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날 유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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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날 유감
  • 전유재
  • 승인 2007.02.1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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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리봉 골목에 농축된 설날의 추억 -

설날 기분이 미리 몸 속에서 작은 아픔같이 떠오른 데에는 특별한 이유가 따로 없었다. 하늘은 잿빛이고 낮게 드리워져, 가리봉 골목길에서 갈 길을 찾아 서성거리던 길손에게 자못 우울한 기분을 자아내게 했던 차에 저절로 그렇게 한 해를 뒤돌아보게끔 떠올랐을 뿐이다.

 

그러나 이 기분은 무엇보다도 진실했다. 며칠 전 친구가 으슥한 밤에 전화 저쪽 켠에서 어눌한 어조로 “새해에는 장가 가야지”를 몇 번이고 곱씹다가 고등학교 세월을 두서없이 회상하더니 “학생 때가 그래도 좋았지”를 확신에 찬 목소리로 내뱉을 때만 하여도 정작 그 친구와 같은 기분이 되지 못했던 것은, 내 지금의 정서와 같이 그때를 함께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서울 한복판에서 쫓기듯 흘러가는 차량의 움직임과 그 속도감을 그대로 받아들이려니 분명 잃어버린 여유가 무심코 그리울 따름이다. 단순한 감상의 차원에서 벗어난 내 분위기를 누구와 공감하겠다는 자세로까지 밀고 나간다면 차라리 하늘이 이렇게 잿빛이 되는 쪽이 더 편하다.

 

동포의 거리에서 결코 낯설지 않은 간판들이 흐트러지는 듯 하면서도 정연하게 골목을 메우는 가운데 하루의 오후는 저무는 쪽으로 흘러간다. “하얼빈 판점”이 보이는가 하면, “도문 양고기뀀”도 눈에 들어온다. 정교하게 디자인하지 않아 오히려 바다 건너 저쪽의 모습을 원형질 그대로 떠올리게 하는 저력이 거기서 꿈틀댄다. 그래서 그 묘한 기분에 낮게 탄식도 해본다.

 

사실 잃어버릴 것도 별로 없는 감수성의 세계지만, 기어이 옛 시절 떠올리면서 간혹 울먹이는 것에 유치함이 묻어난다고 비웃을 것은 없다. 오히려 그 오랜 세월 전, 가공되지 않은 거친 감정을 가족과 자연스럽게 함께 했다면, 그것이 더욱 진실된 모습일 것이다. 그래서 설이 아마 그리운가부다. 아니, 가족이 그리워 설을 기다린다는 쪽이 더 정확한 대답이 될지도 모른다. 잿빛하늘이 추위의 한 기운과 함께 낮게 드리워 몸 속을 비집고 들어올 때, 엄습하는 그리움을 몸 속에 껴안는 순간, 나는 겸허하고 조용해진다.

 

굳이 조상의 조상의 그 조상 때부터 설을 쇠어 왔기에, 감상적 신토불이에 호소하는 쪽으로 전통을 들먹이다 나니 내 정서가 고양되는 것은 아닌 듯 하다. 몸에 체화되고 소시부터 같이 해왔으며 후끈한 떡국으로 느끼고 근사한 새 옷으로 감쌌던 그 기운이 여전히 남아 설날을 그리게 하였을 뿐이다. 그 떡국을 생각하면, 떡국을 썰던 손길이 생각나고, 그 손길을 그윽이 떠올리면 고향집이 생각나는 것, 그 풀어지는 상념이야말로 설의 추억이 아닐까.

 

노래방 흘러간 옛 노래에 회한과 기쁨을 담아보더라도, 알코올이 서서히 빠져나갈 무렵, 나는 결코 좋은 감수만을 느껴보았던 것은 아니다. 그래도 어딘가 모자라는 구석에 채워지지 않은 그 그리움 따위를 불러올 때면 오히려 후련한 기분이 되는 것이 나만의 특별한 되뇌임일까.

 

2006년을 양력으로 보내고도 조금은 위안이 될터이지만, 정작 음력으로 또 맞이해볼 때면, 정녕 2006년이 그렇게 가는 것이라는데 약간의 슬픔은 있다. 그 슬픔에 가족의 정을 담고, 잿빛하늘을 담고, 가리봉 골목 음식점 간판을 담고, 겨울을 겨울답게 한 추위를 담아놓으면 저 멀리까지 건너가지 못한 몸 대신, 진솔한 마음이라도 위안을 약간 받을 만 하다.

 

가족과 함께 하지 못한 올해 구정에, 가리봉에서 서성이는 나와 같은 동포들이 잿빛하늘을 한번쯤 쳐다보는 것도 그리 나쁘지는 않을 듯 싶다. 가리봉을 이어 대림에서, 대림을 넘어 안산에서, 안산을 건너 인천에서, 그리고 저 지방의 곳곳에서 약간 멍청하게 하늘을 바라보던 이들에게 나는 더 없는 동질감을 강한 충동처럼 느끼게 된다.

 

정확하고 확실하며 에누리 없는 자본의 논리를 한번쯤 여유 있게 버려보는 시간, 그리고 그 버림을 위해 내가 설날을 그린다는 것, 한국에서의 설날이 다만 어김없는 달력의 커다란 붉은색 숫자에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내 잿빛하늘을 보며 알았다. 그리고 서성이는 골목의 추위 속에서 그렇게 이유 없이 알았다.

 

새해에는 덕담이 필요할 것이다. 발해를 건너온 비행기에서 생각해보던 한국과 가리봉 뒷골목에서 체험하는 한국은 같기도, 다르기도 할 것이다. 이루고 싶던 소원의 일부라도 지금쯤 이루어졌고, 또 이루고 있다고 말씀해줄 수 있다면 더없이 흐뭇해지는 대신, 그 반대라면 다만 묵묵히 침묵하고 싶다. 지금, 음악이 터무니없이 발랄한 작은 골목 앞에서, 우발적으로 마주친 동포의 어깨 짓이나 기침 하나에서라도 그런 기분을 느끼고 싶다. 그리고는 혼자 뇌까린다. “다 같이 잘 살아 봅시다.”

 

자못 우울한 듯이 기분을 흘려보아 송구스럽기도 하다. 내 자신에게, 그리고 내 기분과 공감했던 분들에게. 그래도 단 하루쯤은 이런 기분을 간직할 최저한의 자유 같은 것을 갖고 싶은 것이 사치한 잠꼬대만은 아닐 것이다. 그러기에는 여기에서의 생활이 긴박하고 역동적이고 찰나적이라고 변명을 하지도 않겠다. 묵묵히 그저 느끼면서 세월을 채워나갈 따름이다.

 

정해년이 밝을 무렵, 하늘은 잿빛이 되었고 비를 뿌리고 있다. 그 비는 소망이요, 거세되었던 욕망의 자연스러운 분출이겠다. 그리고, 이성적 논리로 되돌아와, 끝없이 낙관하고 끝없이 기분을 추스르는 시작이 되겠다. 외면하지 않은 원시적 충동으로 욕망하다 문득 가족을 그리는 설날이 다가왔음을 몸 속으로 느껴보았기에, 오히려 후련하다. 이러한 반추의 계절에 희망은 끝없이 재워지고 뚜렷해진다.

 

다시 덕담이다. 나에게, 가족에게, 그리고 이 구절을 읽고 있는 동포들에게…

 

“새해는 황금돼지해답게 잘 되고, 또한 잘 해봅시다”

 

2007. 02. 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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