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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여름 한실 앞 호수에서 뱃놀이를 즐기고 있는 소설가 고금란 씨와 김미순 탁영완 박정애 시인(왼쪽부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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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산시 울주군 언양의 반구대를 지나 산 하나를 넘으면 한실이 나온다. 깊은 고요와 맑은 평화가 갈무리된 골짜기에 조그만 마을이 안겨 있다. 앞으로 큰 저수지가 가로막았고 뒤에 산들이 에둘러 있다. 아늑하기 이를 데 없다. 칩거하기에 알맞은 공간이다.
이곳에 우리 지역 문인들이 인연을 맺은 것은 순전히 고금란 소설가 덕분이다. 그녀는 마을 입구에 전통가옥 한 채를 마련하여 가까운 지인들에게 개방해 놓았다. 봄이면 야산에서 '거풍'을 하고, 겨울이면 아궁이에 불을 지피며 장작을 팰 수 있다. 누구나 여기에 오면 낯익은 고향집에 돌아온 듯 마음이 편해진다.
몇 년 전의 일이다. 한여름의 더위를 식히려고 세 여인이 이곳을 찾았다. 평소 친분이 있는 박정애 시인과 박옥 화백, 그리고 주인 고금란 소설가였다. 수수한 모습과는 달리 내면이 옹골찬 이 여인들은 1박 2일의 단합대회를 할 작정이었다. 언양 장에서 감자를 한 소쿠리 사서 산천이 울리도록 깔깔대며 오후에 한실 마을로 호기롭게 들어섰다.
그러나 오래 비운 집에서 그녀들을 맞이한 것은 마당 가득 돋아난 풀들이었다. 장마에 강아지풀과 토끼풀 등이 무분별하게 자라나 뱀이 나올 정도였다. 우선 이웃집에서 장작을 한 아름 얻어와 부엌에 불을 지피고 방안의 누기를 제거했다. 그리고는 눈치 볼 것 없이 다리를 쭉 뻗고 휴식을 취했다. 남자 없는 여인들만의 세계는 그 나름대로 또 재미있었다.
저녁을 먹고 목물을 한 뒤 마루에 누워 있으니 달이 떠왔다. 고요한 뜰이 푸른 달빛에 젖어 여인들의 가슴에 미묘한 정감을 불러일으켰다. 앞 저수지의 수면에 은가루 부서지는 소리가 귀에 와 닿는 듯했다. 하지만 달려드는 모기들 때문에 자꾸만 몸들을 뒤척여야 했다.
"야, 미인 세 명이 누워 있으니 한실의 수모기가 다 몰려오는 것 같다." 세 사람 가운데 가장 활달한 박정애 시인이 마당의 풀을 뽑아 모깃불을 피웠다. 그녀는 이미 하얀 잠옷으로 갈아입은 상태였다. 고금란 소설가와 박옥 화백도 불가로 다가앉을 수밖에 없었다.
생풀이 타면서 독한 연기가 피어오르자 웬만한 모기들은 피난하기에 바빴다. 불기운이 어지간히 무르익을 무렵 감자를 불에 집어넣어 구웠다. 도란도란 정담 나누며 달빛 아래 감자 구워 먹는 운치라니…. 둘러앉은 세 여인은 어느 모로 보나 시골의 소녀임이 분명했다. 마을 안쪽에서 개 짖는 소리가 가끔 들리고 시간은 더디게 흘러갔다.
"아함 졸린다. 들어가 자야겠다." 승용차를 운전해 온 고 소설가가 먼저 잠자리를 청했다. 박 화백도 엉덩이를 털고 일어나 슬며시 방으로 들어갔다. 그녀는 언제나 별 말이 없다.
"그래 알았다. 두 사람 먼저 끌어안고 자라." 박 시인은 곧 뒤따라갈 것처럼 말하고는 계속 마당의 풀을 뽑았다. 야행성인 그녀는 잠자리에 들지 않을 생각이었다. 달빛도 달빛이려니와 이튿날 새벽 저수지에서 피어나는 물안개를 놓치고 싶지 않아서였다. 기실 이런 밤에 시 한 편 쓰지 못한다면 작은 노동을 통해서라도 자신을 단련하고 싶었다. 아니, 풀 뽑는 행위를 통해 푸근한 흙에 더욱 동화되고 싶었다.
풀은 쉽게 뽑히지 않았다. 그러나 그녀의 집념은 풀보다 더 집요한 데가 있었다. 어디서나 뿌리내리는 생명력이 대견스럽긴 해도, 있을 자리에 있지 않는 존재는 제거되어야 마땅했다. 마당의 풀들은 한 주먹씩 뽑혀 모깃불 위에 던져졌다. 어느덧 그녀는 자신의 일에 몰입하여 시간 가는 줄도 잊고 있었다.
새벽 두 시쯤 되었을까? 오줌이 마려워 방문을 열고 나오던 고금란 소설가는 "오마야!" 비명 소리와 함께 그 자리에 쓰러지고 말았다. 교교한 달빛 아래 머리 풀고 흰 옷 차림으로 풀 뽑는 여인은 분명 귀신이었던 것이다.
"와 그라노." 뒤늦게 뛰어나온 박옥 화백이 고 소설가를 일으켜 세우고는 고소를 금치 못했고. 본의 아니게 귀신으로 둔갑한 박정애 시인은 기어이 마당의 풀을 다 뽑고야 말았다.
그 이후로 박 시인은 유달리 신들린 시를 많이 발표하고 있다. 시인 casscho@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