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중국 연변출신이다. 1996년에 남편과 사별하고 2000년에 한국에 입국하였다. 여기저기 식당을 다니며 일을 하던 2001년 10월, 나는 아는 언니의 소개로 경기도 평택에 위치한 한 요식업체에 취직을 하였다.
몇 개월 일을 하다 보니 사장 김인혁씨가 나에게 각별한 관심을 보이며 보살펴주는 것이었다. 그때 사장님은 총각이고, 나는 애가 달린 미망인이었다. 나는 중국에 두고 온 딸이 있고 병환에 계신 아버님도 돌봐드려야 하니 매달 한화로 60만 원씩 보내야 한다고 그에게 솔직히 말했다.
이런 어려운 여건이기에 나와 결혼하려면 그런 일들을 감당할 수 있어야 한다고 하자 인혁씨는 모든 것을 다 받아드릴 수 있다며 청혼을 하였다.
그는 외동아들로 부모님과 함께 살고 있었다.
2003년 7월, 우리는 인혁씨 부모님께 인사를 드리고 혼인 허락을 받았다.
나는 그에게, 부모님을 속일 수는 없으니 나의 신상을 솔직히 말씀드리자고 했으나 남편은 그럴 필요가 없다고 하였다. 아버님은 성격이 괴팍한 분이라서 차라리 모르시는 게 나을 거라고 하였다. 이 일 때문에 나는 처녀 행세를 할 수 밖에 없었고, 죄책감에 사로잡혀 무척 힘이 들었다.
몇 번이나 부모님에게 사실을 밝히려고 마음을 먹었지만 그때마다 인혁씨의 극심한 반대로 말씀을 드릴 수 없었다. 아이라도 하나 낳은 후에 말씀을 드리는 것이 좋을 것 같다면서.
그러던 2004년 3월, 혼인신고를 하기 위하여 나는 중국으로 출국하였고, 같은 해 4월 12일, 한중 두 나라 민법에 따라 각각 혼인신고를 마치고 2004년 9월 20일 혼인비자를 받아 한국으로 재입국하였다. 그리고 같은 해 10월 16일, 집 근처에 있는 웨딩홀에서 결혼예식을 올렸다.
모든 것이 꿈만 같았다. 결혼 초기에는 식당을 운영해야 하므로 새벽 4시에 일어나서 음식준비를 하다 보니 육체적으로는 힘이 들었지만, 마음으로는 너무도 행복했다. 나는 내가 선택한 제 2의 인생에 대한 기대감으로 큰 꿈에 부풀어 있었다. 하루하루를 정신없이 보냈고, 남편은 큰돈을 벌어야 한다며 가게를 나에게 맡겨두고 부동산과 주식시장을 들락거렸다.
그때까지만 하여도 나는 남편에게 어떤 불길한 일이 생길 거라고는 꿈에서조차 생각 못했고 무조건 믿고 따르기만 하였다.
시어머님은 건강이 좋지 않아 집에 계셨기에 나는 혼자 홀과 주방을 도맡아 하였다. 하다 보니 일을 마치고 귀가하면 몸은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사업자등록증을 보니 남편의 이름도 아니요 시댁식구의 이름도 아니었다. 그리고 낯선 사람들이 남편을 찾아와 자주 만나는 것이 걱정도 되고 의심스럽기도 하였다.
그러던 2004년 12월 8일, 임신을 하게 되어 기쁜 마음으로 남편에게 이 사실을 알려드리면서 이것저것 궁금해서 물었다. 그제야 남편은 나에게 집안 사정을 사실대로 얘기해주었다. 예전에 주식을 하면서 2억 정도 빚을 지게 되었고, 지금은 신용불량자 LIST에 올랐으며 사채가 8천만 원이 있는 것 때문에 쫓겨 다니는 상황이라고!
남편의 말에 나는 자신의 귀를 의심하지 않을 수 없었다. 청천병력과도 같았다. 지금까지 살면서 즐겁고 행복했던 것들이 한순간에 물거품으로 되는 것 같았다.
나는 불안해 나기 시작했다. 살아온 날들이 여유 있는 삶은 아니었지만, 단 한 번도 빚을 안고 산적이 없었기 때문에 더더욱 불안했다. 시아버님은 시아버님대로 일은 하시는데 집에 생활비용은 관계하지 않으셨다. 어머님은 한숨만 쉬고, 남편은 나름대로 열심히 뛰어다니지만 들어오는 돈은 없었으며 자가용 기름 살 돈마저 나에게 받아쓰는 상황이고, 가계는 매일 적자운영이었다.
남편을 처음 만났을 때에는 사람만 좋으면 되지 환경이 문제냐, 그리고 만날 당시에는 식당을 운영하고 있었기에 빚이 있으리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던 터라 실망도 실망이지만 배신감마저 들었다. 날로 커가는 뱃속의 아이를 생각하면 눈앞이 캄캄해졌다.
빚이 2억 8천만 원! 나에게는 갚을 수 있는 금액이 아니었다. 뱃속의 아이만이라도 건강하게 낳아야지 하면서, 태교 책을 빌려 보고 태교 음악까지 빌려들으면서 애써 현 상황을 잊으려고 하였지만 쉽지 않았다. 억지로 마음을 달래며 하루하루를 보내던 중 중국에 계시는 친정아빠가 위급하다는 소식을 듣게 되었다. 일찍 아내를 여의고 홀로 4남매를 키워 온 아빠에게 마지막 효도를 하고 싶은 마음에 친구들에게 돈을 빌려서, 임신 6개월에 스트레스를 받아 약해질 대로 약해진 몸을 끌고 나는 중국으로 떠났다.
경제적인 어려움 때문에 함께 가자는 말도 못하는 남편의 처지가 내 마음을 더욱 아프게 하였다. 고향집에 도착하자 나의 다리는 저도 모르는 사이에 후들거렸고, 온 몸에 힘이 쭉 빠지었다. 나는 발을 헛디뎌 계단을 뒹굴게 되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병원이었다.
의사선생님은 영양실조에 빈혈이라고 하였다. 아버지는 집에 누워 계시고, 아버지를 보러 온 나는 병원에 누워있었다. 약 두 시간이 지났을 무렵 의사선생님이 황급히 달려와서 하는 말이, 뱃속의 아이가 이상하니 빨리 결정을 내려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당신도 위험할 수 있다고 하였다.
이건 또 웬 날벼락인가?
(총각인 남편에게 건강한 아이를 낳아 주고 싶었는데…아이를 낳은 후 모든 것을 시부모님에게 밝히려고 했었는데…)
아기는 보지 못하였지만 6개월 간 함께 숨 쉬며 정 들대로 들었던 것이다.
모든 꿈이 수포로 돌아가는 것은 물론, 아이까지 버려야 한다니 정말 죽고 싶은 심정이었다. 이 일을 남편에게 어떤 식으로든 알려야 했지만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해 7월 25일 오후, 나는 끝내 임신중절수술을 하였다. 친정아버님의 건강이 조금 회복되자 나는 급히 한국으로 돌아왔고, 악몽과 같은 사실의 자초지종을 남편에게 다 털어 놓았다. 남편은 역시 억지로 되는 일은 없구나, 하고 돌아앉아 눈물을 흘리더니 내 어깨를 다독이며 위로해 주었다. “너무 슬퍼하지 마, 조만간에 너에게 해줄 말이 있다. 우선 건강부터 추스르고 부모님들에게는 내가 알아서 말씀을 드리겠다.”
순간 나는 내가 선택한 남자가 너무도 자랑스러웠고, 아이를 잃은 고통보다 제2의 인생을 잘 선택했다는 판단에 더욱 행복했다. 죽고 싶은 생각까지 했던 내 자신이 너무도 어리석었다는 생각을 했다.
2005년 8월 7일, 남편은 술에 만취되어 밤 11시경에 귀가하였다. 부모님들이 계시는데 이렇게 실속을 터놓는 것이었다.
“솔직히, 난 주식투자를 하면서 빚을 많이 졌기에 한국인과는 결혼할 상황이 아니었다. 재기할 기회를 기다리던 중 나이를 먹는 것이 부담스러워 아이가 딸려있는, 미망인으로 혼자 사는 너와 혼인을 한 것이다. 그러나 절대로 널 무시한 적은 없었다. 너의 임신으로 작은 희망을 가졌었는데 너 때문에 아이까지 잃고 나니 더 이상 너랑 살아갈 이유가 없어졌다. 날 원망해도 좋고, 미워해도 좋다. 우리의 인연이 여기까지인가 보다. 그러니 넌 네가 갈 길을 가라.”
그러자 시아버님이 얼굴이 붉으락푸르락 해서 소리쳤다.
“이게 먼 소리냐? 며느리가 미망인이라니? 게다가 아이까지 딸려있는 사람이라고? 무슨 이런 한심한 인간이 다 있어, 두말 할 것 없으니 당장 내 집에서 나가!”
이렇게 나는 설명 드릴 겨를도 없이 자정이 지난 시간에 악몽을 꾸듯 집에서 쫓겨났다. 나는 집 근처에 있는 공원정자에 앉아 밤을 새웠다. 너무도 갑작스럽게 일어 난 일이라 황당하여 눈물도 나오지 않았다. 한 시간도 못되는 짧은 시간에 나의 인생은 이렇게 결정된 것이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어느덧 중국에 있는 딸에게 생활비를 보내야 할 날이 다가오고 있었다. 어떤 일을 해서라도 빨리 돈을 벌어야겠다는 생각에 나는 유흥업의 일종인 노래방 도우미 일을 하게 되었다. 빠른 시일에 돈을 벌 수 있다는 생각에 찬밥 더운밥 가릴 처지가 못 되었다. 남편의 뜻을 따라 본의가 아니게 자기 처지를 시부모님에게 속인 것은 누가 뭐래도 내 잘못이라는 생각에, 혼인은 파탄에 되었더라도 불안한 마음 달래기 위해 나는 시부모님에게 전화를 했다.
시부모님들은 아들로부터 얘기 들었는지 나를 집으로 들어오라고 하였다. 집에서 쫓겨난 2개월 후인 2005녀 10월 15일 시부모님과 나는 마주앉아 서로 말없이 눈물만 흘렸다. 시부모님들의 눈물이 나의 모든 억울함과 아픔을 다 씻어주었다.
시아버님은 나에게 편지 2통을 주면서 이렇게 말씀하였다. “인혁이가 너에게 전해주라고 한 것이다. 걔는 이제 돌아올 수 없는 먼 곳으로 갔으니 찾지 말고 인혁이보다 더 좋은 사람을 만나 잘 살아라.”
편지는 짧았다.
- 은희야, 사랑한다고 하기엔 너무 늦은 시간인 것 같구나. 난 먼 곳으로 간다, 나의 잘못을 인정할 시간도 없이 급히 간다. 나에게 여자를 알게 한 사람도, 가정의 따스함을 알게 한 사람도, 잠시라도 2세에 대한 기쁨을 갖게 한 사람도, 비록 짧은 시간이었지만 너뿐이었다! 고마웠다! 호적을 정리하는 일은 아빠가 나대신 해줄 것이다. 그러고 보니 너에게 화장품을 사준 일조차 없었네. 미안하다. 안녕히!
다른 한 봉투에는 현금 50만 원이 들어있었다. 나는 눈앞이 캄캄해졌다. 정신을 잃고 말았다. 나는 비몽사몽간에 집으로 돌아왔다.
나는 호적을 정리하고 중국으로 귀국하기 위하여 절차를 알아보려고 수소문 끝에 서울조선족교회를 방문하였다. 거기에서, 혼인파탄자의 간이귀화법에 국제결혼자로 동거 중에 남편이 사망했을 경우에는 귀화신청이 가능하도록 되어있다는 말을 듣게 되었다.
귀국을 해야 할 상황인데 국적을 취득할 수 있다는 인권센터 직원의 말을 도저히 미덥지 않았다. 그는 나에게 인터넷으로 해당 법을 보여주면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수속을 밟아야 하는지를 알려주었다. 그래도 믿을 수 없어 서울출입국을 방문하여 재확인한 결과 그 말이 사실이었다.
2005년 11월 27일, 시아버님으로부터 전화가 걸려왔다.
“아가야, 내가 출입국에 확인을 해보니 남편이 사망했을 경우에는 시댁이 신원보증을 해주면 국적을 취득할 수 있다고 하더라. 난 네가 한국에서 살았으면 한다. 널 딸처럼 생각할 것이다. 네 생각은 어떠냐?”
한때는 잠간이나마 남편의 투정과 시부모님의 냉정함으로 제2의 인생을 후회했던 내 마음은 또 한 번 아파나기 시작했다.
지금 나는 시부모님의 도움으로 국적을 신청해 놓은 상태이며 한주에 한 번씩 시부모님을 찾아가 인사를 드리며 부모자식처럼 허물없이 지내고 있다. 시부모님은 내가 한국국적을 취득하면 중국에 있는 딸도 한국으로 데려와서 모녀가 함께 살라고 했다. 난 그렇게 할 것이다.
정부 정책에 대한 고마움, 시부모님에 대한 고마움, 중국으로 돌아 갈 나에게 소중한 정보를 준 서울조선족교회에 대한 고마움! 난 역시 운이 좋은 사람인 것 같다는 생각에 더욱 열심히 살 것이다.

김명수: 서울조선족교회 인권센터 간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