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동북아신문]우한 95후(后) 여자아이는 300km를 넘어 힘겹게 직장으로 돌아왔다. 돌아가려는 결심이 아주 결연했었다.
자전거, 걷기, 공유자전거, 카풀로 징저우시(荆州市), 첸장시(潜江市), 우한시 한양구(武汉市汉阳区)에 이르기까지 300여km를 3박4일 동안 전전하였다. 최근에 95후 여자아이가 힘겹게 직장에 복귀해 우한으로 출격한 이야기가 눈길을 끈다. "면대면(面对面)" 코너 기자는 깐루이(甘如意) 취재를 위해 우한에서 기꺼이 300km의 귀임길 뒷얘기를 알아봤다.

전염병이 폭발하여 "나는 돌아가서 동료들과 분담해서 도와야 한다"
2020년 1월 23일, 음력으로 연세가 29세인데, 코로나바이러스감염증-19의 영향을 받아서 우한 방역 지휘부는 출입 인원 통제를 선언했다. 우한에서 300여km 떨어진 징저우시 공안현 반죽당진 양가부두마을(荆州市公安县斑竹垱镇杨家码头村)은 고향으로 돌아가 설을 쇠는 깐루이는 언론의 뉴스와 단위 작업군 상황을 예의 주시하고 있었다.
1996년 10월에 태어난 깐루이는 2017년 후베이중의약고등과학교(湖北中医药高等专科学校) 의학검사기술과(医学检验技术专业)를 졸업하고 같은 해 9월 우한시 장샤구 금구센터 위생원 범호분원(武汉市江夏区金口中心卫生院范湖分院)에 입학해 화학 실험실 의사로 일했다. 깐루이가 소재한 과실(科室)에는 그녀를 포함해 단 두 명, 또 다른 동료는 50대였다. 전염병이 닥치자 깐루이는 우한으로 급히 돌아가서 동료의 분담을 도왔다. 그녀는 자신이 우한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을 부모님께 알렸다.
기자: 부모님이 동의하세요?
깐루이: 그들은 내가 돌아가야 한다고 생각했고, 나를 매우 걱정했지만 나를 지지했다.
자전거를 타더라도 돌아가야 한다
깐루이는 특별히 현으로 달려가서 외출에 대한 도로 상황을 둘러본 그는 언론을 통해 복귀에 필요한 절차를 파악한 뒤 직장과 연락을 취해 병원의 복귀증명서를 작성하기도 했다. 비상시기여서 고향에서 우한으로 가는 이 구간에 고속철과 고속버스 통행은 분명히 비현실적이라고 생각한 그는 자전거를 타고 우한으로 돌아가기로 결심했다.
기자: 당신더러 못 돌아가게 하는 너무 많은 조건이 있다. 교통수단도 없고, 당시의 정책은 출입을 허락하지 않는데 왜 또 가자고 했느냐?
깐루이: 가능한 한 빨리 직장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이렇게 동료와 함께 할 수 있다면 안심할 수 있고, 또 이는 자신의 책임이라고 생각한다.
1월 31일, 깐루이는 과자와 견과류, 귤 몇 개, 임시 통행증을 가지고 출발했다. 그가 발급받은 임시통행증에는 차량번호란에 "자전거"라고 적혀 있었고 통행 사유는 "우한쟝샤진커우센터위생원(武汉江夏金口中心卫生院)에 출근한다"라고 돼어 있었다. 아버지는 마음이 놓이지 않아서 단호하게 그녀를 현 정부 소재지로 데리고 가겠다고 했다. 2월 1일 오전, 깐루이는 공안현질통제센터(公安县疾控中心)에서 통행증을 발급 받았다. 이때 깐루이는 아버지가 더 데려다 주겠다는 제의를 거절하고 혼자서 자전거를 타고 우한으로 향했다.
기자: 출발하기 전에 꼭 생각나는 가장 중요한 문제는 바로 숙소인데, 낮에 자전거를 타면 움직이지만 그날에 어두워지면 어디에서 묵는가? 비상시기라서 호텔이 모두 문을 닫는데요?
깐루이: 맞다. 그 당시에 이런 문제때문에 저도 걱정이 되고 겁도 많이 났다. 최악의 문제는 만약 정말 주숙할 곳이 없다면 나는 당일 밤길을 재촉했을 거라는 거예요.

3박4일 동안 "내가 돌아 오겠다는 결심이 확고했다"
1월 28일 베이징에 있는 장쓰삥(张思兵)은 명령을 받았다. 그가 1월 29일에 우한부대에 도착 보고를 해야 했다. 장쓰삥이 출발할 때 화신산병원(火神山医院) 건설이 한창이었다. 전염병 발병 상황에서 수천만 명이 인터넷을 통해 "운감공(云监工)"에 나섰다. 1월 30일, 장쓰삥이 우한에 도착한 다음 날에 화신산병원 건설현장을 찾아 우한지방정부와 본격적인 인수인계를 준비했다.
2월 1일 오후 1시쯤, 깐루이는 징저우장강대교에 도착했다. 다리 위의 스탭이 그녀에게 잠시 자전거 통행을 못하게 해서 그녀는 자전거를 부식품점 앞에 놓아야 했다. 징저우장강대교에서 징저우 시내까지는 도착하니 이미 날이 어두웠고, 깐루이는 오랫동안 찾아서도 영업하는 여관을 찾지 못했다. 당시 깐루이의 휴대전화는 배터리가 없어서 끊겼고 폐업한 여관에 사람이 남아 있는 것을 보고 도움을 청하기 시작했다.
기자: 당신은 두렵지 않았는가? 예전에 이런 경력이 있었는가?
깐루이: 예전에는 없었다.
기자: 자전거를 타는 과정에서 지치지 않았어요?
깐루이: 조금은 움직이고 싶지 않은 느낌이 들었다.
작은 여관에서 깐루이는 라면 한 그릇을 먹고 쉬었다. 2월 2일 이른 아침에 그녀는 다시 길을 나섰다. 깐루이는 길가에서 택시 10여 대를 잡았지만 징저우에서도 교통 통제가 실시돼 택시가 성 밖으로 나갈 수 없었고 특히 우한 방향으로는 더욱 갈 수 없었다. 정오 11시에 택시 한 대가 그녀를 징저우 시내 중심가인 사시구(沙市区)에 내려 놓았다. 깐루이는 공유자전거 한 대를 찾았다. 네비게이션에 따르면, 사시구에서 다음역인 첸장(潜江)까지는 적어도 8시간동안 자전거를 타야 했는데 이 24살의 아가씨는 눈물을 흘렸다.
깐루이: 멘붕이 왔다. 이것은 아주 먼 거리를 타야 한다는 뜻이기 때문에, 여러 날을 탈 가능성이 존재할 것 같았다. 그렇게 오랫동안 탈 준비가 되었지만, 실제로 그런 상황에 부닥치면 정서적으로 변하는 과정이 있었다.
기자: 어떻게 할 것인가? 가지말고 돌아가면 안 돼나요?
깐루이: 물러서서는 안 된다. 돌아오겠다는 내 결심은 확고했고, 만약 내가 후퇴했다면 용서할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휴대전화 네비게이션에 의지해 깐루이는 공유자전거를 타고 318번 국도를 따라 우한 방향으로 달렸다. 가는 길에 비가 와서 그녀의 패딩 점퍼는 흠뻑 젖었다. 날이 어두워지자 깐루이는 휴대전화에 달린 "손전등"을 켜고 계속 탔다. 길을 잘못 드는 것을 피하기 위해 길에서 깐루이는 시시각각 주의를 기울였다.
2월 2일 오후 8시, 깐루이는 첸장에 도착했다. 친절한 민경들은 깐루이에게 한 여관을 찾아주어 먼저 그녀를 푹 쉬게 하고 다음날 방법을 강구하도록 도와 주었다. 다음 날, 민경들은 기꺼이 우한으로 혈액을 전달하러 가는 카풀을 찾았다. 낮 12시가 넘어서자 깐루이는 카풀을 타고 한양구(汉阳区)에 도착했다. 차에서 내린 후, 그녀는 공유자전거를 찾아서 휴대전화 네비게이션으로 계속 앞으로 달렸다. 네비게이션은 배터리가 특히 빨리 소모되어, 휴대전화는 곧 배터리가 없어졌다.
여의래 강하구 금구센터 위생원(如意来江夏区金口中心卫生院)에서 2년 넘게 일하면서 몇 차례만 우창, 한커우(汉口)를 찾았었다. 거리에 대해서 그녀는 사실 개념이 없다. 통제 중인 우한은 행인이 매우 적어 깐루이는 사람을 만나면강하금구에 어떻게 가는지 물었다.

"의료진들과 함께 코로나19 퇴치를 해서 승리하고 싶다"
2월 3일 오후 6시쯤, 또 6시간을 경과하여 마침내 우한시 강하구 금구센터 위생원 범호분원에 도착했다. 집에서 이곳까지 300여 km 노정을 3박4일이나 걸려 깐루이는 도착했다.
깐루이: 그날 내가 돌아왔을 때는 이미 늦은 밤이었다. 휴대폰이 꺼져 있어서 그 누구에게도 연락할 수 없었는데, 직장에는 야근하는 동료가 있었다.
기자: 당신 스스로 생각해 낼 수 있는가? 당신이 돌아 온 그날에 어떻게 되었나?
깐루이: 몸은 좀 피곤하였다. 힘들었지만 주로 즐겁웠다.
2월 4일 이른 아침, 깐루이는 다시 자신의 일터로 돌아왔다. 전염병으로 인하여 며칠 동안 그녀는 발열 환자의 혈액 샘플 20여 건을 일일이 검사하였으며 지역사회의 방역사업에 발맞추었다.
깐루이는 “본업에 충실하면서 의료인원들과 함께 ‘전염병’에 대항하여 최후의 승리를 거두고 싶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