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커버스토리]대학로 갈매기의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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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커버스토리]대학로 갈매기의 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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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3.12.05 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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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향신문]2003-12-4

내 이름은 조나단입니다. 정식 이름은 조나단 리빙스턴 시걸이지요. 어린 시절 책을 읽으며 단 하룻밤이라도 새운 적이 있는 이라면 내 이름을 기억하지 못하는 이는 없을 것입니다.

갈매기 조나단, 씩씩하고 지혜롭고 용감한 갈매기 조나단… 와, 저를 알고 있군요. 그 갈매기 조나단이 바로 나랍니다.

지금 나는 서울의 하늘을 날고 있습니다. 정확히 얘기하자면 서울생활이 두 달째 돼가고 있지요. 어떻게 해서 서울에까지 들르게 되었느냐고요? 세상에 있는 모든 바다의 수평선과 모든 들판의 지평선을 다 찾아가고 싶은 것이 나의 꿈이랍니다. 사실은 모든 갈매기들의 꿈이기도 하고요.

서울에 처음 들어왔을 때 대학로 거리에서 한 사내를 보았지요. 광대뼈가 나오고 구레나룻이 있는 사내는 마로니에 공원의 한 나무의자 앞에 쭈그리고 앉아 그림을 그리고 있었습니다. 노랑과 빨강, 초록색과 검은색의 먹물을 큰 붓에 묻혀 온갖 꽃과 나비, 무지개와 폭포, 구름들을 그려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이쯤 되면 사내가 하는 일이 무엇인 줄 짐작하시는 분이 있겠지요. 시골장터 같은 데서 색색의 물감을 가죽 붓에 묻혀 ‘가화만사성’이나 ‘소문만복래’와 같은 그림글자를 써주는 사람을 본 적이 있는지요? 사람들의 이름을 그림붓으로 써주면서 이름 위에 온갖 종류의 꽃과 나비, 벌, 무지개들을 부챗살처럼 새겨주는 사람 말이지요. 그런 그림을 일컬어 혁필화라 한다고요? 그런 그림을 그린 사람들은 혁화쟁이라 불렀다고요? 나는 사내가 자리한 바로 곁의 마로니에 나뭇가지 위에 앉아 사내가 신비한 그림들을 그리는 것을 지켜보았습니다.

지난 주말의 일입니다. 사내는 여전히 마로니에 공원의 그 자리에 나와 그림을 그리고 있었습니다. 그때 한 무리의 외국인 관광객들이 마로니에 공원 쪽으로 걸어오는 것이 보입니다. 나는 천천히 가지 위로 날아오릅니다. 그리고는 곧장 그들 쪽으로 날아가지요. 이내 사람들 사이에 소동이 일어납니다.

웬 갈매기가 서울 도심에 나타났지?

와, 크다 커, 거위 같아!

자신의 눈높이에서 천천히 날아가는 갈매기를 보는 일이란 쉽지 않은 일이지요. 게다가 하늘에서 보는 갈매기와 눈앞에서 보는 갈매기는 그 모습이 완연히 다르지요. 외국인 관광객들은 나를 따라오다가 필경은 혁필화를 그리는 사내를 발견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날 풍경은 여느 날과 좀 달랐습니다. 동양인과 서양인이 반반 섞인 그들 일행 중 한 동양인이 사내의 그림을 바라보더니 일행을 향해 큰소리로 이야기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동양인은 외국어에 퍽 능통한 모양이어서 두 나라 이상의 말로 일행들에게 설명을 했는데 여러분의 편의를 위해 그의 말을 옮기자면 대략 이런 내용이었습니다.

여기 지금 여러분이 보고 있는 이 그림이 바로 우리가 이번 한국문화 답사에서 만나고자 했던 조선 민화입니다. 야나기 무네요시는 ‘불가사의한 조선 민화’라는 논문에서 “조선 민화는 상상도 못할 만큼 신선하고 자유스러운 화풍으로 그 가치를 인정받을 날이 반드시 올 것이다. 불가사의한 미의 극치를 이룬 조선 민화가 제대로 소개되어지기만 한다면 온 세계의 관심을 충분히 끌 수 있는데도 오늘날 조선 민화의 전통은 다 쓰러져가고 이를 연구하는 이도 없어 안타깝다”고 이야기한 바 있습니다. 이 그림은 가죽붓으로 그리는 조선 민화의 일종인데 오늘 대학로에서 이런 조선 민화의 모습을 보게 되다니 이건 우리 답사를 위해 커다란 행운입니다.

일본인인 이 동양인의 설명을 들은 사람들은 깡마른 이 구레나룻의 사내가 그린 그림들이 조형화된 글자의 형상을 통하여 어떤 이상적인 상징의 세계를 나타낸다는 것을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일본인에게, 어떤 글자도 다 표현할 수 있느냐고 물었으며 일본인은 자신이 알고 있는 바에 의하면 분명 그렇다고 얘기했습니다.

한 프랑스인이 ‘파리의 하늘 밑’을 써달라고 주문했습니다. 인솔자인 일본인은 한국어에도 꽤 능숙해서 사내에게 프랑스인이 한 말을 통역해 주었지요. 사내는 즉시 글자 그림을 그려나가기 시작했습니다.

‘파리천상巴里天上’

사내는 ‘하늘 밑’을 ‘천상天上’이라고 자기 임의로 바꾸었는데 그것은 아무래도 하늘 밑보다는 하늘 위가 자신의 그림이 표현하는 세계로 적합하다는 생각 때문이었지요. 사내는 파리巴里를 써내려가며 사진에서 본 에펠탑의 모습을 새겨 넣었습니다. 탑 여기저기에 꽃과 나비, 무지개의 모습을 새겨 넣었지요. 천상天上을 새길 때는 당연히 무릉도원을 생각했습니다. 그는 파리의 탑이 아스라이 하늘을 닿는 곳에 복숭아꽃이 만발한 새로운 세상을 그려냈습니다. 맑은 개울과 꽃구름이 그 주위에 향기롭게 머물고 있었지요. 유토피아를 그리고 있어요…. 일본인이 말했을 때 모든 사람들의 입에서 탄성이 흘러나왔습니다. 그림을 받아든 프랑스인은 한동안 사내를 껴안고 기뻐 어쩔 줄 몰랐습니다. 그는 파리야말로 이 지상의 낙원이라고 굳게 믿어온 사람이었지요. 누구로부터 그림을 배웠는가 묻는 이도 있었습니다. 사내는 할아버지라고만 짧게 대답했습니다.

한 미국인은 메리 크리스마스를 적어달라고 했습니다. 사내는 주저없이 ‘백설성탄白雪聖誕’이라고 적어내려 갔습니다. 사내는 네개의 글자 모두마다 아기 그림들을 새겨 넣었습니다. 아기들은 색색의 꽃나무와 나비들이 그려진 들판 위에서 놀고 있었는데 화사한 산과 바다와 구름과 별들이 그 주위에 펼쳐져 있었습니다. 어떤 아이들은 강물에서 헤엄치기도 하고 어떤 아이들은 구름 위에서 별을 따기 위해 손을 뻗치고도 있었지요. 그러나 마지막 탄誕자에 새겨진 아이만은 달랐습니다. 바구니 안에 담겨진 아이는 눈보라 속에서 울고 있었으며 얼굴은 심하게 뒤틀려 있었습니다. 다행인 것은 눈길을 지나고 있는 한 나그네가 두 손으로 아기 바구니를 받쳐들고 있다는 것이었습니다. 사내는 아이의 머리 둘레에 금빛의 광배를 그려 나갔습니다.

아기 예수의 탄생인가요?

통역을 하던 일본인이 물었습니다

내 딸이지요. 태어날 적부터 눈이 보이지 않았답니다. 돈을 많이 벌어 딸의 눈을 뜨게 해주고 싶어요. 사내의 이야기가 끝났을 때 사람들 모두 격려의 박수를 쳤습니다. 이날 사내는 모두 열네장의 메리 크리스마스 그림을 그렸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그 그림을 좋아했습니다. 사람들은 그림 값으로 얼마씩의 돈을 주었는데 그중에는 100달러짜리 지폐를 꼭 쥐어준 부인도 있었습니다.

그때였습니다. 여기저기서 호각 소리가 들리고 갑자기 들이닥친 경찰들이 사내를 붙들어 갔습니다. 사내뿐이 아니었습니다. 대학로 주변에서 팔찌나 목걸이, 반지들을 팔던 두명의 네팔인과 한명의 인도 사람도 붙들려 갔습니다.

통역을 하던 일본인이 무슨 일인가, 저 사람이 무슨 잘못을 했는가 물었습니다. 한 경찰관이 불법체류자를 단속하고 있다는 말을 했습니다. 저 사람은 한국 사람이 아닌가? 다시 일본인이 물었을 때 경찰관은 웃으며 조선족이라 답변했습니다. 조선족은 한국사람이 아닌가? 일본인의 되물음에 경찰관은 귀찮다는 듯이 미간을 찌푸리며 떠났습니다.

여러분 중에 혹 불법체류자라는 말이 무슨 말인지 알고 계신 분 있으세요? 이런 말은 갈매기의 나라에서는 전혀 쓰지 않는 말이지요. 모든 갈매기들은 여권이나 비자 없이 세계의 모든 바다에서 살 수 있으니까요. 참, 조선족은 또 무슨 말인가요? 조선족과 한국사람은 어떻게 다른가요?

모든 종류의 갈매기들은 다 갈매기일 뿐이지요. 그런데 사람들은 왜 조선족이 있고 한국족이 있고 일본족과 중국족이 있나요? 그렇게 구분을 하면 뭐가 달라지나요? 구분을 해서 살아가면 또 무슨 행복이 있나요?



나는 오늘도 대학로 거리를 이리저리 날아다닙니다. 혹 사내가 이 거리 어디에선가 다시 혁필화를 그리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서 말이지요. 꼭 대학로가 아니더라도 좋아요. 혁필화를 그리는 털복숭이 사내를 어디선가 보거든 내게 일러줘요. 어떻게 일러줄 수 있느냐고요? 손전화 번호라도 있느냐고요? 어느날 대학로 거리를 걷다가 문득 날아오르는 갈매기 한 마리를 보거든 그게 나 조나단이라고 생각하세요. 그때 손을 한번 크게 흔들어주세요. 혁화쟁이 털보 아저씨, 언젠가 조선족 사람들도 한국에서 사이좋게 꼭 살 날이 올 거예요. 힘내세요! 갈매기 조나단의 꿈과 이름을 기억하는 모든 이들도 안녕! (끝)

▲곽재구(49)


1954년 광주에서 나 전남대 국문과를 졸업했다. 1981년 중앙일보 신춘문예에 시 ‘사평역에서’가 당선돼 등장했다. 현재 전남 순천대 문예창작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시집 ‘사평역에서’ ‘전장포 아리랑’ ‘한국의 연인들’ ‘서울 세노야’를 상재했다. 아울러 ‘아기 참새 찌구’ ‘세상에서 제일 맛있는 자장면’ 등의 동화집과 산문집 ‘내가 사랑한 사람 내가 사랑한 세상’ ‘포구기행’ 등을 냈다. 제10회 신동엽창작기금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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