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필] 시인의 아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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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필] 시인의 아내
  • 서가인
  • 승인 2019.10.21 09: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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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해 / 서가인

 

[서울=동북아신문] 가을이 오면 북경 향산(香山)은 온통 빨간 단풍잎으로 뒤덮인다. 가끔가다 보면 노란 단풍나무가 한 그루씩 섞여 있어 더욱 정취를 자아낸다. 아름다운 계절이다.

세 개 십 년하고도 오륙 년은 더 됐을 해이다. 우리 반의 32명 은 향산에 단풍 구경을 갔다. 우리가 공부하는 중앙 민족 학원 (지금은 중앙 민족 대학)의 간부 양성반이다. 25명은 남학생이고 나머지는 여학생이었다. 산에 올라가면 먹고 놀려고 남학생들은 맥주병에 먹을 것을 가득 들었다. 여자들은 빈손이다.  신장 위구르 자치구에서 온 남학생 한 명이 여자들은 입만 가져가면 된다고 하면서 학교를 나와서 산에 오를 때까지 입이 쉴 새 없다. 말이 대학생이지 지금으로 말하면 대학 갈 나이는 다 지났다. 나이가 제일 많은 학생은 40이 넘었다. 그 학생은 어느 공기업의 당위 서기인데 이곳에 온 것은 간판을 (镀金) 따기 위해서라고 한다.
 
산 정상에 올랐다. 멀리 학교가 가물가물 보인다. 우리는 내려오다가 펑퍼짐한 곳을 찾아 둘러앉았다. 내몽고와 신장에서 온 학생들은 노래도 잘하고 춤도 잘 춘다 연변에서 온 미옥이라는 여학생은 나이도 제일 어리고 노래에다 춤까지 춘다. 연변인민 모주석을 열애하네라는 노래를 간드러지게 잘 불렀다. 모두들 박수를 힘껏 치며 재창을 요구했다. 그때 원 밖에서 우리를 둘러싸고 있던 여행객 중에서 웬 여인이 갈채를 보내며 조선말로 잘한다고 웨친다. 나는 저도 모르게 일어서면서 돌아 보았다. 잔잔한 무늬가 있는 하늘색 셔츠에다 무릎 아래까지 가는 바지를 입었다. 줄무늬 남색 바지에다 벨트 백을 하였는데 우리하고는 완전히 다른 스타일이었다. 그때는 모두 회색에다 검은색을 입었는데 양식도 천편일률로 인민복을 입던 시기였다. 그녀의 나이는 사십 대 중간 같아 보였다. 머리도 파마를 했는데 목에는 적삼과 같은 계열의 실크 스카프를 둘렀다. 너무 신선했다.

나는 처음 보는 사람인데 대부분 학생들은 그를 알고 있었다. 교무처에 있는데 모두 방 선생님이라고 부른다. 우리 반에는 조선족이 세 명 있었다. 그다음 토요일에 우리는 방 선생님의 집에 초대받아 갔다. 첸먼 호텔(前门饭店) 길 건너편에 있는 6층짜리 아파트 3층에 살고 있었다. 방 선생님은 향산의 모습과 달리 편안한 실내복을 입고 우리를 맞이했다. 이야기하던 중 안방에서 오십 대의 남자가 나왔다. 얼굴이 둥글 넓적하고 키가 작았다. 머리가 큰 편인데 자애로웠다. 방 선생님은 남편이라고 우리에게 인사시켰다. 만두 소를 이미 준비해 놓아서 우리는 팔을 걷어붙이고 밀가루 반죽을 하였다. 낡은 아파트여서 방은 세 개인데 거실이 없었다. 밖에서 문을 열고 들어서면 겨우 밥상 하나 놓을 공간이 있다. 만두를 맛있게 먹고는 제일 큰 방에 가 모여앉아 이야기꽃을 피웠다. 큰 방은 서재 겸 거실로 쓰고 있었다. 방의 벽 한쪽은 책장으로 가득 채워져 있었다. 방 선생님의 남편은 유명한 시인 J 이었다.

우리 셋은 한 달에 두 번씩은 꼭 초대받아 가서 만두를 만들어 먹었다. 세 번 갈 때도 있었다. 언젠가부터는 우리는 방 선생님이라고 부르지 않고 사모님이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우리가 미안해서 실과라도 사 가지고 가면 다시는 사 오지 말라고 하면서 또 사 오면 다음에는 오지 말라고 하였다.

연변 사람은 집에 온 손님을 끼니때가 되여도 대접하지 않고 10리 길을 배웅한다는 말을 나는 수없이 들어왔다. 그 말은 연변 사람이 너무 야박하다는 말이다. 그래서 연변 사람은 멀리하는 게 좋다고 하였다. 그런데 내 주위 연변 사람들은 그렇지 않았다. 모두 따뜻했다. 어떤 곳이든 나쁜 사람이 있으면 좋은 사람도 있기 마련이다.

사모님도 연길에서 오셨다. 남편분이 북경으로 직장이 이동되어서 같이 따라왔다. 문화대혁명 때 남편이 감옥에 갇혀 있는 바람에 아들 셋을 키우느라고 이루 말할 수 없는 고생을 하였다고 한다. 열두 살 난 큰아들을  감옥으로 심부름을 시켰던 일이 제일 가슴 아팠다고 한다 세상의 리치는 음지가 있으면 양지가 있는 법이다. 지금 세 아들을 모두 좋은 처자를 만나 장가를 보냈고 각자가 좋은 직장에서 일하고 있다고 하였다.

사모님은 내가 글 쓰는 재주가 있다면서 남편에게 부탁해서 유명한 작가와 출판사를 소개받으라 하였다. 그러나 나는 가난한 선비는 되고 싶지 않다고 하면서 고향 도시로 내려갔다. 그 후에도 어떻게 지네고 있는가고 여러 번 전화가 왔다. 내가 결혼을 해서 남편과 같이 북경에 갔다. 사모님은 방 하나를 내주면서 새 이불까지 펴 주셨다. 친정에 간 것 같았다. 지금도 그 따뜻함이 기억에서 사라지지 않는다.

어쩌다가 사모님과 연락이 끊어졌다. 백방으로 알아보았으나 전화번호는 맞는데 없는 번호로 나온다. 올해 1월에 북경에 갈일이 생겨 갔다가 사모님이 살던 집을 찾아갔다. 완전히 변해버려 어디가 어딘지 분간을 할수가 없다.
사모님은 지금 어디 계신지?……

사모님의 이름은 방채봉이다.

서가인 : 상해 서울 거주. 재한동포문인협회 회원.
서가인 : 상해 서울 거주. 재한동포문인협회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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