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이야기> 디아스포라는 유대인 보다 먼저 중국의 화교들께서 배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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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이야기> 디아스포라는 유대인 보다 먼저 중국의 화교들께서 배우자.
  • 동북아신문 기자
  • 승인 2006.12.29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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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이야기>
디아스포라는 유대인 보다 먼저 중국의 화교들께서 배우자

필자는 좀 전에 중국 운남성 서남부 누강(怒江) 일대에 가서 몇몇 소수민족들을 둘러보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그들 속에 들어가 만나보면 거의 다가 순박했고 낙천적이며 근로소박한 중화민족의 일원으로 살고 있다는데 수궁이 갔다.
그런데 필자가  느낀 안타까움은 그들은 정부에서 버덕(들판)에 내려와 살라고 보조까지 주는데도  기어코 산발을 타고 척박한 천길 벼랑에 올라 삶의 보금자리를 트는 것이었다. 이들은 부락민으로서의 정체성과 고향의 보금자리를 지킨다는 민속 전통성에는 찬양 받을지는 몰라도 어찌 보면 한평생 그 협곡 벼랑에 매달려 가난의 때를 벗지 못할 것이라는 슬픈 생각이 아쉬움으로 남는다.
그런데 참 다행으로 생각되는 것은 같은 중화의 소수민족으로서 우리 조선족 들이 늦게나마 시대에 눈을 뜨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즉 중국의 55개 소수민족 중 경제 의식 개방에서 보다 앞장에 섰다는 점이다. 비록 중국의 주체 민족인 한족보다 시간적으로 많이 뒤쳐있지만  우리 조선족은 지금 관내로, 외국으로 보다 나은 삶을 찾아 뛰쳐나가고 있다.

현재 중국 조선족은 한국에 22만여 명, 일본에 5만여 명, 여기 미국에도 3-5만으로 예상된다. 하여튼 “피는 못 속인다."고, 아이러니하게도 먼저 디아스포라로 나선  한인들이 어디에 가 있으면 그곳에 따라서는 것이 조선족이다.  동남아는 물론, 유럽증동, 아메리카, 세계 어느 곳이던  간에 많게, 적게 조선족들이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물론 조선족은 해외진출은 미약하여 절대 다수가 자유 이민정착까지는 가지 못하고  해외 돈 벌이와 유학 중심에서의 진출 주류이다. 이런 중국 조선족의 이동은 이미 30만을 넘어 섰다.
이 일로 중국 땅에서 우려의 목소리도 있다. 그러나 동포사회가 무너질까 겁낼 필요는 없다. 몸은 가도 마음은 어디까지나 고향에 있을 것이다. 이미 100여년을  넘어 중국 동북을 중심으로 형성된 조선족의 거미줄 같은 친인척과의 혈연(血緣), 지연(地緣), 업연(業緣)등 관계들은 끊을 내야 끊을 수 없는 것이다.

현재 조선족의 대외 진출은 아직 첫 시초로서 미약하지만 이런 흐름과  해외 이민자 영략도 마땅히 장성 발전 되어야한다. 필자는 이것은 시간문제로 보며  시간의 흐름에 따라 기필코 변화 발전 할 것이라는 전망이다.
이에 우리 동포 사회도 마음 문을 활짝 열고  세계적으로 영향을 미쳐가고 있는 유대인들의 디아스포라  이민사를 배워야 한다, 그리고  그에 앞서서 먼저 눈길을 우리의 주변에 돌려야한다.
멀리 말고 우리들에게 본으로 될 수 있는 중국 한족(漢族)들의 해외진출에서 배우자는 말이다.
중국화교들의 형성 역사를 보면 이미 600년이나 된다.  중국의 한족들이 이미 6세기에 걸쳐 고향을 등지고 과감히 뛰쳐나갔던 것이다.

중국 명나라황제 영락제가 1405년 환관이며 대항해가인 정화(鄭和)에게 62척의 대형 상선(약 8천 톤급 배들)들을 거느리고 동남아세아와 서남아세아, 그리고 중동을 거쳐 저 멀리 동부 아프리카까지의 새로운 항로를 개척하게 하였다.
이는 그 후 90년이 지나서 대항해를 시작한 유명한 유럽의 콜롬보스 보다 시간적(1492년 첫 항해)으로 앞섰을 뿐만 아니라 배의 크기나 함대 수는 비교도 안될 만큼 크고 웅장한 선대의 행렬이었다.  콜롬보스의 배는 150톤급에 불과(길이 23m, 너비 7.5m)했고,   선원들도 도합 90명이였으나 정화의 상선은 52배도 넘는 큰 배에 선원만도 2만7천 8백여 명이였다.

정화가 이끄는 상선들은  7차례에 걸쳐 해외 원정을 성공시킴으로서 당시 중국은 해외세계와의 문물교류가 활발해지고 서로 왕래하면서 중국인들의 시야를 넓혔으며 그 후부터 중국인들이 계속 동남아를 중심으로 널리 이민의 길을 펼쳐 나갔던 것이다. 이것이 오늘 5천 7백만에 이르는 중국 화교들의 이주의 시발점이었으며 중국인 화교의 이민 계기로 된 것이다.

필자는 현재 미국 땅에서 간혹 이런 생각을 가져본다.
당시 중국의 정화가 콜롬보스 보다 먼저 대항해를 시작했는데 그때 아메리카 땅을 발견하고 중국기발을 꽂았더라면 오늘의 미국은 어떠하였을 것이고 또 세계의 흐름은 엇떠 하였을까?
그런데 하늘은 중국인에게 그런 복을 주지 않았다.

중국은 그 후 계속하여 1880년대 초 아편전쟁과 2차 세계대전을 걸치며 더 많은  한족들이  동남아세아를 중심으로 세계도처로 퍼져 나갔다. 그리고 해외로 나간 중국의 한족들은 해외에서 점차 방대한 화교권을 형성하였다. 이들이 지금 동남아와 세계 도처에서 화교권 네트웩을 형성되어 막강한 부를 축적했다, 이들은 현재 2-3조 억에 달하는  경제력을 이루어  중국의 개혁 개방에 큰 몫을 담당하고 있다.

2천년 말까지 중국의 외자기업 2만8천여 개 중 중국 화교 투자기업이 1만 6천5백여 개로서 총투자 기업의 약 60%를 점했었다.
중국의 개혁개방의 총 설계사 등소평이 13억 대국의 개혁개방에서 먼저 중국의 선전, 주해, 하문, 상해 등 남부 연안 도시를 경제특구로 만들고 1차로 문을 연 것도 이들 화교들을 보아냈기 때문일 것이다.
중국 화상들의 경제력은 이미 원만한 나라의 국가 경제력을 초과했다.

그 외도 중국화교들은 해외를 누비면서 세계적인 안목으로 경쟁의식을 키워와 정치, 경제, 문화, 과학, 위생 등 면에서 보다 세계적이며 자유롭고 문명스러움을 나타내고 있다.
오늘 세계에서 중국화교는 무시할 수 없는 “거인”으로 되었으며 또한 우리들의 선생이기에 손색이 없다.
중국 조선족들도 이젠 분발 할 때가 되었다. 좁을 울타리를 벗어나 해외로, 세계로 나가야한다. 역사 기록에는 언제나 떠나는 자와 남은 자들이 있기 마련이다. 그리고 이들이 서로 손잡고 고향과 민족을 춰 세워야한다.

최민/동북아뉴스 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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