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 저녁, 두꺼운 점퍼 차림의 이정호 신부를 만났다. 그는 경기도 마석의 가구공단 안에 있는 성공회교회의 주임신부다. 신자는 60여명에 불과하나, 교회에 안 나오는 그 동네 외국인 노동자 1700여명에게도 ‘파더(Father)’로 통한다.
그는 서울 교회에서 농성 중인 불법체류 노동자들을 돕는 당번 순서가 돼 올라왔다. 교회의 좁은 마당에는 천막 3개가 세워져 있었다. 그 남은 틈 모서리에서 몇몇 불법 체류자들이 족구를 하는 중이었다. 바깥 세상에 불고 있는 단속의 찬바람을 잠시 잊은 듯했다.
이 광경을 지켜보며 이 신부가 “얼마 전 동네병원에서 급한 연락이 왔어요”라며 입을 열었다. 어느 때를 불문하고 “파더! 사고 났어”라고 부르면 자다가도 벌떡 뛰어가는 그였다. 그날도 그랬다. 병원에는 한 외국인 노동자가 바싹 마른 젓가락처럼 누워 있었다. 온몸의 피부에는 허옇게 각질이 일어나 있었다. 에이즈 말기 증세였다. 죽어가는 그를 데리고 나와 숙소에 눕혔다고 한다.
이 에이즈 걸린 불법체류자를 고향으로 돌려보내려고 할 때부터 전쟁이 시작됐다. 그는 국립보건원·보건복지부·법무부 출입국관리사무소에 “이 친구를 제발 데려가세요”라며 부지런히 연락했다. 적어도 담당공무원이 나와 앰뷸런스를 불러 데려갈 것으로 기대했다.
“돌아온 답변은 ‘이왕 했으니 신부님이 계속 알아서 해달라’는 것이었어요. 그렇게 할 인력이 없고 또 수용시설이 꽉 차 어디 둘 데도 없다는 겁니다. 불법체류자를 단속할 인력은 있고 데려갈 인력은 없다니 우습지 않습니까. 출입국관리사무소의 문 안으로 이 에이즈 걸린 친구를 보란 듯이 확 던져 넣고 싶었어요.”
결국 그는 혼자서 애를 끓이며 운신조차 어려운 에이즈 환자의 기력을 일시 회복시키기 위해 링거를 맞혀야 했고, 임시 여행자 증명서를 발급받느라 뛰어다녔고, 고향으로 보낼 비행기 티켓을 구해야 했다.
이 순간에도 그는 참고 관용해야 하는 성직자의 본분을 떠올려 “요즘 정부가 하는 걸 보면 기막히는 쇼를 관람하는 것 같아요”라며 비유의 묘(妙)를 잃지 않았다.
“내가 사는 마석 가구단지에 세 번 단속이 있었어요. 승용차 타고 단 2명의 단속반이 나오는데 700명이 달아나는 장면을 상상해 보세요. 절로 웃음이 나오지 않습니까. 처음엔 가구단지에서 연기가 피어오르지 않다가 제조업체 단속을 연말까지 유예한다는 정부의 쇼가 한번 펼쳐지자, 다시 공장 연기로 앞이 안 보여요. 세상 물정 잘 아는 사장들은 ‘정부가 그래 봐야 별거 아니라고 했지’라며 으스댑니다. 똑같이 힘들게 노동하는데 식당이나 공사판에서 일하는 친구들만 잡으려는 것도 웃지 못할 쇼이지요. 지난 번 수백명의 합동단속반이 열흘간 전국을 뒤졌지만 정작 잡힌 숫자는 1200여명이었습니다.”
우리는 농성 텐트 안으로 들어갔다. 난로도 있고 침낭도 있었다. 자기네들끼리 정한 식사당번 순서표도 붙어 있었다. 그러나 텐트는 일할 수 있는 공장도, 안식할 수 있는 고향집도 아니다. 한 여성 노동자가 앉지도 눕지도 못한 어정쩡한 자세로 우리 쪽을 쳐다보았다. 그런 어중간한 몸짓으로 이 땅에서 언제까지 세월을 보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정부가 원칙대로 하겠다면 이 친구들을 마지막 한 명까지 추적해 모두 내보내야 합니다. 그게 가능할 리 없겠지만요. 설령 그렇게 되면 그때야말로 수용시설이 없어 정말 난리가 납니다.”
이번 주부터 정부가 또 합동단속에 들어갔다. 에이즈 걸린 불법체류자 한 명을 처리하지 못하면서 그 많은 숫자를 어떻게 감당하려는지. 정부가 쇼를 벌일 때마다 살기 힘든 세상은 공연히 시끄럽다. 차라리 제 발로 이 땅을 떠나도록 경품(景品)을 내거는 쪽이 정부 체면을 덜 잃는 방법이 아닐까.
(최보식 사회부차장대우 congchi@chosun.com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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