뜻 없는 여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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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 없는 여로
  • 동북아신문 기자
  • 승인 2007.01.2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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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성래의 시인마을소묘 <26>
시인의 길、 그 끝없는 여정에 서서

 
  백두산 아래 이도백하의 버스정류소에서 점심식사를 하는 중국 승객들. 오른 쪽에 서 있는 사람이 필자다.
그것은 처음부터 무리였는지 모른다. 영하 31도의 혹한 속에 백두산 뒷길을 돌아 장백현 가는 일. 눈 쌓인 꼬부랑길을 버스로 7시간 이상 달려가야 도달할 수 있는 곳. 그 계획을 실행에 옮기는 것은 생각만큼 쉬운 노릇이 아니었다.

우리가 처음 그 이야기를 꺼냈을 때 백두산 사냥꾼 박룡인 씨는 고개부터 옆으로 가로저었다. 이해하기 어렵다는 표정이었다. 이도백하에 와서 백두산 구경은 마다하고 굳이 오지인 장백현을 찾겠다니. 이 여행객들이 도대체 무엇하는 위인들인지 가늠이 되지 않는다는 태도였다. 고생을 사서 한다더니 쯧쯧. 그는 말리다 지쳐 끝내 일행을 버스정류소로 안내하고는 돌아섰다. 그로서는 아까운 손님을 놓치는 셈이었다.

버스정류소에서 일행은 점심을 먹고 차를 기다렸다. 장백현 가는 버스는 격일로 하루에 한 대밖에 없다고 했다. 정류소 실내는 텅 비어 있었지만 훈기가 돌았다. 눈 덮인 바깥 세상과는 딴판이었다. 일행은 들쭉술로 목을 축이며 한없이 느려터진 중국인들의 시간 개념에 적응하려고 애썼다.

낮 12시 30분. 마침내 버스가 도착했다. 연길에서 출발했다는 버스는 소형이었다. 눈길을 달려온 차량답게 차창마다 성에가 허옇게 끼어 있었다. 타이어에서는 물기가 질척거렸다. 지붕까지 짐을 잔뜩 실은 버스는 흡사 피란민의 수송차량을 연상시켰다. 내부를 보나마나 만원버스가 분명했다.

버스에서 우르르 승객들이 쏟아지더니 이내 정류소 실내로 왁자하게 들어섰다. 중간 기착지인 이곳에서 점심식사를 할 요량인 듯했다. 제각기 요리들을 시키더니 허겁지겁 먹어대기 시작했다. 정류소 안은 삽시간에 사람들로 북새통을 이루었다. 그야말로 '인간시장'이었다.

느리게 식사를 마친 기사가 운전석에 앉아 시동을 걸자 다시 승객들이 우르르 버스에 올라탔다. 그들이 제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버리니 이방인들의 자리는 있을 수 없었다. 안내양이 버스 통로에 널빤지를 걸쳐주며 거기에 앉으라고 했다. 아무려나, 서서 가는 것보다야 이것이 낫겠지. 일행은 그것도 '오감타' 여기며 편안한 마음으로 널빤지 위에 엉덩이를 붙였다.

버스는 눈길 위에서도 생각보다 잘 달렸다. 차창에 성에가 끼어 바깥 풍경을 못 보는 것이 못내 아쉬웠다. 비교적 뒤쪽에 앉은 일행은 중국인들의 짐짝과 한데 뒤섞여, 차가 덜컹대는 만큼 몸을 덜컹댈 수밖에 없었다. 사람이 짐짝인지 짐짝이 사람인지 도무지 구분이 안 되었다. 더구나 버스 안에서 사람들이 마구 담배를 피워대는 바람에 숨통이 막힐 지경이었다.

괜히 이 코스를 택했나? 그냥 편안히 이도백하에 눌러앉아 백두산 사냥꾼의 사냥 이야기나 들으며 하룻밤 지샐 걸. 은근히 마음 속으로 후회가 되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이 코스는 '눈길을 간다'는 의미 외에 별다른 뜻이 없었다. 옛날 북간도에서 삼수 갑산을 오갈 때 이 길을 택했으리라 짐작되지만, 그나마도 지금은 국경선이 가로막혀 마음대로 왕래할 수 없는 형편이 아닌가.

뜻 없는 여로. 그것이 어쩌면 시인의 길인지 모른다. 화려한 대중적 인기도 없고, 남달리 돋보이는 권위도 누리지 못하면서 늘 새로운 상황을 모색하고, 그 허허로움에 절망하고. 자본주의 체제에 편입되기에는 어딘가 모르게 굼떠 보이고 2% 부족한 사람들…. 그들이 시인인 듯하다.

그러나 우리 시인들이 삶의 진실을 노래하지 않는다면 이 세상에 무슨 아름다움이 남겠는가. 그나마 고생스런 여행길에서 인상 깊은 풍경 하나 마음에 주워 담듯, 오늘도 열심히 시를 쓸 일이다.

시인 casscho@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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