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섯빛깔 문화이야기 <23> 시인의 사랑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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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섯빛깔 문화이야기 <23> 시인의 사랑법
  • 동북아신문 기자
  • 승인 2006.12.18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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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시인의 사랑법
오정환 시인, 부인 김일지 소설가에게 아주 특별한 생일선물

 

 
  오정환 시인(왼쪽)과 소설가 김일지 씨 부부가 최근 부산시내 한 카페에서 다정한 시간을 보내고 있다.


노란 은행잎이 항구도시의 거리를 색종이처럼 모자이크하는 밤. 김일지 소설가는 부산문화회관 근처의 어느 카페에서 맥주잔을 앞에 놓고 행복한 표정을 지었다. 부군인 오정환 시인으로부터 특별한 생일선물을 받았기 때문이다. 그것은 평범한 사람이 흉내 내기 어려운, 아무나 받을 수 없는 귀한 것이었다.

기실 그녀가 이런 선물을 받게 된 것은 그녀의 희귀한 생일 덕분이었다. 그녀는 윤칠월에 태어났다. 윤칠월이 돌아오지 않는다면 진정한 생일을 찾아먹을 수 없는, 아주 드문 사주였다. 그래서 해마다 양력으로 환산해 대충 생일을 챙겨먹곤 했지만 마음이 개운할 리 없었다. 그런데 올해에 마침 윤칠월이 돌아왔고, 그것을 계산해 보니 38년 만이었다. 결혼 후 처음 있는 일이었다.

부군인 오정환 시인은 모처럼 맞이한 아내의 귀한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모종의 작전을 짰다. 시를 한 편 써서 고등학교 후배인 권오철 작곡가에게 의뢰, 합창곡으로 만들어 그녀에게 바치기로 한 것이다. "한마디 말 없어도/그늘지고 구겨진 마음 다스리는/저 푸른 하늘 스스로 가라앉는 노을처럼/가슴에 스미는 맑은 눈동자/아아 온전한 우리 만남…." 이렇게 쓴 시는 극비리에 노래로 만들어졌다. 그리고 마침내 11월 30일 부산문화회관 중강당에서 합창곡으로 발표되었다. 그녀는 남편의 깊은 사랑에 감동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돌이켜보면 이들 부부는 결혼부터 남다른 데가 있었다. 중앙대 문창과 동문인 두 사람은, 어느 해 가을 부산에 강연 온 미당 서정주 시인에게 인사하러 갔다가 우연히 마주쳤다. 대학을 졸업한 뒤 몇 년 만이었다. 같은 도시에 살면서도 만남이 없었던 그들은 조금 서먹했다. 은사인 미당이 없었다면 형식적인 수인사 뒤에 헤어져야 할 입장이었다. 그러나 애주가인 미당이 그들을 놓아줄 리 만무했다. 술좌석에서 두 제자의 미혼을 확인한 스승은 그 특유의 어법으로 말했다. "여보게들 오 군과 김 군, 여직 짝이 없어 쓰것는가? 멀리서 구하려 말고, 그냥 두 사람이 맺으믄 어떨랑가? 주례는 내가 허믄 되니깨… 암."

사실 그들은 이미 결혼 적령기를 넘어선 상태였다. 적당한 혼처만 있다면 언제든지 결혼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런데 스승의 말씀을 듣고 보니 의외로 좋은 배필이 가까운 곳에 있었다. 이리하여 두 사람은 자의 반 타의 반, 대한민국 최고 시인의 중매로 부부가 되었다. 문단의 출신 성분상 성골에 해당된다고 할까.

한편, 시를 쓰는 마음도 사랑하는 마음만큼이나 미묘하고 감각적인 게 사실이다. 그렇지만 감각만을 좇아 언어의 형상미에 빠져서는 안 된다. 정신적으로 유장한 구석이 있어야 한다. 38년 만에 돌아올 생일을 기다리듯, 그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가슴에 담을 노래 한 곡 준비하듯, 길게 흐르는 강물의 깊이가 있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시의 두께가 얇아져서 금방 식상하거나 공허해진다.

미당은 생전에 선운사 침향을 즐겼다. 30년 전에 출간된 '미당 수상록'에 의하면, 침향은 향기로운 나무토막을 물속 밑바닥에 몇 천 년씩 가라앉혀 두었다가 꺼내서 볕에 잘 말려 피우는 향이다. 그러니 이것을 바다나 강물에 집어넣던 옛사람들의 마음은 자기 생전을 위해서 움직인 건 털끝만치도 없었고, 오직 후생들을 위한 배려만이 있었던 셈이다. 오늘날 젊은 시인들이 소시민적 즉물시를 즐겨 쓰는 현실에 비추어 볼 때, 어느 정도는 수용해야 할 태도가 아닐까?

하고 보니 오정환 시인의 사랑법은 시에서도 유다르다. 30년 가까운 시력(詩歷)에 시집은 고작 두 권. 남들만큼 시를 안 써서가 아니라, 시를 아끼며 쓰다 보니 두 번째 시집이 18년 만에 나온 까닭이다. 이 지상에 남길 시집 속에는 석류알 같이 좋은 작품들만 들어 있어야 한다는 그의 장인 정신이 새삼 돋보이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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