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한국에 살려고 입국한 신00입니다. 2004년 7월 23일, 남편 외숙모님의 소개로 처음 만나 알게 되었는데 그 자리에서 우리는 혼인을 약속하였습니다. 2005년 1월 22일, 중국 심양에서 김해국제공항을 통해 입국하였습니다. 입국 7일이 지난 뒤 남편은 직장 때문에 서울로 올라가게 되면서부터 우리는 별거생활을 하게 되었습니다.
저는 김해에 계시는 시부모님과 같이 생활하게 되였고, 온갖 집안일을 맡아 하였습니다. 신혼인 생활은 제가 생각했던 것과는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고, 이로 인해 매우 힘들었습니다. 낯선 한국 땅에 와서 낯선 시댁식구들과 생활하여야 했으며 믿고 의지할 남편마저도 멀리 떨어져 한 달에 두세 번밖에 만날 수 없었고, 꿈꾸던 신혼의 즐거움과 행복은 물거품이 되어버렸습니다.
200평이나 되는 정원주택이었으므로 매일 구석구석 청소하기도 힘들었고 시댁식구(시부모, 시누이, 시누남자친구, 시동생)들의 옷을 세탁하는 것만으로도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다가도 조금 잘못해도 시어머니의 잔소리를 들어야 했습니다. 화장을 안 하거나 양말 안신어도 말 듣고, 집안에서도 자유가 없었습니다. 말로만 며느리지 실제로는 식모파출부와 다름이 없었습니다.
남편도 그렇고, 용돈 한 푼도 안 줍니다. 아무리 집에만 있다 해도 여자로서 필요한 것도 있고 하는데 너무 합니다. 억지를 부려 저는 지난 9월 20일 경기도 평택으로 와서 월세 방을 얻었습니다. 평택에는 작은 시누와 그의 남자친구가 살고 있었는데, 시누와 같이 있으면 서로 의지가 되고 식구끼리 도울 수도 있고, 또 자기 있는 곳에는 자리가 잡히지도 않았다며 남편이 얼리는 것이었습니다. 이렇게 남편과의 별거생활은 계속되었습니다.
남편은 주말마다 평택으로 한 번씩 내려오고 저는 평택에서 직장을 다녔습니다. 그리고 퇴근하고 나서는 시누집의 가사도 맡아하였습니다. 물론 본의보다는 시어머니의 지시에 따른다는 것이죠. 더 황당한 것은 취직할 때 시누가 저보고 외국인은 통장을 만들 수 없다고 거짓말을 하여 월급을 아예 자기 오빠통장으로 입금하게 하였습니다. 한국에 온 시간도 짧고 이런 문제도 잘 모르는 저는 그렇구나, 하며 따르게 된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직장생활하면서 2005년 9월 23일~2006년 1월 30일까지의 월급 근 500만 원을 한번 만져보지도 못하고 전부 남편의 명의로 된 통장에 빠져 들어갔습니다. 평택에 있을 때 남편은 매달 3~4만원의 생활비 밖에 안 주었습니다. 친정이 그리운데 가지도 못하고 부모님 초청도 해주지 않았습니다. 인간으로서 자유가 없고, 집안 정리 해주는 기계에 불과하였습니다. 더 이상 남편과 살 수 없었습니다. 제가 어떤 사람처럼 한국국적을 얻기 위해 한국에 시집 온 것도 아니고, 좋은 사람 만나 행복하게 살겠다고 왔는데 이게 뭡니까?
2005년, 구정 전에 저는 남편과 격렬한 말다툼을 하게 되었는데 제가 이혼하자는 말을 꺼냈더니 남편은 “다시 이혼이란 말을 꺼내면 칼로 찔러 죽여 버리겠다.”고 위협하였습니다. 겁에 질린 저는 2월 28일 가출해서 서울로 올라왔는데, 남편과는 지금까지 연락을 취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서울조선족교회 인권센터 정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