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김영자의 혼인경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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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김영자의 혼인경위서
  • 동북아신문 기자
  • 승인 2007.01.31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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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5년 8월 25일, 나(김영자)는 길림성 연길시 있는 결혼 소개소에 인민폐 100원을 주고 결혼 소개소에 등록을 하였다. 그리고 그 곳에 있는 박00아주머니를 알게 되었다. 박씨는 나에게 이렇게 말했다.

“한국에 결혼으로 갈 의향이 있는지요? 며칠 후이면 한국에서 아저씨들이 오는데, 조건이 괜찮은 아저씨 한명이 옵니다.”

나는 소개인에게 한국에 가보지도 않고 어떻게 아느냐, 만일 조건만 좋다면 정식결혼을 하겠다고 하였다.


2005년 9월 3일 저녁, 소개인으로부터 연락을 받고 나는 백산호텔로 급히 떠났다. 그런데 그 곳에는 한국 아저씨들이 7~8명이나 있었다. 내 말고 찾아오는 여자들이 줄져 있었다.


소개인은 나를 데리고 다방으로 갔다. 다방에 도착하여 보니 한국인 박종수씨와 김00씨도 있었다. 김씨는 나에게 박종수의 가정을 이렇게 간단히 소개하였다. 본인은 경희대학을 졸업했고, 딸 셋은 출가하였으며, 24살짜리 아들은 군 복무를 마치고 자립하고 있다. 살고 있는 집은 아파트이고, 환경보호회사의 회장으로 일하고 있으며 아내는 세상떴고, 나이는 67세이다.


 내가 나이 차이가 너무 크다고 하니 김씨는, 오히려 한국아저씨가 꺼리지 않을까 걱정이다. 한국인들은 15~30살 차이를, 어리면 더 좋아할 것이라 하였다. 그리고 한국인이 묻는 말에만 대답하고 다른 말은 하지 말라고 하였다.


박종수씨는 나에게 나이와 자식, 그리고 남편과 직장에 대하여 물었다. 대답을 다 하고 나니 김00씨는 나더러 밖에 나가 있으라고 하였다. 그러면서  한국인들은 한번 오면 여러 사람을 만나 봐야하니 조금만 기다려 달라는 것이었다. 10여분 쯤 지나자 소개인은 나더러 들어오라고 하였다. 방으로 들어가 보니 미인 선발대회에서 선발되었다고 하였다.


그러자 박종수씨는 자기는 한국에 주말농장을 갖고 있는데 여러 가지 채소를 심으면 봄부터 가을까지 푸른 채소를 먹을 수 있고 등산도 할 수 있다고 하였다. 박종수씨가 나를 바래준다고 하니 소개인은 막아서면서 “오늘은 이만하고 내일 다시 만나”라고 하였다.


다음 날 박씨로부터 소개비를 가져왔느냐는 연락이 왔기에 나는 밤사이에 돈을 준비 할 수 없으니 여유를 좀 달라, 소개비가 얼마인가고 물었다. 그녀는 3만 5천원인데 처음에는 2만원 내고, 수속이 끝나면 나머지 1만 5천 원으로 두 번 나누어 지불해도 된다고 하였다. 내가 친척과 친구들에게 겨우 1만 5천원을 빌려서 갔더니 소개인은 5천원이 부족하니 안 된다고 하기에 나는 사정해서 나머지는 다음에 다 주기로 하였다. 소개인은 나에게, 만일 여자 측의 과실로 수속이 중단되면 반을 돌려주고 남자 측의 과실로 수속이 중단되면 계약금의 전부를 돌려주겠다고 하였다.


2005년 9월 6일 우리는 장백산관광을 하기로 하였다.

전 날인 9월 5일 새벽 3시경에 소개소 소장이 전화를 걸어왔다.

 “아줌마가 소개비를 너무 많이 냈습니다.”

이에 나는 “왜? 이제야 귀 뜀을 해줍니까? 전부 다 이자 돈입니다. 그러면 얼마를 내면 되는가요?”라고 물었다.

 “아줌마는 정식결혼이니 적게 내고 가도 됩니다. 김씨에게 전화로 연락을 하고 다시 협상을 하고 떠나세요.” 라고 하는 것이었다.

나는 급히 김씨에게 전화를 하였다. 김씨는 “아줌마 그 사람은 시간이 없는 사람이오. 관광버스가 곧 출발을 할 것이니 갔다 와서 다시 얘기 합시다”라고 하였다.


내가 답을 듣기 전에는 떠날 수 없다고 하자 김씨는 여행사에 맡기는 비용은 받지 않겠다고 하며 떠나갔었다.


9월 13일까지 장백산관광을 마치자 박종수씨는 소개인에게로 갔고 나는 연길로 돌아왔다. 박씨 아줌마가 전화를 해 와서 한국 아저씨가 준 목수건, 양산, 시계를 다 가지고 오라고 하여 나는 찾아갔다. 소개인 김씨와 박씨는 “돈 5천원이 대수요, 조건이 이렇게 좋은 분인데 이런 사람을 다시는 못 만날 것이오. 그리고 한국에서 닷새만 벌면 이 돈은 벌 수 있는데…“’라고 하였다. 나는 그 사람과는 이미 몸을 섞었고, 또 글공부를 많이 한 사람이니 막되어 먹은 사람은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 모든 것을 인정하기로 하였다.


2005년 9월 8일 용정에 있는 일본총영사관의 박물관을 가보고 당일 오후 지신 향으로 가서 항일 열사 고향집으로 가서 관광을 하였다. 그리고 도문시 개산툰에 있는 고향집까지 방문하면서 사진도 찍고 서로의 마음을 확인하며 교제를 하였다. 부모님이 진 빚을 갚기 위하여 한국으로 갈 생각이라며 나의 솔직한 마음을 다 털어놓았다. 어린 시절 양부모님을 잃고 고생하며 살아온 이야기도 하였다. 그러자 박종팔씨는 눈시울을 적시면서 나의 손을 잡더니 일단 한국으로 가면 빚을 갚는 일은 잠간이라고 달래주었다.

자기도 10여 년간 혼자 살면서 일본을 오가며 아이 넷을 키우며 고생을 한 일 등을 이야기하였다. 집은 빌라이며, 주말농장이 있고, 환경보호단체 회장을 맡고 있으며 3일 출근하고 월 50만원을 받는다고 하였다. 둘째딸이 부자여서 매월 50만 원씩의 생활비를 준다고 하였다.


이렇게 우리는 10일간의 교제를 통하여 서로를 알게 되었다.

 2005년 9월 14일 박종수씨는 귀국하였다.

귀국 후 자주 전화가  왔었는데  늘 “영자야, 한국에 오면 고향의 모든 것을 버리고 박씨 가문의 귀신이 되고 선조들의 두덤 곁에 묻힌다는 각오를 하고  오너라. 너에게 줄 돈 200만원과 일제 코트를 준비했고 50만 원짜리 휴대폰도 사놓았으니 중국에서 입던 옷은 한 벌도 가지고 오지 말거라.”고 하는 것이었다. 또 미용수술을 하라며 한국 돈 50만원을 보내왔었다. 얼굴이 예쁘면 취직하기도 쉽다는 말도 하였다. 내가 얼굴을 고치기 싫다고 하니 벌써부터 남편의 말을 듣지 않을 거면 한국으로 오지 말라고 하는 것이었다. 어쩔 수 없이 나는 수술을 하였다.


결혼서류를 마무리 짓고 나는 2006년 1월 7일 인천공항으로 입국하였다. 그리고 마중 나온 박종수씨를 따라 서울 마포에 가서 곧 본격적인 결혼생활을 하였다.


1월 9일 아침, 그는 집을 나서면서, 중국 조선족이라고 하면 민망하니 먼저 내려가라고 하였다, 이날 우리는 서울출입국으로 가서 외국인등록을 하였다.


다음 날 남편은 나에게 “영자야, 집이 비좁으니 큰 집으로 이사를 하자. 그러니 넌 1천만 원만 벌어 오고 중국의 빚은 나중에 천천히 갚자”고 하였다.


2006년 1월 10일, 저녁을 먹고 있는데 이렇게 짜증을 내는 것이었다.

 “야, 너 그 손으로 일을 할 수 있겠니? 못할 것 같으면 아예 중국으로 돌아가라.”

2006년 2월 7일, 남편은 나에게, 목동에서 만난 사람으로부터 전화가 왔는데 그는 러시아여자와 혼인을 했는데 한국에 와서 500만원을 받았고, 아이까지 입양해주는 조건으로 또 500만원을 받았다. 내가 아는 선배님이 있는데 아내가 병신질환자로 혼자 사는 사람이 있고, 후배 한 사람이 있으니 넌 중국에서 결혼할 사람을 소개하라. 그러면 100만원씩을 받을 수 있다, 고 하였다.


그러나 나는 그런 짓은 못한다고 거절하였다. 그러자 남편은 “너 일도 못하는데 나를 어떻게 벌어 먹일 거야?”하고 야단을 쳤다.


2006년 2월 8일, 남편의 후배 되는 사람과 공덕동에서 저녁식사를 하였는데 그 사람은 8월에 형님이랑 중국으로 가서 결혼할 여자를 만날 것이라고 하였다. 2006년 2월 18일, 나는 호텔 일을 찾아하다가 3월 13일에 일을 그만두었다. 그러자 남편은, 왜 일을 그만두었느냐? 나에게 의지하려고 작정을 한 거야? 니가 한국으로 오기 전에 쌀을 한 주머니 사면 몇 달을 먹었는데 입을 하나 덜면 그만큼 남는다고 야단을 쳤다.


2006년 3월 14일 월급을 못 받아왔다는 것과, 너 때문에 독거노인의 혜택을 못 받는다며 밤새도록 또 욕설을 퍼부으며 야단을 쳤다. 그리하여 월급의 4/1을 내놓으라는 각서를 쓰기도 하였다.

“나는 절대로 사람을 때리지 않는다. 꼴도 보기 싫다. 네 년이 있어도 나에게는 아무런 이득도 없다. 네가 나에게 해준 것이 무엇이냐? 이 병신 같은 년아!”하고 욕설을 퍼부었다.


2006년 3월 16일, 남편은 나에게 “숙식을 제공해주는 일자리를 찾아 하고 집 근처에는 얼씬도 하지 말라, 니가 있는걸 알면 독거노인의 혜택을 받을 수 없다”고 하였다.


3월 20일부터 파출부 일을 하게 되었는데 낮 12시부터 저녁 12시까지 하는 일이었다. 나는 메모를 남기고 나갔다. 저녁 늦게 퇴근하니 문이 남겨져 있었다. 나는 열다 못하여 경비아저씨의 도움을 받았지만 경비아저씨도 문을 열수 없었다.


3월 21일 남편은 열쇠를 쓸 줄 모른다며 트집을 잡았고, 안경을 발로 밟아 버렸다. 그리고는 “내가 오늘은 너에게 각서를 받아야겠다”하며 온밤 욕설을 퍼부었다.


2006년 3월 23일 중국에 있는 딸아이의 건강이 안 좋다는 급보를 받았다. 나는 남편의 허락을 받고 출국하였다.


2006년 4월 28일 남편으로부터 연락이 왔었다. 딸의 안부를 묻기에 나는 남편에게 도움을 청했다. “큰 병원으로 옮겨야 하는데 돈이 부족합니다. 조금만 도와주세요.”고 하자 남편은 바로 전화를 끊어버렸다.


2006년 5월 중순부터 나는 남편에게 집 전화와 휴대폰으로 계속 연락을 하였지만 받지를 않았다. 남편은 집 전화번호를 바꾸었기에 더 이상은 연락을 할 수 없었던 것이었다. 나의 딸은 출산으로 인한 후유증으로 정신질환의 일종인 조기치매라는 정신질환에 걸린 것이었다.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2006년 11월 8일, 나는 한국으로 입국하여 버스를 타고 마포까지 와서 지나가는 사람의 휴대폰을 빌려서 남편에게 전화를 하니 모르는 번호라서 그러는지 남편은 전화를 받았었다. “제가 한국으로 왔습니다.”라고 하자 대답도 없이 남편은 전화를 끊어 버렸다.


해질 무렵 오후 8시 30분경에 집근처로 와보니 너무도 추워 몸이 떨려났었다. 경비아저씨가 대신 남편에게 전화를 하였지만 받지 않았고, 10시가 넘어서야 남편은 집으로 돌아왔다.


남편은 이렇게 말했다.

“니가 고향으로 간 후 나는 바로 가출신고를 했다. 넌 두 달만 더 일하고 중국으로 돌아가거라. 호적은 이미 다 정리해놓았다. 입국할 때 공항에서 뭐라고 하지 않더냐? 이제는 네년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다. 네 년을 보기만 해도 구역질이 나니 꼴도 보기 싫다. 당장 이 집에서 나가, 너 때문에 난 독거노인의 자격도 없어져 혜택을 받지 못하고 있다. 그러니 이제부터는 집 근처에 얼씬도 하지 마라. 계좌번호를 줄 테니 매달 40만원씩 입금을 해야 해.”

 나는 남편에게 고향으로 갈 때 당신과 약속한대로 당신 곁으로 왔다고 하였지만 남편은 막무가내였다. 남편은 자기는 이미 모든 것을 깨끗이 정리하였으니 두 달만 일하다가 고향으로 돌아가라, 한국에는 돈만 주면 30~40대 여자들이 많다, 너는 내가 xx를 빨라고 하면 xx를 빨아야 하고 기라고 하면 기어야한다며 입에 담기 힘든 말로 욕설을 퍼부었다. 그리고 또 “이가 아픈 것도 다 네년 탓이다, 네가 있어도 내 집에는 아무런 이득도 없다”며 야단을 쳤다.


나는 남편의 목소리만 들어도 몸이 후들후들 떨리고 머리가 어지러워 났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힘이 풀려 매 맞는 것보다 더 힘들었다.


2006년 12월 1일, 남편은 나에게 전화로 남편의 아들과 함께 출입국으로 가서 외국인등록증을 연장하라고 하였지만, 부부가 함께 가지 않으면 연장을 할 수 없었다.


2006년 12월 31일 나는 남편에게 연락을 하였다. 남편은 지방으로 내려 온지 20일도 넘으니 만날 수 없다고 전화를 끊어버렸다.


그 후 지하철 합정역 근처에 있는 다방에서 남편을 만났다. 남편은 낯을 찌푸리고 이렇게 말했다.

“내 말 한마디면 경찰이 온다. 정리된 호적을 살리려면 500~600만 원이 필요한 줄 알지? 나는 변호사와 검찰 친구들이 있다. 변호사에게 물어보았더니 100만원은 너에게서 직접 받은 것이 아니기에 상관없다고 하더라.”

 

그래서 나는 어찌할 바를 몰라 올케네 집에서 지금까지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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