흑룡강성 감남현 흥4촌의 면모.
흑룡강성 감남현 하진 흥14촌은 워낙 빈한한 산동 이민촌이였다. 다년래 당지부서기 부화정의 인솔하에 간고하게 창업하고 악전고투하여 《농》자를 둘러싸고 문장을 지어냈다. 그들은 현대농업발전을 경로로 인간과 자연이 조화발전된 경제산업화길을 개척하였으며 편벽한 시골을 35개 기업소에 1800여명의 종업원, 10여억원 총재산을 가진 《룡강제1촌》으로 건설하였다.
한사람도 빠뜨리지 않고 공동히 부유의 길로
눈꽃이 흩날리는 흥14촌거리를 거니노라니 눈앞에 펼져진 널직한 건물들이며 평탄한 콩크리트길, 아름다운 화원식 별장, 전람관, 문화원, 록지들이 한데 어울려 극도시의 짙은 정취를 풍기고있었다. 흥14촌의 당지부 부화정서기는 기자에게 올해 흥14촌은 인구당수입이 1만 3000여원이고 전 촌 촌민들은 도시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의료, 교육 등 무료대우와 복리대우를 받을수 있게 되였으며 생활에 보장이 있게 되였고 입을 걱정 먹을 걱정 없이 공동히 부유한 길로 나아간다고 소개를 하였다.
30여년전 이 촌은 생산과 생활을 모두 국가의 보조에 의거하던 촌이다. 1972년 사람들은 부유한 생활에 대한 동경으로 당시 23세나는 부화정을 촌당지부서기로 선거하였다. 그때 부화정은 자기를 믿어주는 고향사람들앞에 한세대도 가난하지 않게, 한사람도 대오에서 떨어지지 않게 여러분 모두를 거느리고 기어코 부유한 생활을 하도록 할것이라 선언하였다.
그는 농업기계화경작시험부터 시작하였다. 그는 몰래 주변도회지에 가 부분품들을 사 등에 지고 돌아오군 하였다. 사오는 족족 부지런히 가설하여 끝내 농경차를 만들어내고 땅을 경작하였다. 과거 건장한 로력 한사람이 40무의 밭을 갈았다면 농경차로는 한사람이 2000여무씩 경작할수 있어 효률이 50배가 높았다. 그러나 땅이라야 사질땅이라서 개량을 하지 않으면 농작물을 심을수 없었다. 촌에서는 토지개량에 달라붙어 전 촌 청장년 로력들이 건빵을 사가지고 엄동설한이든 오뉴월염천이든 하루도 빠짐없이 7년동안 줄곧 우공이 산을 옮기듯이 4000립방메터에 달하는 강바닥흙을 짊어내여 3300무에 달하는 척박한 경작지에 폈고 600무에 달하는 높고 낮은 사질땅을 옥답으로 만들었다.
대규모의 토지개량과 기계화생산은 대대적으로 농촌로력을 해방시켰다. 흥14촌 촌민들은 지금 2%의 농민들만 농사에 종사할뿐 기타 일군들은 농촌기업에 종사한다. 전 촌 116세대의 촌민들은 모두 화원식별장에서 살고 유선텔레비죤과 전화를 가가호호에서 사용하고있다. 이외 촌민들은 각종 복리대우를 받는다. 그리고 어른 아이할것없이 해마다 입쌀 100근과 밀가루 50근을 보조받으며 65세이상의 로인들은 퇴직제를 실행하여 매년 200근에 달하는 입쌀과 밀가루 100근씩 타고 또 달마다 80원씩 보조를 받는다. 촌민들은 농촌의료합작대우를 받고 병이 나면 대부분 의료비는 촌에 와 결산한다. 아이들이 탁아소에 가거나 입학하거나 모두 무료이다.
제1대 산동이민자 류위량가정은 널직한 객실은 먼지 하나없이 깨끗하였고 연람색 가죽쏘파며 가정영화관시설까지 갖춰놓았다. 70세나는 류씨의 가정형편을 보고 중국농민의 가정이라고 누가 믿을수 있겠는가. 류위량의 안해는 기자에게 《오늘날은 정말 꿈과 같습니다. 믿기 어려울 정도로 복된 살림을 하고있습니다. 》라고 감개에 젖어 말하였다.
흥14촌의 창업의 길을 돌이키며 부화정은 《군중을 이끌고 공동부유의 길을 가지 않는다면 조화로운 사회라는것은 있을수 없습니다. 다년래 흥14촌은 〈한세대도 빠뜨리지 않고 한사람도 빼놓지 않는다〉는 발전종지를 견지하여왔습니다. 인구가 많고 로력이 적은 집이거나 늙고 병든 집들에는 경제적 보조를 하는 외에도 로력이 드센 집에서 도급맡는 방법으로 빈곤에서 하루빨리 벗어나 전 촌이 공동히 부유한 길로 나아가도록 하였습니다》라고 소개를 주었다.
《농》자를 둘러싸고 《황금산업사슬》을 만들다
30여년간 흥14촌에서는 시종 《농》자를 둘러싸고 문장을 지어냈다. 당지의 농업자원을 리용하여 농부산물로 당지에서 농업산업화발전의 길을 찾았고 인간과 사회가 조화통일을 이루도록 하였다.
부화정은 기계화, 수리화를 실현하면 가물에나 수재년에도 수확은 보장할수 있다. 부유한 길로 나아가려면 반드시 농산물, 축산물 정밀가공으로 농업산업화의 길을 걸어야 한다고 말한다.
일찍 1985년 부화정은 전 촌 촌민들을 이끌고 일당 10톤 우유를 처리할수 있는 우유제품공장을 앉혔다. 당시 이는 전국의 유일한 촌급우유제품공장이였다. 생산에 투입하여 당년에 순수입 65만원을 올렸다.
그후 농업산업화길을 줄곧 견지하였는바 옥수수를 원자료로 년생산량이 1500톤, 생산액이 5000만원되는 꿀가공공장을 앉혔다. 그리고 맥주전용당공장 등 33개 기업소를 앉혀 총 8.7억원 되는 대형기업그룹-부화그룹을 건설하였다. 이리하여 생물공정 정밀화학공업, 가축사료. 우유제품 등 4대계렬의 100여가지 품종을 생산하는 산업체계를 형성하였다.
룡두기업의 발전으로 농민들이 장기적으로 량곡을 팔기 어려운 문제를 해결하였을뿐만아니라 농민들의 수입을 증가하였다. 흥 14촌에서는 촌의 옥수수를 국가수매값보다 2전높은 가격으로 전부 구입하였다. 이리하여 촌의 경제구조에 커다란 변화가 생겼다. 제1산업 수입은 전 촌 총수입의 5%를 차지하였고 제2산업, 제3산업 수입은 각기 38%, 57%를 차지하였다. 전 촌의 1만여무되는 경작지는 8세대의 전문세대에서 경영하고 98%의 농민들은 땅에서 해방되였다.
농민들의 수입증대거도를 확장하기 위해 흥14촌에서는 농업과 관련되는 림업, 목축업 및 려행업을 대대적으로 발전시켰다. 30여년간 그들은 줄곧 식수조림을 견지하여 1.13만무에 조림하였고 삼림피복률은 34.2%에 달하였다. 전문가의 예측에 따르면 목전 림목 총가치는 3억원을 넘고 매일 10만원의 속도로 장성한다. 2005년 5월 흥14촌은 유엔으로부터 국제생태산업시범기지로 명명되였다.
《지혜인입》전략으로 첨단과학기술제품을 생산
기업이 흥성해감에 따라 이 마을사람들은 촌민들의 문화기초로 현대기업관리와 시장의 변화발전을 파악할수 없으므로 반드시 외계의 두뇌를 빌려야 하고 인재를 입수해야 하며. 과학기술로 새로운 창업을 벌리고 제품의 과학기술함량을 증가해야만이 치렬한 시장경쟁에서 불패의 기반을 마련한다는것을 깨닫개 되였다.
1994년에 부화정은 상해미생물공정연구소 전문가 주형정교수를 초청하여 그의 지도하에 5개월만에 년생산량이 6000톤되는 레몬산공장을 앉혔다. 그들은 과학기술인재를 끌어들이기 위해 대가를 아끼지 않았다. 그들은 선후로 10만원, 20만원의 년금으로 할빈, 상해 절강 등지에서 26명의 생물, 화학공업전문가를 초청하여 촌의 과학기술고문으로 모셨다. 그리하여 촌기업에서는 생물공정제품과 정밀화학공업제품을 위주로 하는 첨단과학기술제품계렬을 형성하였고 다종신과학기술제품으로 국내공백을 메웠다.
사천에서 온 레몬전문가는 기자에게 그는 워낙 촌을 도와 레몬산공장을 앉힌후 바로 돌아가려고 하였으나 부화정의 인격에 매료되여 이곳에 남게 된것이 어느덧 7년세월이 흘렀다고 한다. 《흥14촌의 사업에 매료되였다기보다 부화정의 진정에 감동되였지요. 그의 창업정신은 물론 우리 과학기술자들에 대한 관심은 이루다 말로 표달할수 없습니다. 과학기술일군들을 친구로 대하고 량호한 사업분위기를 마련해주어 우리들로 하여금 창업의 의욕을 갖도록 합니다.》
다년래 시종 지혜를 끌어들이는 전략을 견지하여 현대농업 , 생태농업을 발전시킨 흥14촌은 이미 전 촌 농업자원의 합리한 개발과 지속적인 리용을 실현하였다. 목전 전 촌 1.68만무에 달하는 경작지는 기계화, 수리화를 실현하였고 량질고산옥수수 고담백콩 등 우량종 생산기지로 되였고 우량종비률이 100%에 달하였다. 당지의 풍부한 옥수수자원을 둘러싸고 산업개발을 진행하여 황금산업을 이룩하였으며 년 30만톤에 달하는 옥수수를 가공하여 생물제품, 정밀화학공업품, 보건품, 사료류 4대 계렬제품 30여가지를 개발하였다. 그중에서 4가지 기술은 국내의 공백을 메웠다. 한톤의 옥수수는 정밀가공을 거쳐 평균 매 한톤에 1만여원에 판매되는셈이고 10배의 부가가치를 생산한다. 이 촌에서는 지금 기술함량이 보다 높고 순환리용능력이 보다 강하고 규모가 보다 큰 옥수수산업화가공기지인 중국부화국제생태산업원을 건설하고있다. 예산에 따르면 래년 항목에 투입되면 년 옥수수 가공능력이 180만톤에 달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