 겨울 감옥을 잘 견뎌낼 수 있었다.
이러한 집안의 역사 때문에 나도 김마리아 기념사업회 등 한 두개 기념사업회에 관계해 왔다. 그리고 요즈음처럼 역사청산 문제가 사회적 잇슈가 될 때에는 새삼스럽게 부모가 내게 역사의 짐을 떠 넘겨주시지 않은 것을 감사하게 된다. 그렇지만 혼자서 생각해 본다. 만일 우리집안이 상해로 망명가지 않았으면? 아버지와 어머니가 국내에서 결혼하시고 자식들을 낳으셨다면 부모님이 과연 친일의 대열에서 빠지실 수 있었을까? 아마 부모님께서도 이 문제를 자신 있게 답변하시지는 못 하실 것이다. 그런 것을 생각하면 해방된 지 60년이 다된 지금에 와서 다시 옛날을 들추어내어 후손에게 창피를 주는 일은 참으로 옳지 않다고 생각된다.
세번째 전통은 아버님이 기계과를 졸업하시고 70세에 은퇴할 때까지 엔지니어이셔서 우리 집안 형제들이 다 기계공학도가 되었다는 점이다. 그 바람에 형님을 제외하고는 나는 서울대 기계과에 진학했고, 바로 밑 동생 만석이는 한양대 기계과에, 그 밑의 창석이는 연세대 기계과에 진학했었다.
집안 전통은 참으로 무섭다. 젊은 시절에 나는 무신론자도 되었고, 사회주의자도 되면서 나 자신의 삶을 독립적으로 모색했지만 결국은 집안 전통에서 한 발짝도 벗어나지 못하고 말았다. 나뿐만 아니라 내 동생 만석이도 목사가 되었고 나와 막내동생 창석이는 민청학련 사건으로 각각 20년형을 받았었다. 결국 우리 형제들은 기독교와 애국적 민족운동, 이 두 전통을 나름대로 계승하면서 살아온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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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아버지를 만분지 일만 닮아라.
“아버지의 만분지 일 만이라도 닮아라”라는 말은 내가 중학교 시절 고모님 밑에서 자랄 때 고모님으로부터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은 말씀이다. 우리 집안 4형제의 공통점이 하나있다. 그것은 가장 존경하는 분이 누구인가 라는 질문을 받으면 주저하지 않고 아버지라고 말한다는 점이다. 그만큼 아버지는 우리가 도저히 따라가기 힘든 聖子같은 분이셨다. 우리 형제들은 해마다 아버지 기일이 오면 어머니와 가족과 함께 대전 국립묘지에 있는 아버지 묘를 찾아가 예배를 드린다. 그리고 우리는 한 결 같이 돌아가신 아버지를 회상하면서 아버지를 닮게 해 주십시오 라고 기도를 드려 왔다.
8년 전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 장례식에서 나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아버지와의 이별이 안타깝기도 했지만 그보다는 내 자신에 대한 부끄러움 때문이었다. 나는 아버지와 같은 분을 아버지로 둔 것을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하나님께 감사해 했지만 막상 내가 아버지의 인품을 닮으려는 노력을 너무 소홀히 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아버지 장례식에 참석하신 서영훈 선생님이 “서목사도 아버지를 닮아야 돼”하고 말씀하셨는데 나는 그 말씀 앞에서 몸 둘 바를 몰라 했었다.
소망교회 곽선희 목사님이 아버지 장례식을 집례 하셨다. 곽선희 목사님은 아버지가 인천제일교회 시무장로로 계실 때 그 교회에서 부목사로 계셨기 때문에 아버지를 너무도 잘 아신다. 곽 목사님은 설교에서 아버지를 회상하면서 이제껏 살아오면서 서재현 장로님처럼 겸손한 분을 본적이 없다고 하셨다. 그리고 아버지처럼 부지런하고 아버지처럼 정직한 분을 이제껏 본적이 없다고 말씀하셨다. 곽 목사님의 말씀은 전혀 과장된 것이 아니다. 아버지가 해군준장으로 진해 해군공창장이셨을 때나 한국기계 사장으로 계셨을 때나 항상 제일 먼저 출근하셨다. 아버지는 어떤 약속시간에도 30분 일찍 가시는 분이다. 또 아버지는 지나칠 정도로 정직한 분이시다. 중국에서 귀국하실 때 당시 상해의 문물이 크게 발달했음에도 불구하고 작업복 세벌만 사가지고 귀국하셨다. 오로지 조국에 돌아가 열심히 일하겠다는 생각이외에 다른 생각이 없으셨기 때문이다. 공과 사의 구분도 엄격하셔서 외국출장을 갔다 귀국하시면 항상 쓰다 남은 돈을 전부 반납하셨다. 이승만 정권 당시에 국영기업체의 장(長)이셨기 때문에 원하기만 했으면 회사를 불하 받아 대기업 오너가 되실 수도 있었지만 아버지는 그런 방법은 거들떠보지도 않으셨다. 그리고 자식들에게는 집 한 채만을 유산으로 남기셨다.
아버지의 성품 중 가장 따라가기 힘든 성품은 아버지의 겸손함이다. 왜 나는 아버지처럼 겸손하지 못한지, 그것이 너무 부끄럽고 안타깝다. 아버지는 해군제독 시절에도 졸병들에게 존댓말을 하신 것으로 해군에서 유명하셨다. 72세에 은퇴하셨는데 은퇴하신 후 아버지는 한동안 우울하게 보내셨다. 은퇴하신 후 생산적인 일을 하지 못하고 하릴없이 밥만 축내고 있다고 생각하신 것 같다. 그러다가 혈관이 막혀 하마터면 큰일 날 뻔 하셨다. 그러나 그 고비를 지나고 나서는 아버지는 철저하게 집안을 위해, 어머니를 위해, 그리고 자식을 위해 봉사하며 사셨다. 청소에, 설거지에, 장보는 일 등 모든 집안의 잡일들이 아버지의 독차지가 되었다. 내 친구가 집에 오면 영락없이 아버지가 손수 커피를 타주셨다. 아버지는 내가 감을 좋아하시는 것을 알고 매일 감을 깎아서 출근할 때 먹으라고 아파트 문 옆에 놓아두셨다. 아버지는 정말로 기쁨으로 나를 섬기셨다. 그리고 한 번도 권위주의적인 모습을 보이신 적이 없다. 과연 내가 은퇴한 후에도 아버지처럼 살 수 있을까? 나는 자신이 없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 형제들은 매년 반드시 아버지 묘소를 찾는다. 그리고 아버지를 닮게 해 주십시오 하고 기도를 드린다. 그리고 금년에는 아버지에 대한 인터넷 책을 내기로 했다. 남에게 보이기 위해서가 아니라 아버지를 회상하면서 우리 자신을 되돌아보기 위해서다.
부모님 덕분으로 우리 형제들은 어린 시절에 가난을 모르고 자랐다. 아버님은 48년 8월 상해에서 돌아와 당시 우리나라 최대의 기계공장이었던 인천 ‘조선기계제작소’의 기술부분 최고 책임자를 지내셨고, 그 뒤에 해군에 입대하여 준장으로 해군공창장과 인천 해군공작창장을 지내셨다.
아버님은 일제 시대에는 드물게 석사학위까지 받으신 엔지니어이셨지만 독립운동을 하신 아버지의 영향으로 사회정의와 가난한 사람들에 대한 배려가 남다른 분이셨다. 아버님은 귀국 후 처음 부임한 회사에서 노동자들의 월급을 인상하자고 건의했다가 사장이 받아들이지 않자 사표를 내고 나와 노동자들의 임금인상을 받아들인 ‘조선기계제작소’로 회사를 옮기셨었다. 그 뒤 6.25가 터지자 피난하지 못했던 아버님은 큰 공장의 고위간부라는 이유 때문에 화를 당할 뻔 했는데, 노동자들이 아버님을 변호해줘서 화를 면하셨다. 그 뒤 국군이 인천을 점령하자 이번에는 아버님이 북에 협조했다는 부역혐의를 받을 뻔했다. 그런데 이때에도 ‘사장까지 도망간 공장을 홀로 지켰다’는 아버님의 사명감이 인정되어 화를 면할 수 있었다.
이런 과정을 겪으시면서 부모님은 ‘세상이 아무리 변해도 그때그때 옳은 일을 하는 게 중요하고, 결국 그것이 우리 가족을 안전하게 지켜 줬다’는 신념을 갖게 되셨다고 한다.
이러한 부모님의 바른 삶의 모습이 내 삶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서울공대 2학년 시절 내가 사회과학 공부를 하겠다며 부모님과 의논 없이 학교를 휴학하자 아버님은 너무도 실망한 나머지 처음 내 뺨을 때리셨다. 그리고 나서 아버님과 나는 한동안 눈길이 마주치는 것도 피할 만큼 서먹서먹한 관계를 유지해야 했다. 돌이켜 보면 아버님은 내가 장래가 보장된 엔지니어의 길을 포기하고 사회혁명에 투신하는 것을 반대하셨지만 근검하고 정의로운 삶을 통해 나로 하여금 정의를 위해 싸우는 투사가 될 수 있도록 정신적 기초를 세워주신 셈이다. 그리고 아버님도 얼마 지나지 않아 내가 걷는 길이 바른 길임을 이해하셨고 내가 동생 창석이와 함께 구속되어 각각 20년형을 선고받는 극한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않고 우리를 지지해주셨다. 그리고 나중에 내가 경실련을 창립하였을 때 아버지는 가장 나이 많은 회원으로 경실련 집회에 빠짐없이 참석하셨다.
<다음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