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소평은, “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쥐만 잘 잡으면 좋은 고양이다”라고 했다. 개혁개방의 大정책 전환이 단 한 줄의 말에 압축되어 나타났다. 그리고 20여년이 흘렀다. 중국은 이념투쟁에서 실리획득으로 확실하게 돌아섰다.
2400여년 전에 명가(名家) 학파가 “흰 말은 말이 아니다(白馬非馬)”라는 언명을 제기하였다. 게다가, 흰 말은 말이 아니라고 하다가도 어느 한 순간에는 가끔 특별한 논리로 검은 고양이가 곧 흰 고양이라는 것을 증명해내군 했다.
명가의 대표적 인물로서 혜시(惠施)가 있다. 장자는, “혜시의 능력을 천지의 입장에서 본다면 그것은 단지 모기나 등에의 끊임없는 움직임과 같을 뿐이다. 그것이 어디에 무슨 도움이 있겠느냐?”고 확실하게 부정했다.
중국의 보편적 정서는 궤변을 묵살하는 쪽이었고, 역사의 흐름 속에서 큰 맥락을 이루며 지금까지 이어져 오고 있다. 실질적 삶에 도움이 되지 않으면 취하지 않는다는 자세, 이것이 중국의 전통이다.
그래서 등소평은 전제를 달았다. 일단은 쥐를 잘 잡아야 한다. 이러한 전제만 만족되면 가치論적으로 좋은 고양이다. 흰 것이든 검은 것이든 상관이 없다. 현실적 의미에서, 가장 큰 방향은 물질적 풍요를 지향하는 것, 그것이 바로 “쥐잡기”의 핵심이다.
요새의 가치론은, 좋은 고양이의 조건으로 쥐잡기만 강조하던 데로부터 더 구체화 되고 있다. 흰 고양이와 검은 고양이를 따지기 시작한 것이다. 명가는 흰 말이든 검은 말이든 먼저는 말이라는 대 전제를 강조하지 않았기에 부정당했다.
그러나 검든 희든 먼저는 보편성으로서의 고양이의 능력 중 쥐잡이를 수긍하고 난 후에는 털의 색상에서 오는 변별성을 긍정해야 할 때가 있다.
작게는 자아와 타인 사이의 “같음”의 보편 대전제와 각자의 특수성으로서의 “다름”을 긍정하는 것으로 시작해볼 수 있다. 좀 더 범주를 넓히면 조선족 내부 문제에서, 또 범주를 더 넓히면 백의민족 내부에서의 조선족과 한국인, 이런 식으로 접근할 수 있다.
“나는 맞고 너는 틀렸다”가 아니라 “너와 나는 대부분 영역에서 같고 일부는 다르다”는 것, 이것은 다름에 대한 겸허한 긍정이다. 이런 분별의 근저를 깔고 나서야 많은 것을 더 논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니까, “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쥐를 잘 잡으면 좋은 고양이고, 흰 고양이는 또한 흰 고양이, 검은 고양이는 또한 검은 고양이”라는 긍정이 있어야 할 것이다.
조선족과 한국인은 화합의 장에서 먼저는 "같음"을, 그 다음 "다름"을 솔직히 인정하고 난 후에야 무엇이든 같이 도모할 수 있고, 시너지 효과를 낼 수 있을 것이다.
우리 모두에게 이런 다각적이고 긍정적인 사고방식이 필요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