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문학박사, 수필가, 국어학자,
언덕 위의 집
<신길우 수필 ④>
시골의 작은 도시에 한 소년이 있었다. 그 소년은 언덕 아래에 자리한 마을에서 살았다. 그의 집에서는 서쪽으로 좀 멀리 떨어진 언덕이 바라다 보였는데, 그 언덕 위에는 이층집 한 채가 서 있었다.
그런데, 그 언덕 위의 집에서는 아침이면 한 줄기 빛이 찬란하게 반짝이곤 하였다. 크지는 않았지만 언제나 햇빛처럼 빛났다. 그리고 그 빛은 한참을 지나야만 사라졌다. 하지만, 그것이 무슨 빛인지, 왜 항상 아침이면 반짝이는지는 전연 알 수가 없었다. 다만, 빛을 보게 될 때마다 감탄하며 ‘참 신기하고 멋진 집이다’라고 생각하곤 하였다.
또한, 밤이 되면 그 집에서는 유난히 밝은 불빛이 흘러 나왔다. 그 불빛은 가장 밝은 별보다도 더 크고 밝았다. 하지만, 그 불빛도 무엇인지, 왜 밤에만 나타나는지를 알 수 없었다. 다만, 날마다 밤이면 불빛을 반짝이고 있는 언덕 위의 집이 동화(童話) 속의 집처럼 황홀하게만 바라보였다. 그래서 소년은 언덕 위의 집을 바라볼 적마다 이렇게 생각하였다.
“저런 집에서 살면 얼마나 행복할까? 단 하루라도 저런 집에서 살아 보았으면…….”
하지만, 소년은 그 언덕에 가 보지는 않았다. 물론 그 집을 방문한 적도 없다. 가기가 싫어서가 아니고, 또 일부러 찾아갈 일도 없었다. 마을 사람들도 가는 것 같지 않았다. 다만, 호기심도 일고 궁금증도 생기곤 했지만, 그냥 시간이 흘러간 것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 집에 다른 사람이 새로 이사를 왔다. 자기 또래의 소년도 있었다. 소년은 그와 친구가 되었고, 그래서 놀러갈 기회가 생겼다.
소년은 도착하자마자 친구가 쓴다는 이층 방으로 올라가 보았다. 날마다 무엇이 아침저녁으로 빛을 냈을까?
그러나, 둘러보아도 신기한 것이라고는 아무 것도 없었다. 평범한 구조(構造)와 일상의 가구(家具)들이 놓여 있을 뿐이었다. 다만 유리창이 큼직한 것이 좀 특별하다면 특별하다고 할 수 있었다.
소년은 실망한 마음으로 유리창가로 가서 밖을 내다보았다. 거기서는 언덕 아래로 마을이 빤히 내려다보였다.
그런데 거기에, 자기 집과 마을이 황혼으로 붉게 물들고 있는 것이 아닌가! 지붕이며 벽이며 주변의 나무들까지도 붉게 물들어서 한 폭의 멋진 그림처럼 보였다. 점차 붉은 기운이 사라지며 어둠이 깔리자 이번에는 집마다 방마다 불이 하나 둘 켜져서 마치 밤하늘의 별들처럼 반짝였다. 이 모든 것이 자기 집에서 이 언덕을 언덕 위의 집을 바라볼 때보다 훨씬 더 아름답고 멋지게 보였다.
한참을 내려다보고 있던 소년은 놀라움으로 가슴이 뛰었다. 언덕 위에서 바라보이는 자신의 집과 자기 마을이 그렇게 아름다운 줄을 몰랐던 것이다.
“내가 저렇게 아름다운 곳에서 살고 있었다니…….”
물론 이것은 이야기일 뿐이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은 이 이야기 속의 소년처럼 자신의 처지가 얼마나 다행(多幸)이고, 자기가 얼마나 행복한가를 알지 못하고 살아간다. 때로는 언덕 위의 집에 가 보기 전의 소년처럼 자신과 자기 마을이 남만큼 좋은 처지가 아니라고 여기고, 항상 언덕 위의 집만을 바라보며 부러워만 하는 사람들도 있다.
여행을 할 때에도 같은 생각을 가질 때가 흔히 있다. 바라보이는 모든 모습이 다 아름답고 멋지게 느껴지는 것이다. 바다와 언덕이 어울린 해안 풍경은 물론, 차창(車窓)의 농촌 풍경도 하나같이 아름답게만 보인다. 산들이 겹겹으로 포개닌 산골이나 어둠 속에 불빛이 깔린 도시 풍경을 보게 될 때에도 “야! 멋지다” 하고 감탄을 한다. 때로는 “이런 데서 살아보았으면…” 하고 바라기도 한다.
어쩌다가 외국에라도 나가게 되면 이런 느낌은 더 강하게 나타난다. 이어지는 현장의 이색적(異色的)인 풍경에 연신 탄복하기도 한다. 잠시 지나며 겉으로 나타나는 아름다움만을 바라보기 때문이다. 한결같이 꿈과 낭만과 편안함과 즐거움만을 연결한다.
하지만, 눈으로 보는 세계와 실제로 겪는 세상은 서로 다르다. 또한 사물은 처지와 상황에 따라서도 달라진다. 이쪽에서 보면 저쪽이 더 나아 보이지만, 저쪽에서는 이쪽을 더 좋은 곳으로 생각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쪽의 여건을 불평하고 자신의 처지에 불만만을 가질 필요는 없다. 또한, 저쪽만을 바라보며 무조건 부러워만 할 일도 아니다. 때로는 저쪽에서는 이쪽을 부러워하고 있을 수도 있는 것이다.
따라서, ‘무지개를 쫓는 소년’처럼 아름다운 무지개만 따라갈 일은 더욱 아니다. 언덕 아래에서는 언덕 위의 집이 아름답지만, 언덕 위에서는 이쪽이 더 아름다울 수가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행복(幸福)이란 멀리 있는 것이 아니다. 무지개처럼 항상 저쪽에 있는 것도 아니다. 행복은 바로 내 마음속에 존재하는 것이다. 그리고 행복은 바로 내가 행복하다고 여기는 마음에서 피어나는 것임을 생각해 볼 일이다. ☺
시어머니과 며느리 --- 오해와 이해
<신길우 수필 ⑤>
어느 시어머니가 출가한 딸네 집을 방문하려고 집을 나서게 되었다.
그러자, 배웅을 하던 며느리가 이렇게 말을 하였다.
“어머님. 이틀 밤이나 사흘 밤만 주무시고 바로 오시지요.”
신을 신던 시어머니는 이 말을 듣고 기분이 좀 언짢아졌다.
며느리가 들어온 뒤 처음으로 자고 올 길을 나설 때에도 며느리가 그렇게 말하였었다. 그리고, 이런 일이 몇 차례 반복이 되었었던 것이 생각이 났다. 무심히 넘겨들었던 며느리의 말이 오늘은 시어머니에 대한 며느리의 간섭으로 느껴졌다.
그렇게 생각이 들자, 시어머니는 화가 살살 피어올랐다.
‘건방지게스리…….’
마음이 상한 시어머니는 신을 신고 일어나서는 며느리의 얼굴을 빠안히 쳐다보았다. 그리고는, 나직한 목소리로 물었다.
“내가 어딜 갈 적마다 꼭 몇 일 밤만 자고 오라고 하는데, 그게 무슨 말이냐?”
그러자 며느리는 가만가만 이렇게 대답하였다.
“어머님께서 계시지 않는 동안 저희들은 마음대로 지내게 되고, 그게 오래 계속되면 도리어 편하게 느껴지게 되어서 어머님을 모심에 행여 마음이 달라질까 해서입니다. 그래서, 몇 일만 묵고 오시라고 말씀을 드린 것입니다.”
순간, 시어머니는 부끄러움으로 얼굴이 확 달아올랐다.
‘이렇게 현면한 며느리를 내가 몰라보다니…….’
시어머니는 어쩔 줄을 몰라 하다가, 이렇게 변명처럼 말을 하였다.
“그래. 그 말이 옳다. 그리고, 너무 오래 있으면 그 애들도 부담스러울 수가 있겠지.”
시어머니는 허둥대며 집을 나섰다. 그러면서,
‘며느리 하나는 참 훌륭한 아이가 들어왔구나.’
하고. 몇 번이나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속으로 이렇게 중얼거렸다.
‘맞아. 사람이란 아쉬울 때 헤어질 줄을 알아야지. 그래야만 언제나 보고 싶게 되고, 또 반가울 수가 있는 것이지.’ ☺
어느 노인의 유언
<신길우 수필 ⑥>
80세를 넘겨 산 한 부자 노인이 죽었다. 그는 재산도 많아 남부럽지 않게 살았었다. 건강도 죽기 전까지 좋았고, 봉사활동도 많이 해서 사회적으로 명망도 어느 정도 받으며 살았다. 자녀도 서넛이나 두었는데, 모두들 여유 있게 살고 사회적 신분도 좋았다.
그런데, 그는 대부분의 유산을 자신의 후취에게 주었다. 집에서 기르던 개에게도 상당한 액수의 재산을 남겼다. 자녀들에게는 별로 주지 않았다.
그러자, 자녀들이 이에 반발하였다. 다른 사람들도 어떻게 그럴 수가 있느냐며 그렇게 유언한 노인을 비난하였다.
“늙은이가 망령이 들었지.”
“후처한테 쏙 빠졌던 거야.”
“젊은 마누라 마술에 걸려든 거지.”
“후취로 들어갈 때부터 꾸민 계략에 걸렸어.”
특히, 기르던 개한테도 막대한 돈을 준 것에 대해서는 많은 사람들이 의아해 하였다. ‘자식들이 개만도 못하게 되었다’고 비아냥거리기까지 하기도 하였다.
그 노인이 70세가 넘어서 아내가 죽고 몇 달이 지나지 않아서 30대의 젊은 여자를 후취로 맞아들일 때에도 사람들은 말이 많았었다. 그때 그는 몸이 불편하지도 않았고, 옆에서 간호해 줄 만큼 병고로 시달리지도 않았다. 그러므로, 더욱 많은 사람들이 입방아를 찧었었다.
“늙은이가 주책이지, 그 나이에 무슨 재취야.”
“아마 기운이 넘쳐나는가 보지?”
“그래도 그렇지, 어떻게 젊은 여자를 맞아들여.”
“막내딸보다도 더 젊어요, 글쎄.”
“재취를 하더라도 분수가 있어야지.”
그러면서, 모두들 젊은 여자가 틀림없이 재산을 노리고 들어간 것이라고 생각하였었다. 지금 그것이 현실로 나타났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들은 많은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다정한 부녀처럼 서로 재미있게 살았다. 그렇게 그들은 10년을 넘게 살았던 것이다.
그런데, 80세가 넘어 죽은 그의 유서에는 자식들에게 주는 이런 내용이 들어 있었다.
“너희들은 나와 가장 가까운 나의 자식들이다. 그래서 너희들은 지금까지 오래 동안 내게서 많은 혜택을 받으며 살았고, 현재도 남부럽지 않게 살고 있다. 물론, 가장 많은 유산을 상속받을 자격이 있는 나의 혈육들이다.
하지만, 생각해 보아라. 내가 괴로울 때 누가 진실로 위로해 주고, 내가 아플 때 누가 지켜보며 함께 아파했었는가? 울적할 때 마음을 풀어주고, 심심할 때면 함께 놀아준 게 누구였더냐?
너희들은 아느냐? 예쁜 꽃 한 송이가 얼마나 즐겁게 하는가를. 정겨운 노래 한 가락이 어떻게 가슴을 뛰게 하는지를.
정(情)은 외로울 때 그립고, 고마움은 어려울 때 느껴진다. 그러므로, 행복할 때의 친구보다 불행할 때의 이웃이 더욱 감사한 것이다. 병석의 노인에게는 가끔 찾는 친구보다 늘상 함께 지내는 이웃이 훨씬 더 고마운 것이다. 한창일 때의 친구들이 재롱을 피우는 귀여운 자식들이라면, 늙어서의 이웃은 내 어린 시절의 부모와 같은 분들이다. 그러므로, 내게 있어서 너희들은 친구라 할 수 있고, 너희들의 젊은 계모와 검둥이는 내게는 부모와 같은 존재들이라 할 수 있다. 내가 왜 친자식인 너희들에게보다 나의 젊은 아내와 우리 개에게 대부분의 유산을 물려주었는지를 이제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면서 그 노인은 이런 말을 덧붙였다. 젊은 아내가 못된 계모로 살아도 내게는 가장 소중하고 고마운 분이다. 설령 유산을 노리고 들어왔다 하더라도 그가 내게 잘 하는 이상 내게는 그것이 별로 문제가 되지 않는다. 다만, 그들이 내 인생의 가장 괴롭고 힘없고 외로운 마지막 시기를 그래도 살맛이 나게 하고 위안을 받으며 살 수 있게 해 주었다는 사실을 기억하기 바란다.
힘없이 외로이 사는 노인에게는 어떻게 해주는 것이 가장 필요하며, 어떤 사람이 진실로 소중한 사람인가를 다시금 생각하게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